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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窓] 농민은 '꾼' 이 아니다

엄철호 (익산본부장)

배추는 다섯번 죽는다고 한다. 먼저 밭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그 다음에 칼로 배를 가를 때 또 죽음을 맛본다. 할복한 배추가 소금을 뒤집어쓰고 절여지는 것이 세번째 사망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절여진 다음에도 온 몸에 양념을 바른채 따가운 고통을 겪어야 하니 네번째 죽음이요, 독에 담겨져 땅에 묻히니 다섯 번째 죽음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다섯번이나 죽음을 당한 뒤에야 비로서 김치로 부활하는 이른바 '배추 오사론(五死論)'이다.

 

그런 배추 가격이 지금 대폭락해 농민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우리들 밥상의 한숨 소리를 키우며 한때 금치로까지 불리워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지난 6일 생면부지의 한 농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 현천마을에서 봄배추 농사를 짓는 농민 이칠우(68)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그는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배추 1만8천포기를 모두 갈아 엎으려고 하니 취재에 나서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배춧값이 너무 떨어져 출하를 포기하고 그냥 갈아 엎기로 했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농민의 절규를 담아 꼭 보도해달라고 간곡하게 재차 당부했다. 절절함과 비통함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다음날 배추밭으로 달려갔다.

 

로터리를 매단 트랙터에 올라 탄 그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한 듯 아무런 표정없이 비닐하우스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배추를 갈아 엎었다. 로터리 쇳날에 산산조각 난 배추들이 떨어진 목련꽃처럼 처참하게 짓밟히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도무지 농사로는 먹고 살기 힘든 우리의 농촌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되짚어보게 했다.

 

날씨가 추우면 덮어주고, 더우면 벗겨주는 등 밤낮없이 거의 80여일을 밭에서 살다시피 하며 키운 배추를 그는 지금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갈아엎고 있다. 그는 정부를 믿었다가 졸지에 폭탄 쓰나미를 맞았다고 말한다. 지난해 겨울 김장배추 3통들이 한 망 가격이 2만원까지 크게 오르자 정부에서는 봄배추 특수 예측을 내놓았고, 이에 3천만원이란 거액의 대출까지 받아 봄배추 재배에 나섰다가 그만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평생을 흙과 함께 살아 한 농부의 작목 선택 잘못으로 여기기엔 그의 상처가 너무 컸다.

 

봄배추 재배로 쪽박차게 생긴 농민들이 그 만은 아니다. 정부의 예측을 너무 믿고 순진하게 도박판(?)에 뛰어든 농사꾼들의 절규가 지금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농민은 '꾼'이 아니다. '꾼'이라 함은 자고로 사기꾼, 노름꾼처럼 큰 노력을 하지 않고 한번의 차익을 노리고 덤비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 꾼들은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대박을 노리지만, 우리의 농사꾼은 1년이란 세월을 새벽에 일어나 눈곱도 떼지 못하고 논과 밭으로 나가 뼈빠지게 일만 한다. 오밤중이 다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면 송장처럼 지친 몸을 방바닥에 눕히고, 자신의 일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고 있는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아 온 농사꾼들이다.

 

배추·무·쌀·고추·마늘…. 그들은 어느 농산물 가격 하나도 정착시키지 못하는 정부를 비판할 줄도 모르고, 진정으로 농민을 위한 정책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정치에 대해서도 따가운 비판조차 할 줄도 모른다.

 

이런 농사꾼들이 지금 봄배추 파동으로 깊은 시름에 빠져있다. 아무쪼록 정부와 정치인들은 제발 이런 농민들을 도박판에 뛰어든 단순한 꾼으로 보지 말고 이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도록 조속한 대책 마련에 나서주길 간절히 촉구한다.

 

/ 엄철호 (익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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