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평생을 선생으로 사는 친구가 지금도 예비고사장에서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매는 꿈을 꾼다며, 가슴 아픈 시험의 추억을 털어놓곤 한다. 벌써 수십 년이 흐른 학창시절의 추억이 아직도 잠결에 재생되는 걸 보면 그때 수능 시험의 압박이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때만이 아닐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험생이 받는 압박감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71만여 명의 태도와 실력은 모두 다르지만, 수능에 10대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전투적 자세는 공통적이다. 그래서인지 인생의 큰 산을 넘어야 할 고비를 맞은 수험생들이 수능에 대처하는 방식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생리 주기를 피하기 위해 시험 전 한 달 동안 피임약을 복용하며 호르몬을 조정하기도 하고, 우황청심환을 먹고 시험장에서 잠들어버리기도 한다. 도시락에 체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아예 밥 대신 초코바로 열량을 보충하라고 권하며, 시험장 분위기에 긴장해 기절한 감독관도 있다. 학부모의 마음은 더하다.
중학생이 집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몰살케 한 얼마 전 사건은 충격적이다. 경찰은 부자간의 불화가 원인이라고 했다.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40대 아버지는 춤과 노래에 흥미를 보이는 아들이 실망스러워 골프채로 배를 찌르고 혼을 내며 막다른 길로 몰아붙였고, 철부지 아들은 차라리 아버지 없는 세상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판검사가 되라며 공부를 강요하던 아버지가 아들을 몰아붙인 결과는, 가족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불행의 얼굴로 되돌아 왔다. 자식보다 더 자식의 진로에 관여하는 부모, 수험생보다 더 애쓰는 학부모가 부지기수다. 그 간절한 소원은 자녀 사랑의 발로일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수험생이 만점 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험생 중 이번 수능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 못해 아쉬워하는 학생이 98%에 이를 것이라고 전문가는 조언한다. 고득점에 해당하는 상위 1~2 %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해 소리 없이 좌절하며, 나쁜 시험의 추억을 남길지도 모른다.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씨가 지난 달 서울의 한 대학에 왔다. 페이스북과 인터넷을 통해 최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닉 부이치치는 테트라-아멜리아 신드롬(Tetra-Amelia Syndrom)이라는 희귀병으로 발가락 2개가 달린 작은 발 하나만을 가진 채 1982년 호주에서 태어났다. "나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고, 발가락 2개가 있을 뿐이지만, 대학에도 갔고, 지금까지 38개국에서 1,500번의 강연을 했으며, 두개 단체의 회장이다. 지금까지 35만 명과 포옹했고, 골프, 수영, 서핑을 즐기며,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 기쁘다"며 유쾌하게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연 말미에 일부러 단상에서 넘어졌다. 짚을 손이 없는 부이치치는 성경책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줘 청중을 숙연하게 만들며 큰 감동을 남겼다. 발가락으로 키보드 음악을 신나게 연주하고, 어린 시절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한 시간 내내 청중을 압도한 그가 뜨거운 가슴으로 전한 메시지는 "Never Give Up"이다. 팔다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던 부이치치가 청중에게, 살아오는 동안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적이 되어 주라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를 만들어내는 수능시험을 사회적 독약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수험생에게 점수를 묻기보다 위로와 칭찬을 먼저 건네며 그들의 청소년기를 따뜻하게 보듬어 줄 일이다. 런던타임즈가 뽑은 행복한 인생 1순위는 바닷가에서 지금 막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다. 아기를 목욕시킨 후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작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낸 의사도 뽑혔다.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수능이라는 자신과의 경주를 멋지게 치르고 돌아온 자녀를 가슴에 안은 아버지가 행복한 인생 1순위가 아닐까. 그 행복감을 공유하며, 성적에 절망하는 아픈 추억이 아닌, 사랑에 둘러싸인 달콤쌉싸름한 시험의 추억을 남길 일이다.
/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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