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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체육 비사] (14)김계수 국제축구심판

전주공고서 축구인생 시작…전국체전 출전 금메달 일궈

2007년 7월 20일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팀이 아시아투어의 일환으로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경기를 갖기를 갖기 위해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모습. (desk@jjan.kr)

70년대와 80년대 전북이 배출한 차경복(고인), 최길수, 길기철씨 등은 국내 최고의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크고작은 축구 국제경기가 있을때면 항상 휘슬이나 깃발을 잡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 계보를 잇는 사람이 바로 오랫동안 국제심판을 지냈고, 지금도 K-리그에서 심판으로 활동중인 김계수(50)다.

 

축구인들 사이에서 "심판은 잘봐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승패가 갈리는 경기에서 심판이 아무리 공정해도 피해의식을 가진 선수나 팀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려운 자리지만 보람도 크다고 한다.

 

국가대표였던 김남일 선수가 프로축구 전남 주장일때(2004년)의 일이다.

 

김 선수가 갑자기 김계수 심판에게 뛰어와 "선생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지난번 경기 이길 것을 못이겼습니다"하며 강도높게 항의를 하더란다.

 

프로연맹에 제소돼 심판 판정이 잘못으로 드러나면 해당 심판은 경기 출전을 제한받는 등 징계를 먹는다.

 

하지만 경기 분석 후 김 심판의 판정이 맞는 것으로 결론나자 김남일은 곧바로 그를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그 이후에도 김계수 심판만 보면 김남일은 선수로서 모든 예우를 다했고, 경기때 동료들이 항의라도 하면 "그만하라"고 제지하곤 했다.

 

하지만 김계수 심판에겐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있다.

 

2004년 5월 8일 요르단 암반 경기장에서 이라크와 사우디 경기 심판을 맡았을때의 일이다.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이 게임에서 사우디는 비겨도 되지만, 이라크는 꼭 이겨야만 본선에 진출할 상황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과 전쟁중이어서 홈 경기를 모국에서 갖지 못하고 제3국인 요르단에서 치러야만 했다.

 

사우디가 1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또다시 한골을 추가, 승리를 굳히는 듯 했다.

 

하지만 김 심판은 사우디의 추가골을 오프 사이드로 판정,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실수로 판정을 잘못한 대표적 사례라는게 김 심판의 회고담이다.

 

결국 이라크가 3대 1로 승리, 본선에 진출해 동메달을 따내는 신화를 일구게 된다.

 

경기후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그는 "심판의 판단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 경기"라고 회고했다.

 

김계수 심판은 전주가 고향으로 중·고교 축구선수때 꽤나 날렸던 라이트 윙이었다.

 

축구를 하기위해 전주공고에 입학했으나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광주에 있는 숭의실고로 전학했다.

 

80년 전주에서 열린 제61회 전국체전때 그는 결승전에서 득점을 하는 등 맹활약, 당시 전남대표팀에 값진 금메달 하나를 선사한 기억도 있다.

 

친형인 김용수씨도 76년 전국체전때 전북대표 일반부 축구선수로 참가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순탄한 축구 인생을 걸을 것처럼 보였던 김계수는 고교 졸업 직후 어려운 가정사정과 스카우트 파동 등에 휩싸이면서 축구를 중단, 삼양사(현 휴비스)에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현재 그는 휴비스 전주공장 장섬유 생산라인에서 27년째 근무중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축구를 중단한뒤 그는 10년 남짓 축구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않고 축구를 잊으려 애썼다.

 

하지만 축구와 맺어진 운명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98년 국제심판에 합격한뒤 2007년까지 만 9년동안 국제무대를 뛰어다니며 심판으로 활동했다.

 

왕성한 체력, 유창한 영어실력, 그리고 가지런한 몸가짐이 국제심판의 필수조건이다.

 

12분동안 2800m 이상 달릴 수 있어야 하고, 50m를 7.5초 이내에 2회연속 주파해야 한다.

 

200m를 28초 이내에 달리되 이를 두차례 반복할 수 있는 강철체력은 필수다.

 

167cm의 작은키에 65kg의 왜소한 몸이지만 지금도 100m를 12초8에 끊을만큼 무서운 스피드를 자랑한다.

 

심판의 생명은 공정성에 기초한 신뢰여서 무엇보다도 잡음이 없어야 한다.

 

그는 국제심판과는 별도로 2001년부터 현재까지 10년 넘게 프로축구 K-리그 전임 심판으로 뛰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36경기에서 심판을 봤는데 연고지 배제 원칙에 의해 항상 타 시도에서 열리는 경기에 나선다.

 

생산직 사원으로 일하면서 심판으로 활동하는 그를 휴비스측에선 회사의 자랑으로 생각하고 항상 배려를 해줬다.

 

앞으로 3년간 심판으로 활동한뒤 국제축구연맹 심판 강사로 활동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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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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