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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경험이 말 시키는 '황혼잔소리'

송현섭 (재경 전라북도민회 회장)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가지 일을 겪게 된다.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다. 좋은 일이야 기뻐하고 즐기면 되지만, 궂은 일은 여러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잘못한 행위에 대한 후회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좌절과 후회가 길어지면 인생 자체가 엇나갈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경험이 늘어난다. 후배나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경험이 그들에게 말을 시키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말은 그의 인생이 농축된 표현이다. 성공했다고 인정받건, 실패자로 보이건 간에 크고 작은 경험이 한마디 한마디에 녹아 있다. 문제는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얘기만 하는데도, 그 말이 잔소리로 들린다는 점이다.

 

나도 많은 경험을 했다. 작은 성취에 우쭐한 적도 있었고, 맘 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잠 못이룬 밤도 많았다. 그런 경험 하나하나가 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나의 경험이 특히 후배들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있다. 비슷한 또래들을 만나면 「부인 잘 모시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부인을 황후처럼 모시면 내가 황제 대접을 받는다. 특히 늙어서 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인생이 쓸쓸하고 괴로워진다. 건강도 못 챙긴다. 오래 살려면 부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후배들에게는 「친구 사이에 돈 거래 하지 말라」는 얘기를 강조 한다. 친구 잃고 돈 잃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가 없이 도와주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다. 도와주는 것과 거래는 다르다. 이 말에도 물론 몇 번의 경험이 실려 있다.

 

5·16 후 군사정부는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했다. 일정 금액만 신권으로 바꿔주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에 예치토록 했다. 마침 찾아온 친구에게 한도가 넘는 돈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이라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 은행에 있어 모두 바꿔줄 수 있다는 거다. 가진 돈을 모두 맡겼다. 그런데 감감 무소식. 주소도 몰랐다. 물어물어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한달만에 겨우 찾았다. 그 돈으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며 벌어서 갚겠단다. 기가 막혔다. 당시 나도 집 한 채 없는 상황. 빨리 갚겠다니 더 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또 무소식. 다시 찾아가니 이사 가고 없었다.

 

성공한 젊은 사업가 시절이던 70년대,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다며 잠시 빌려달란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빌려줬다. 한달 쯤 뒤 소식이 없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에 있는데, 내일 부도가 난다는 것. 미안하다며 내 돈은 꼭 갚겠다고 말했다. 황당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성공해서 갚으라고 했다. 몇 번 편지는 왔지만, 결국은 무소식. 나중에 들어보니 계획적 도피였다. 어쨌건 그 돈으로 인해 나도 부도위기에 몰렸다. 잘 나가던 사업가가 부도 내고 교도소 갈 형편까지 됐다. 다행히 그 위기를 극복했다.

 

마음이 평온할 수 없었다. 그들이 미웠고, 자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났다. 그래봐야 내 몸과 마음만 상한다는 걸 알았다. 어느 순간 돈받기를 포기하고, 그들을 용서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다. 단념할 것은 빨리 단념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제는 돈이 관련되니 친구가 곁을 떠난다는 점이었다. 친구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잃는 게 안타까웠다. 베풀 수 있는 한 베푸는 게 인생의 도리다. 도와주려면 그냥 베풀어야지, 친구 간에 돈거래는 안된다는 철리를 깨우쳤다.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얘기한다.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듣는지는 모르겠다. 필요한 얘기니까 한다. 살아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괜한 잔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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