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유적 출토… 시대별 제사양상 조명
변산반도의 끝자락, 그러니까 변산반도에서도 바다로 더 돌출된 지역이 격포 죽막동이고, 여기에 수성당(水聖堂)이라는 당집이 있다. 민속학자 주강현은 '우리 해신의 위엄과 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신성의 성소(聖所)'라고 말한다.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던 위도가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관망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임진전쟁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이곳을 지키는 여신, 즉 개양할미가 무찔렀다는 전설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이곳엔 '개양 할미', 혹은 '수성당 할미'라고 불리는 여신의 거처가 있다. 개양할미는 당굴에서 태어났다. 딸을 여덟 명 낳아서 팔도에 시집보냈다고도 하고 혹은 딸 일곱을 칠산바다에 보내 일곱 섬을 관리하게 하고 본인은 막내딸과 살았다고도 한다. 실제 격포를 마주보고 있는 섬 비안도에서는 당제지낼 때 남풍이 불어야 좋다고 한다. 그래야 수성당 개양할미가 딸네 집에 순조롭게 온다는 것이다.
개양할미는 거인여신이자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다. 일테면 굽나막신을 신고 칠산바다를 저벅저벅 걸어 다녀도 버선이 젖지 않을 정도다. 서해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도 때론 일으키기도 한다. 또 뱃길이 위험한 곳에는 깃발 표시를 남겨 어부들이 해를 입지 않게 돌보았으며, 심지어 수심까지 재어 어부들이 알도록 했다. 한마디로 괴력난신의 힘을 보여주는 거인여성, 마고신이 아닐 수 없다.
칠산바다를 걸어 다니거나 전지전능한 괴력은 제주도 창세신화 주인공 '설문대할망'과 많이 닮아 있다. 설문대할망은 앞치마에 흙을 퍼담아 나르다가 구멍이 뚫어진 곳으로 흘러내린 흙이 360개의 오름이 되었고, 마지막 흙을 날라다 부은 곳이 한라산이 되었다고 한다.
수수범벅을 먹고 대변을 보니 성산 근처의 국망상오름이 되고, 심지어 오줌발로 성산과 우도를 갈라놓았으며,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발이 제주 북쪽 해안에서 있는 관탈섬에 가 닿을 정도의 거인이다. 해안에서 관탈섬까지는 21㎞라고 한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오금이 저리도록 가파른 벼랑 아래로 조수가 드나들며 여근처럼 갈라놓은 해식동굴이 있는데 일명 용굴, 혹은 당굴로 개양할미의 거처다. 바닷물이 들이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현기증이 난다.
개양할미 신화는 본격적인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그 대신 신으로서의 괴력과 어민들을 위한 역할, 고군산군도와 위도 등 다른 섬과의 설화적 위상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개양할미 설화는 전형적인 마고신화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고여신은 본래 천지를 창조한 창조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해 창건주' 신화인 수성당 개양할미가 존재하는 죽막동을 제주도 한라산 설문대할망이나 지리산 마고할매와 함께 해양문화의 원초적 신앙성을 지닌 '성소'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곳은 국립전주박물관이 서해안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도중에 수성당 바로 뒤편의 평탄면에서 우연히 파편들을 발견하였고, 1992년에 정식 발굴되어 다양한 제사유적이 출토된 곳이어서 장소적 의미가 더더욱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시간에 걸쳐 누적적으로 의례가 행해진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제사유적으로 각 시기별 제사양상을 단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변산반도 죽막동에 제사유적이 자리한 배경은 포구의 적격성, 자연여건의 조화, 배후지역이 농업생산의 전략지라는 점에서 이곳이 수로 및 해상교통, 교역의 요충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삼국시대의 유물인데,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각종 호, 기대, 옹, 잔 등의 토기류와 철촉, 철부 등 금속유물, 거울, 판갑, 도끼, 말 등과 같은 실물을 모조한 석제, 토제모조품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토제류, 중국도기, 소옥(小玉), 곡옥(曲玉) 등이 정형성 없이 흩어진 채 발굴되었다. 중요한 것은 유물이 백제뿐 아니라 가야계, 중국계, 일본계 유물이 함께 출토됨으로써 원삼국시대부터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의 행적을 추정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윤선 목포대 교수는 동아시아 담론의 확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라면서 '부안 변산의 한 작은 공간을 동아시아라는 국제공간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글로컬(Glo-cal)한 문화유적의 표본'이라고 말한다.
또 죽막동에서 백제 이후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변산 지역이 마한을 거쳐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죽막동 제사의 제의 담당자이자 일정한 해양교섭력을 보유했던 토호세력이 존속했을 가능성과 백제세력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해양세력이 상당기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제기한 바 있다.
죽막동 수성당은 해발 22미터의 해식단애 위로 바다와 바로 접해 있으며, 주변보다 높은 지점이기 때문에 20Km 이내의 서해상의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 상왕등도, 위도, 식도, 비안도 등의 섬들과 서해 먼 바다까지도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지점이다. 유적 바로 북쪽에는 육지로 10미터 정도 만입해 들어온 용굴을 비롯해 주변으로도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발달하여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렇듯 죽막동 수성당은 수많은 제사유적과 개양할미 설화, 거기에 개양할미의 거처라고 하는 해식동굴까지 있는 성소이다. 이곳을 지키는 수성당은 근래에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물론 내부에 걸린 화본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있던 그림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지금 죽막동 수성당은 수시로 각처에서 온 무속인과 신도들이 기도하고 굿하는 굿당으로 쓰이고 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개양할미의 영험함을 믿고 의지하는 그들을 통해 이곳이 특별한 성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시절에는 최소한 부족단위 이상의 거대 집단이 사해용왕과 천지신명께 드리던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수성당은 거녀신에서 한참이나 강등된 채 동네신 내지는 개인적 기복신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위로받아야 하는지. 어질더질이다. /김성식(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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