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회장)
지난해, 복원한 지 석달이 채 안 돼 균열이 생긴 광화문 현판이 세간의 화제였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각각의 의견을 냈고, 급기야는 서체까지 점검해야 한다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문화재 복원에 홀대받아 제대로 참여기회조차 없었던 서예계에는 무척 고무적인 일대 사건이다. 그래서 서예계에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고 있다.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상징성이 비할 바 없이 크다. 현판의 글씨는 1865년 고종 때 중건책임자 임태영이 썼다고 '경복궁영건도감의궤'에 전한다. 현판은 해당 건물의 이름표이기 때문에 멀리서 누구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楷書體로 거의 정형화 되었다. 특히 궁궐과 사찰의 현판글씨는 전각 주인의 품격과 위엄, 덕성, 기상 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압축 표현한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유물이다.
광화문 현판의 글씨를 논하려면, 먼저 1968년 건립된 광화문의 잘못된 위치와 각도까지도 바로 잡아 목조 건물로 제대로 짓는 일이 복원이냐, 아니면 중건이냐 하는 문제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에 합당한 글씨의 선택이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지난 10년 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광화문 복원이라는 점이다. 복원이라면 임태영의 글씨를 다시금 원본에 최대한 가깝게 글씨의 점획과 결구를 살려 거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복원되는 경복궁의 다른 전각과 일관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타당하다. 그리고 중건이라면 한문글씨, 혹은 한글글씨의 선택으로부터 세부적으로 옛 글씨, 혹은 명필 글씨의 집자, 혹은 현대서예가의 서사가 가능하다.
일의 순서가 이러함에도 광화문 현판 글씨가 화제가 되자 여러 단체의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한글 관련 단체들의 무모한 견강부회(牽强附會)식 논리와 집요한 압력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신들의 주장에 한 점 사견은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볼 일이다.
한 예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현판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혹자는 박 전 대통령이 광화문을 복원하였고, 그동안 걸려 있었으며, 경제부흥의 기초를 닦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한글글씨이기 때문에, 힘찬 필획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들어 역사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박 전대통령이 첫 단추를 잘못 꿴 결과 오늘날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된 것이다. 무인(武人)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이 비록 서예를 연마했다고 하지만 명필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서예 스승을 비롯한 덕망 있는 서예가에게 양보했어야 마땅하다.
글씨의 상징성에서도 문제점이 많다. 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으로 광화문이 내포한 의미와 거리가 멀다. 광화문이라는 명칭의 상징성을 글씨로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제왕의 백성에 대한 자애와 덕성이 담겨야 한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글씨에서는 그런 요소들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또한 장기 집권을 하다가 심복에게 저격당한 불행한 말로를 맞은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서체 자체도 문제점이 많다. 예컨대 '광'자의 결구를 보면 종성이 제 위치를 벗어나 삐딱하고 '화'자와 '문'자도 한글서예사에 족보가 없는 결구법이다.
이렇게 선입견을 배제하고 하나하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면밀히 살핀다면 최상의 서체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 전 최광식 문화재청장은 취임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공청회로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회의를 걸쳐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중한 검토로 최선의 결론을 얻어 차후에 이루어지는 서예 관련 문화재 복원의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
/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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