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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5)(주)보배-④성장기

소주 안정적인 판매 속 1967년 사업 확장 난관 1969년 익산 마동 이전

1969년 5월 익산시 마동(현재의 보배 자리)으로 소주공장을 확장 이전한 보배는 과학적 품질 관리와 전사적 판매관리로 기틀을 잡아간다. (desk@jjan.kr)

1963년 소주 양조장을 창업한 30세의 문병량 사장은 창업 2년만에 상표와 상호를 보배로 바꾸고 서울 시장을 넘본다. 이 당시 전국에는 300여개의 소주공장이 난립,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게다가 문병량 사장이 군산에서 이리로 터전을 옮겨 소주업에 진출한 지 불과 1년만인 1964년 6월 청주를 본업으로 하던 대한양조 강정준 사장이 '백화'상표를 내걸고 소주시장에 뛰어들었다. 문병량 사장으로서는 지역 시장을 방어하는 한편 시장 규모가 큰 서울 무대로 진출, 판로를 확대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보배가 서울로 진출하던 1965년 7월 당시 충무로는 서울의 중심가였다. 동국대학교 옆에 소주 하치장과 서울사무소를 개설한 보배는 소주업계 공룡기업 진로와 전남의 삼학, 보해, 전북의 백화 등 쟁쟁한 소주 메이커들과 경쟁했다.

당시 진로는 '야야야 차차차'CM송으로 소주시장을 급속히 장악해 가고 있었고, 보배의 존재는 너무 미약했다. 하지만 문병량 사장은 1903년생으로 1924년부터 양조장을 경영해 온 대선배 장학엽 회장을 각별히 존경하며 따랐고, 그로부터 사업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환갑을 훌쩍 넘긴 장 사장은 이제 막 소주공장 하나를 설립해 서울에 진출하겠다고 좌충우돌하는 젊은 사업가 문병량이 한편으로는 가소롭고, 또 한편으로는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병량 사장은 장학엽 회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를 통해 보배의 미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 진로 장학엽 회장의 영향

1960년대에 서민들 사이에서 닭곰탕집이 유행했는데, 닭곰탕을 안주삼아 소주 소비도 많았다. 서울 충무로, 무교동 등 시내 곳곳 대부분의 술집에서는 진로소주가 대세였고, 진로의 CM송 '야야야 차차차'는 애주가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문병량 사장은 보배소주도 광고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시 전차 내에 광고를 하고, 라디오 CM송을 제작해 방송광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1968년 6월에는 CM송 '보배로구나'를 선보였는데, 송해 씨가 부른 이 CM송은 국민들 사이에 유행가 노래처럼 친근하게 파고들어갔다. 시나브로 보배소주의 존재 가치가 애주가들 가슴에 자리잡아 갔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보배로구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보배로구나 보배로구나/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마시는 기분 취하는 기분/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아무리 마셔도 뒤탈없는 보배/ 쿨쿨쿨 쿨쿨쿨 마셔보는 보배/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보배소주는 1966년 6월 전국 소주 인기투표에서 최우수상인 재무장관상을 수상하고, 이어 8월에는 전국주류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인 국세청장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품질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 보배주정 설립으로 수직계열화

보배소주가 안정적으로 팔려나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문병량은 사업 확장을 구상한다. 그가 생각한 사업확장은 수직계열화였다. 사실 희석식 소주는 주정공장으로부터 공급받는 주정에 물을 일정비율 섞어 만드는 제품이다. 어찌보면 주정과 물, 그리고 첨가물을 잘 배합한 뒤 병입해 판매하면 그만이다. 핵심 원료인 주정의 품질을 제어할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주 제조업체가 양질의 소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좋은 주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제 아무리 큰 소주공장 사장도 주정공장에서 넘겨주는 주정을 그대로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좋은 주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일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소주공장이 제아무리 맛좋고 독특한 소주를 만들고 싶어도 주정공장이 양질의 주정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셈이다.

양질의 주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소주의 품질과 생산효율, 이윤을 높이는 데 직결되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었다.

문병량 사장은 1967년 6월 주정 생산업체인 보배주정공업사를 별도로 설립, 수직계열화 구상을 곧바로 실행했다. 창업 4년만이다. 그러나 주정공장은 소주공장과 달리 설비가 중공업 수준이고, 따라서 초기 투자금이 많이 들어간다. 게다가 문병량 사장이 보배주정을 설립할 무렵은 주정공장이 급증했다. 1966년 한햇동안에 무려 9개의 주정공장이 신규 설립됐고, 보배주정이 설립된 1967년 무렵에는 30개에 달했다. 이처럼 주정공장이 급증한 것은 양곡부족에 처한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사용하는 증류식소주 면허를 제한하고, 주정을 원료로 사용하는 희석식 소주 제조 체제로 전환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당국이 주정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증류식 소주공장에 주정제조면허의 길을 터주면서 많은 소주공장이 주정공장으로 전환한 것. 이 때문에 주정 원료로 사용하는 고구마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결국 원료가 부족하니 주정공장 가동률이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 부도의 아픔을 딛고

군산의 대한주조가 청주와 소주공장에 공급할 주정공장 백화산업을 설립했지만, 고구마가 없어 수입 당밀 등으로 근근이 주정을 생산하다가 급기야 1967년 5월에는 생산을 일시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같은 주변 악조건 속에서 보배주정을 출범시킨 문병량 사장은 결국 자금난에 봉착했고, 부도를 내고 만다. 갑작스럽게 부도를 낸 문병량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34세의 젊은 사장은 그동안 닦은 신뢰를 바탕으로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곧바로 회생한다.

주정공장 설립 문제로 한동안 홍역을 앓고 일어선 문병량 사장은 1969년 5월 익산시 마동(현재의 보배 자리)으로 소주공장을 확장 이전하는데, 문병량의 보배가 완전한 기틀을 잡아가는 신호탄이었다.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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