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2세 경영체제 돌입…탄탄한 입지…최신 초지기 도입, 생산능력 업계 1위 고수
세대제지는 1981년 4월 창업주인 고판남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사장인 고병옥씨를 사장으로 취임시키면서 경영체제를 바꿨다.
고 신임 사장은 창업주 고판남 회장의 외아들로 이때부터 세대제지는 2세 경영체제로 돌입했다.
고 회장이 주력업종의 하나인 세대제지의 경영을 아들에게 맡긴 것은 고령에 의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모기업입 한국합판이 여러 업종의 사업체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룹 총수로서의 역할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경영수업을 통해 아들인 고 사장이 경영인으로서 자질을 갖췄다고 인정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고 회장이 제11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려던 것도 한 아들에게 세대제지를 맡긴 또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 사장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 출신으로 1961년 12월 그의 부친인 고 회장이 경영하던 배달산업주식회사에 취체역(감독관 역할)으로 취임해 이때부터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배달산업은 1953년 고 회장이 군산에 설립한 성냥제조회사로 이후 1962년 상호를 한국합판으로 변경했ㄷㅏ.
고 사장은 한국합판에서 감사와 상무이사를 거쳐 1968년 1월 전무이사로 승진했다.
그 는 여기에서 탁월한 경영수완을 인정받아 1973년 새로 출범한 세대제지의 부사장으로 취임해 최고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 경영 일선에 나섰다.
이후 그는 한국합판 부사장을 거쳐 1978년 2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한국합판의 경영대권을 물려 받았다.
그는 한국합판을 직접 운영하면서 기술개발과 경영합리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이 회사의 합판은 동종 기업체 제품보다 질적인 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당시(1980년) 원가 상승 및 불경기 속에서도 계속 제값을 지킬 수 있었다.
고 사장의 진가는 세대제지 부사장 시절에 더욱 빛났다.
새로 창업된 세대제지의 부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기업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옛 고려제지 종업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줘 새 출발을 도왔고 기술진을 독려해 제3호 초지기가 단시일 안에 조립 완공시킨데 이어 N-1호 초지기를 도입 증설해 생산능력면에서 동종업계를 제치고 계속 1위를 지키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이때문에 그는 세대제지 부사장 시절에 이미 제지업계 2세 경영자 중 가장 먼저 입지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생산능력 증대에 결정적 역할을 한 N-1호 초지기 도입과 관련 일각에서 제기한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 나서며 신문용지업체 1위의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는 세대제지가 최신예기라고 자랑한 N-1호 초지기는 이미 컴퓨터 제어방식을 채택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그리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고 연간생산능력을 9만톤이라도 내세운 것 역시 지나친 과장이라는 동종업계의 시각에 대해 "N-1호 초지기는 분당 900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계이기 때문에 지류수요가 늘어날 경우 하루 300톤 이상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반박한 것.
하루 250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 N-1호 초지기가 지류 수요가 증가할 경우 300톤까지 증대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당시 주간 매경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해 1980년 4월 11일 기사를 통해'이번에 증설을 마친 세대제지 군산공장의 초지기는 분당 900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신형 기계로 앞으로 국내 용지 수요 증대를 예상해 스피드업이 가능한 최신예 초지기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처럼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인 고병옥씨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제2차 유가 파동과 재정 긴축정책 실시, 10.26사건과 정국의 혼미, 사회 불안 등으로 내수경기가 극도록 위축되면서 참신한 경영인의 등장이 요구되었던 시절,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 없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