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남학생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완장이다.
완장을 차게 되면 힘을 갖을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선도부 완장은 교칙과 규율을 위반한 학생들의 이름까지 적어 낼수 있어 그야말로 모든 남학생들의 선망이자 부러움 대상 이었다.
완장의 위력은 80년대 초에 발표된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 잘 묘사돼 있다. 소설 완장은 서푼짜리도 안 되는 완장의 힘을 등에 업고 기세를 부리는 주인공을 통해 잘못된 권력이 낳는 부작용과 병폐를 지적한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마을 건달 임종술은 어느날 땅투기로 졸부가 된 최사장으로부터 저수지 관리인 제안을 받는다. 적은 급료였지만 완장을 채워준다는 말에 그는 즉시 제안을 수락하고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가 새겨진 감시원 완장을 팔에 두른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밑바닥 생활을 했던 그에게 완장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권력의 상징물 이었다.
도시에서 온 낚시꾼 기합 주기, 저수지에서 몰래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생 부자 폭행 등 그의 행패는 날로 극에 달했다. 읍내에 나갈 때도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완장의 힘을 맹신하던 종술은 저수지에 낚시 온 최사장 일행의 낚시까지 금지하다 결국 관리인 자리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해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저수지 관리인 일을 계속하던 그는 가뭄 해소책으로 저수지의 물을 빼야한다는 수리조합 직원과 경찰을 폭행하고 결국 술집 작부 부월과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종술이 마을을 떠난 다음날, 종술의 어머니가 물이 빠지는 저수지 수면 위를 쓸쓸히 떠다니는 아들의 완장을 망연히 지켜보는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나타내기 위해 잠시 팔에 두른 완장은 책임과 의무만 있을뿐 권력의 상징이 결코 될수 없음을 소설은 시사해 줬다.
그런데 요즘 익산사회에서 완장이란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익산에 권위의식이나 특권의식이 만연된 사회를 빗 댄 완장문화가 언제부터인지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다.
완장의 단 맛에 푹 빠진 냥 일부 인사들(?)의 안하무인 행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치 소설속 주인공이 환생한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더우기 큰 문제는 그들의 오만함과 거들먹거림이 좀처럼 멈춰 설 기미 조차 없이 갈수록 도가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완장이란 권력은 사람을 덧없게 만드는 진짜 보잘 것 없는 실체임에도 말이다.
많은 선량 시민들은 익산의 완장으로 졸부, 정치브로커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이뤄진 몇몇의 유명인(?)을 지목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난을 토해낸다. 물론 이들 직업군에 속해 있는 모든 이가 서푼짜리 완장을 찬 임종술 기세 흉내내기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부에 의해 자행되는 완장 근성 행태 때문에 모두가 도매급으로 넘겨져 손가락질을 당하는 퇴출 원흉(?)이 되고 있다는게 익산의 현주소다.
같은 직업군에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누구를 원망하고 한탄할수 있겠는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 대목에서 과연 그 누가 '완장찬 그들에게 비난의 돌을 던질수 있을까'라고 한번 스스로 자문해 본다.
완장의 힘만을 맹신해 안하무인격 행동을 일삼도록 그동안 방조했거나 방관한 지역풍토와 시민의식 탓이 아닐까.
이젠 변해야 한다. 구시대적 완장을 차고 선량 시민과 공무원 위에 군림하려는 익산의 완장들이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이제라도 시민 모두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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