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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체육 비사] (28)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인탁

1984년 LA올림픽때 한국에 마지막 금메달 선사…당시 전두환 대통령 금일봉 선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1984년 LA올림픽때 한국에 마지막 금메달을 선사했던 레슬링 선수 유인탁(54)을 기억한다.

 

단순히 금메달을 따내서가 아니고 경기를 포기해야만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가 투혼을 발휘해 자신을 이기고, 상대를 이기고, 마침내 시상대에 우뚝 선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때문이다.

 

특히 지금도 전주대에 있는 '유인탁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세계제패를 꿈꾸는 젊은 후배들은 그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나 우연한 기회에 레슬링 선수가 돼 세계를 제패했던 이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제시 공덕면 황산리에서 태어난 유인탁은 어린 시절 방앗간집 아들이었기에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황강초, 이리중을 졸업한 그는 이리농고, 전주대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리농고 2학년때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체육대회때 팔씨름에서 1위를 했고, 운동한번 해보지 않은 그가 씨름으로 전교를 제패하면서 당시 체육교사의 눈에 확 띈것이다.

 

당시 이리농고는 레슬링으로 꽤 유명했는데, 같은 학교 친구가 한·일 교환경기차 일본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전교생 앞에서 교장 선생님이 그 친구를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레슬링을 하면 외국에 갈 수 있구나"란 순진한 생각에 레슬링부에 가입했다.

 

입문하고 가진 첫 경기에서 그는 단 13초만에 폴패를 당한다.

 

"서울 한성여고 체육관에서 한명우(훗날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맞붙었는데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유인탁은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전하면서 "힘과 기량에서 밀린게 아니라, 마치 초보 운전자가 옆이나 뒤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경험 부족으로 시야가 좁았기 때문에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고 회고했다.

 

쓰라린 첫 패배에도 불구하고 레슬러 유인탁의 천재성은 그때부터 나타났다.

 

입문한지 6개월도 안돼 전국대회에서 우승했고, 3학년이 돼서는 전국단위 모든 대회를 석권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유인탁의 학창 시절 친구이자 평생의 벗인 박진규 전주대 레슬링 감독은 "워낙 힘이 좋아 그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면 상급자들조차 마치 빈 가마니처럼 휙휙 던져지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유인탁은 1976년부터 1998년까지 주택공사에 몸담으면서 선수와 코치,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며 혁혁한 성과를 일궈냈다.

 

선수 시절 그의 주종목은 -60kg급(페더급) 자유형이었다.

 

하지만 그 종목엔 거목이 버티고 있었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였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유인탁은 종종 양정모의 스파링 파트너였다.

 

"자유형은 양정모 선배때문에 안되니 그레코로만형으로라도 해볼까"하는 마음에 그는 종목을 바꿔 대표 선발전에 나갔으나 보기좋게 패했다.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그 경기는 유인탁에겐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레코로만형 최종전에서 최경수에게 22대 2로 참패한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패배한게 아니었다.

 

아들이 레슬링을 엄청 잘하는 줄 알고 시골에서 아버님이 친구분들과 함께 응원까지 왔으나, 그 앞에서 망신을 떨었다.

 

"제 아버님이 경기장에 오신 건 평생 딱 한번이셨는데, 그 경기에서 제가 패했단 말이죠"

 

고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집에 가자 "이게 뭐냐"며 공부를 포기한채 운동하는 자식을 걱정했던 아버지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순간 유인탁은 메트에서 "아버지, 제가 하는 것 잘 봤죠"하며 울먹였다.

 

그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됐기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고 한다.

 

와신상담끝에 유인탁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다.

 

하지만 대회를 보름 가량 앞두고 목욕탕에서 한 동료가 "올림픽 출전 안한대"하고 전하더란다.

 

서구 진영이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올림픽 보이콧을 한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1984년 LA올림픽, 그는 -68kg급 자유형에서 꿈에도 그리던 금메달을 따낸다.

 

총 7게임을 했는데 일본선수와 맞붙은 5번째 게임에서 심한 허리부상을 입고 부상투혼을 벌인 일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결승전을 앞두고 팀 닥터가 무려 4시간동안 그를 치료해 일궈낸 성과였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음을 곳곳에서 깨달았다.

 

집에 있는 어린 딸을 위해 통닭집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더란다.

 

이에앞서 청와대에 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집 한채값보다 더 많은 금일봉을 받았다고 한다.

 

주택공사에서는 직원인 그에게 선물로 집 한채를 주기도 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끝으로 그는 지도자의 길을 모색했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1999년 레슬링 지도자의 자리를 떠난 그는 통닭집을 경영해 제법 성공했고, 현재는 경기도 부천에서 '장어촌'이란 민물장어집을 운영하고 있다.

 

틈나는대로 각 기업체나 기관단체에서 강연하고 있는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체육계에 몸담으면서 전북은 물론, 대한민국 체육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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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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