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한 선수…한국에 펜싱 첫 메달 안기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시골 소년의 눈에 '칼 싸움'을 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퍽 멋져 보였다.
그 길로 체육교사를 찾아가 펜싱 선수가 된 이 소년이 먼 훗날 4회 연속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교때 소년체전에 한번 출전했으나 예선에서 탈락하고, 고교때도 별볼일 없는 선수였던 그 소년이 당당히 16년동안 국가대표를 계속해서 지내면서 전국 최고수가 되고, 석사·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국제무대에 당당히 어깨를 내밀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상기(46) 익산시청 펜싱감독의 생생한 실화다.
이상기 감독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시작으로 92년 바르셀로나·96년 애틀랜타·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4번 연속 출전했다.
국내 올림픽 역사상 4회연속 올림픽에 선수로 참가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다섯손가락 이내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 에빼 종목으로 출전, 동메달을 따냈다.
이는 한국 올림픽 펜싱 역사상 첫 메달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 1위, 개인 1위의 자리에 숱하게 올랐던 그는 국가대표 코치와 한국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을 지낸 공을 바탕으로 체육훈장 백마장, 체육훈장 맹호장 등 가장 영예로운 훈장도 받았다.
김제중앙중 시절 이상기는 선배들이 마스크와 흰 도복, 그리고 칼을 가지고 싸움하는 것에 매료돼 펜싱을 배웠다.
3학년때 소년체전에 한번 출전하긴 했으나 예선에서 보기좋게 나가 떨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전북체고에 진학, 펜싱 선수의 길을 걸었지만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국체대 입학이 성장의 계기가 됐다.
한 선수가 특기자로 입학하려다 진로를 바꾸면서 그가 운좋게 대신 입학한 것이다.
무작정 담당 교수를 찾아가 매달렸음은 물론이다.
입학할땐 환영받지 못했지만 열정을 가진 그는 최고의 선수와 지도자가 총집합한 한국체대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대학 2학년때 국가대표가 된 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방문한 곳은 세계청소년대회가 열린 네덜란드였다.
경기 시작 5초도 안돼 상대의 몸놀림이나 칼에서 느껴지는 파워에서 이미 자신은 상대의 적수가 아님을 실감했다고 한다.
귀국후 그는 연습을 거듭했고 초심을 잃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이 몸을 풀때 동료 선수와 담소를 나누며 가볍게 할때도 이상기는 최선을 다해 뛰었고, 스트레칭때도 땀을 흘렸다.
직업이 국가대표인 그는 결혼 후 10년 넘게 주말부부로 생활했다.
걸핏하면 외국 전지훈련으로 한달 넘게 집을 비울때도 많아 아내와 두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 나중엔 국가대표를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대한펜싱협회 중역들이 아내를 찾아와 "당신의 남편이 없으면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고 집요하게 설득했고, 결국 이상기는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국가대표 16년에 이어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그에겐 묘한 징크스가 생겼다.
파란색 옷을 입어야만 승리한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전국 정상권의 익산시청 펜싱팀을 지도하는 그는 주요 경기에 출전할때면 자신도 모르게 항상 파란색 옷을 챙겨 입는다.
한국체대 1학년때 국가대표 상비군 13명중 자신을 제외한 12명이 모두 국가대표가 됐을때 너무 괴로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선발전이 있던 바로 그날밤 홀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은 하늘도 버린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는 마흔살이 넘어서야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 현재 이리중 2학년에 재학중인 그의 둘째 아들(이주형)이 펜싱 선수를 꿈꾸며 훈련하는 것을 볼때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는 이상기 감독.
언젠가 국가대표 감독도 맡아보고 대학강단에 서고 싶다는 꿈을 향해 오늘도 쉼없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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