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메기·숭어·주꾸미·죽합…삭풍 맞으며 먹는 '감칠맛'
'동해가 보는 바다라면, 서해는 삶의 바다'라고 말한다. 쪽빛의 동해는 보는 이의 눈을 질끈 감기게하는 장관을 건네준다. 이에 반해 서해에는 세상의 질척한 애환을 담은 잿빛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 잿빛의 서해에는 역설적으로 맛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먹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삶의 현장에서 건져올린, 빛깔 좋은 생선이 부지기수다. 시나브로 겨울이 가고 있다. 매서운 삭풍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지만, 저만치에서는 이른 봄기운이 기지개를 켤 태세다. 겨울철 진미와 봄철 별미가 공존하는 이 맘때, 서해안은 보물창고나 다름 없다. 추운 겨울에 유독 맛이 좋은 물메기와 숭어 등이 식탁의 한가운데에 놓이고, 변방에 있던 주꾸미가 서서히 자리이동을 시도하는 시기다. 2월의 서해안 별미 기행을 떠나본다.
해안가 사람들은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선입맛'이 까다롭다. 자연산 생선을 내륙에서도 맛볼 수 있는 물류체계이 발달됐다고는 하지만,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손에 의해 키워진 생선이 식탁을 점령하게 마련이다. 여전히 '내륙에서는 양식, 해안가에서는 자연산'이라는 공식은 유효한 셈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바다에 인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자연산 생선에 대한 자부심이나 선호도가 각별해진다.
전북의 경우 바다생선에 관한한 부안·고창·군산지역민들의 입맛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내륙에서 생선회를 접할 기회가 있어도 굳이 젓가락을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리적 잇점으로 인해 물좋은 생선맛에 길들여진 탓에 자연산과 양식산의 미묘한 차이를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물메기, 최고의 해장국재료
전북에서도 서해안에서, 이맘때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생선은 물메기다. 표준어는 꼼치로,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주로 물메기로 불린다. 강원도에서 곰치 또는 물곰, 충남에서는 바다미꾸리 또는 물잠뱅이, 경남에서는 미거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북서태평양의 온대해역에 서식하는 물메기는 해마다 11월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우리나라 해안 전역에서 고루 잡힌다. 하지만 손맛 좋은 전북지역 음식점들이 얼큰하고 시원한 물메기탕을 내놓으면서 서해안 별미로 자리잡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고기 살이 매우 연하고 뼈가 무르며,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기록돼 있을 만큼 최고의 해장국 재료라는 이름값을 높이고 있다.
물메기가 본격적으로 식탁에 오른 때는 불과 몇년전이다. '못생겨서 미안합니다'는 유행어처럼 생김새가 곱지않기 때문이다. 몸체가 물렁물렁한 데다 머리의 폭이 넓고 납작하다. 얼핏 민물고기인 메기와 흡사하다. 반투명하고 연한 청갈색 바탕에 그물 모양의 갈색 무늬를 띄고, 살점은 흐물흐물하다.
못생긴 죄로 인해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물메기는 생선 취급을 받지 못했고 어부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쩌다 그물에 걸리면 재수 없다고 도로 바다에 버리거나 기껏해야 사료로 쓰이던 신세였다. 대구가 귀하던 시절에는 해안가 선창에서 대구 대용으로 쓰이곤 했다. 자산어보가 물메기의 숙취해소효과를 인정하면서도 '해점어(海鮎魚·물메기)의 속명은 미역어(迷役魚·무엇에 쓰는 물고기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물메기는 1990년대들어 신분상승을 꾀한다. '물메기탕이 숙취 해소에 탁월하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수요가 급증했고, 이제는 겨울철 고급 어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외모는 흉하지만 물메기탕은 복국과 쌍벽을 이루는 겨울철 별미로 탈바꿈했다.
△제철 숭어는 육질 쫄깃
추운 겨울에 유독 맛이 좋은 숭어도 이맘 때의 별미로 빠지지 않는다. 힘이 좋고 민첩한 숭어는 웬만한 남성의 손을 거부하기 일쑤다. 그만큼 육질도 쫄깃하다. '첫 눈이 내린 뒤 잡은 숭어'라는 의미의 설숭어는 쫄깃하고 찰지다. 흔히 '숭어는 흙냄새로 지저분한 생선'이라는 인식은 설숭어와는 무관하다.
여름철에 잡히는 개숭어와 구별되는 참숭어는 해마다 12월부터 봄철 산란기 전까지 제 맛을 낸다. 개흙(뻘)속의 미네랄을 먹는 숭어는 산란기를 앞두고 먹이활동을 중단한다. 당연히 겨울철의 참숭어는 특유의 냄새와 쓴맛이 사라지고 겨울철 횟감으로 제격이 된다. 특히 이맘 때의 숭어는 기름기가 많이 올라 시력까지 떨어뜨린다고 한다.
숭어의 눈에도 기름기가 끼면서 앞을 잘 못보기 때문이다. 산란기가 지나면 숭어살이 흐물흐물해지고 맛도 뚝 떨어진다. '여름 숭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향약집성방에 "수어(水魚·숭어)를 먹으면 위를 편하게 하고 오장을 다스리며 오래 먹으면 몸에 살이 붙고 튼튼해진다, 진흙을 먹으므로 백약(百藥)에 어울린다"고 적을 만큼 예로부터 최고의 별미와 보신어종으로 분류된다.
△이맘 때의 주꾸미는 보약
물메기와 숭어가 '지는 해'라는 주꾸미는 '뜨는 별'이다. 이 맘때부터 주꾸미는 봄의 전령사역할을 맡는다. '봄주꾸미, 가을낙지'라는 말처럼, 이른 봄의 주꾸미는 씹을 때마다 싱그러운 갯내음이 퍼진다.
흔히 주꾸미는 산란기인 2월초부터 4월말까지 가장 맛있다고 알려져 있다. 밥풀처럼 터져 나오는 고소한 알이 입안에서 탱글탱글 씹히는 희열감을 최고로 친다.
하지만 상당수 식도락가들은 산란기를 앞둔 주꾸미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주꾸미가 알을 채우기 위해서는 심한 몸살을 앓아야 하고, 이로 인해 육질이 떨어진다는 논리를 앞세운다.
주꾸미는 그물은 물론 소라·고둥의 빈껍데기를 이용해 잡는다. 소라의 빈껍데기 등을 매달아 바다밑에 가라앉혀놓으면 주꾸미가 속으로 들어온다. 어부는 소라 껍데기가 달린 줄만 끌어올리면 된다. 소라껍질에 들어가는 주꾸미는 십중팔구는 암놈이다.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한 주꾸미는 웰빙해산물로 손꼽힌다. DHA가 많고 타우린성분이 풍부해 간장의 해독기능을 강화해준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여주며 근육의 피로회복 등에 효과적이다. 봄을 맞기 앞서 주꾸미를 반드시 시식할 이유가 수두룩하다.
이밖에 고창 심원에서 나는 죽합도 빼놓을 수 없다. 죽합에 김치를 넣어 끓인 죽합탕은 아는 사람만 맛볼 수 있는 별미중의 별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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