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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체육 비사] (30)무명에서 '세계 여제' 자리에 오른 박성현

평범한 실력 가족들 알까봐 안절부절

세계 양궁 역사에서 전북 출신 박성현(30)이 남긴 족적은 너무나 뚜렷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인전과 단체전 등 2관왕에 오르며 양궁 여제(女帝)의 자리에 올랐고, 그해 충북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는 대회 MVP에 올랐다.

 

 

충북 체전때 그가 리커브 활로 기록한 1405점은 국내 남녀 선수를 통틀어 어느 누구도 오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는 개인전 은메달과 단체전 금메달을 따내며 그 진가를 과시하기도 했다.

 

올 3월 '전국 최연소 실업팀 감독'이란 화려한 명성을 얻으며 전북도청 양궁팀 감독에 오른 박성현은 전북 체육사에 뚜렷한 인물이다.

 

하지만 화려하게만 보이는 그도 오랜 기간 무명 선수의 아픔속에 눈물지어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눈물나는 훈련을 쉼없이 해야만 했다.

 

9일 낮 도 체육회관에서 만난 박성현 감독은 만삭의 몸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 1개, 은 1개를 따낸 직후 결혼한 그는 오는 8월 첫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다.

 

곧 2세 탄생을 앞둔 박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대화를 풀어갔다.

 

군산시 소룡동에서 태어난 박성현은 딸만 넷 있는 집의 막내였고 아버님이 건축업을 하셔서 생활은 중산층이었다고 한다.

 

소룡초 4학년때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양궁을 접한다.

 

치마를 입고 싶어서 걸스카우트를 신청했는데 늦어서 두리번거리던중 "맛있는 간식을 많이 준다"는 말에 양궁부를 택했다.

 

월명여중을 거쳐 군산여고에 진학했는데 때마침 양궁부가 해체되면서 고교 1학년을 마치고 전북체고로 전학했다.

 

국가대표급 선수가 되려면 초등학교때, 아니면 중고등학교때 전국 무대에 우뚝 서는게 보통이나 박성현은 고교 졸업때까지 양궁인들조차 모르는 평범한 선수였다.

 

"고3때 전국체육대회에서 70m 경기에서 3위에 올라 동메달 하나를 딴 것 말고는 중고교때 아무것도 없었죠"

 

고교 졸업때까지 전국대회에서 동메달 하나 딴 것으로는 이름있는 대학에 원서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 우연하게도 신데렐라처럼 묘한 행운이 찾아온다.

 

때마침 전북도청 양궁팀이 태동했는데 명조련사인 서오석 감독의 눈에 든 것이다.

 

양궁 선수들은 66인치, 68인치, 70인치 등 3가지 종류의 활을 쓰는데, 박성현은 여자 선수중 유일하게 길이가 긴 70인치를 가지고 훈련하는 것을 감독이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말만 전북도청 양궁팀이지 감독은 물론, 선수들이 모두 다른 시도 사람들이어서 그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있던 상황도 박성현의 입단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도체육회 김대열 부회장, 박노훈 이사 등이 "애향 차원에서 전북 선수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력은 부족했지만, 순수 토박이 박성현 선수가 입단의 행운을 잡게 된다.

 

박성현은 처음엔 "어찌됐든 취직이 됐다"며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순천여고 출신 박미경 선수의 경우 전국대회를 휩쓸며 경기실적 증명서가 여러장이었는데 자신의 실력증명서는 단 한줄(전국체전 3위)이어서 처음부터 기가 죽어 지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북도청에 입단하자마자 기술 훈련에 돌입했는데 감독은 그에게 기초부터 시켰다.

 

처음 한달간은 활 당기기, 두달째는 활을 쏘는 시늉만 하기, 세달째는 단거리 달리기 하는 식이었다.

 

동료들에 비해 초라한 자신이 부끄럽고 때론 자존심도 상해서 "일년만 어떻게 해보고 안되면 양궁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묘한 일 하나가 생기면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딸이 양궁을 무척 잘 하는 줄 알고 어머니가 생각지도 않은 일을 벌인 것이다.

 

"아 글쎄, 제가 실업팀에 입단했다며 엄마가 덜컥 5년짜리 적금에 가입한 거예요"

 

집에서는 자신이 잘하는 선수로 알고 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기에 말도 못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성현에게는 대기만성의 자질이 숨겨져 있었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업무대에 오면서 그 저력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터운 배짱, 평상심 유지 능력, 강한 체력, 지도자를 잘 따르는 능력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입단 이듬해인 2001년 치러진 전국남여종별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는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다.

 

"양궁인들이 제 바로 옆에서 박성현이 누구냐며 묻는 것예요."

 

많은 양궁인들이 그때만해도 무명인 박성현의 우승은 우연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번 정상에 오른 사람은 평소 생활방식, 훈련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자 양궁 선수들은 그 이후 대회때마다 박성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이미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박성현 감독은 "사람들은 시상대에 선 늠름한 모습만 보지만, 그 자리에 서기위해 어떻게 하는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1년 국가대표가 처음 된 이후 박성현은 연습때마다 맨 먼저 번지점프를 했고, 남자들도 포기하는 지옥훈련을 감내해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치러진 훈련때 85m 높이에서 번지점프를 했는데 박성현이 맨 먼저, 이성진이 그다음, 윤미진이 세번째로 뒤어내렸는데 공교롭게도 올림픽 성적도 번지점프 순서대로 나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박성현은 박경모(37) 현 공주시청 양궁감독과 결혼한다.

 

국가대표 시절 남녀 양궁팀 주장으로 많은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한다.

 

앞으로의 꿈을 묻자 "선수의 자질을 잘 발견해서 큰 선수로 키워내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며 "지금까지 받은 도민의 커다란 은혜를 차근 차근 후배들에게 갚아나가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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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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