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도정 공장·백구금융조합 등 근대 문화유산 연계 / 교육·생태 체험의 장·주민 휴식 공간 활용 방안도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김제 용지, 공덕, 백구의 쌀이 다 이곳에 모이던 시절의 분주함은 온데간데없이 부용역사는 굳게 닫혀있다. 세월의 무상함과 쓸쓸함을 위로하듯 텅 빈 벤치를 환하게 핀 보라색 등꽃이 지키고 있다. 부용역 앞 왼쪽으로 거대한 쌀 창고와 도정공장,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백구금융조합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외양이 바뀌었으나 아직 뼈대는 일제강점기 그대로다. 농민들을 착취하던 수탈의 시간과 산업화와 근대화 물결을 온몸으로 버텨온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보인다. 옛 술도가를 지나서 수룡귀지 마을로 가는 길에 자리한 부용제도 그 중 하나다. 벽골제가 말해주듯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수자원 확보는 벼농사 성패의 관건이었다. 농민들은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모여든 물이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갈세라 지대가 낮은 곳에 크고 작은 저수지를 쌓았다. 기록상 부용제는 1945년 1월에 착공되어 그해 말 12월 축조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쌀 공출을 확대하기위해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을 만들겠다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을 것이다. 30ha의 논과 밭에 물을 대는 생명수이자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던 추억의 공간이던 부용제는 1991년 갑작스레 폐 저수지가 되었다. 당시 시에서 쓰레기 매립장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으며 부용제는 자연스런 습지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그런데, 지난 3월 김제시가 대부자를 선정해서 부용제의 약 80%를 매립한 후 옥수수, 조사료 재배지와 콩 시험포를 만들겠다며 설명회를 열었다. 이에 주민들은 마을의 공동자산이자 추억의 공간인 부용제를 개인에게 불하해서는 안 된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부용제의 과거와 현재
"원래는 둑도 없고 수문도 없이 큰 수렁 방죽만 있었당게. 외지 사람들 잘못 빠지면 줄을 묶어서 끌어내야 파듯이 나오고 그렸어." 마을 토박이 최경식(78)씨의 회상이다. 원래 습지였던 이곳에 저수지를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이탄(토탄)에 얽힌 사연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때는 모두 다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인데 뭐 땔 것이 있어야지. 그래서 저그 죽산이고 용지에서 이곳으로 토탄을 캐러들 왔지.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굉장혔어. 모다 들 시커매가지고 눈알만 흐연했지, 허허허" 이탄(토탄)은 습지 바닥의 산소가 없는 층에서 식물체가 부식된 것들이 흙처럼 퇴적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탄은 잘 말려서 풀무로 부쳐서 태우면 아주 잘 탔다고 하고 그래서 토탄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것으로 볼 때 저수지로 축조되기 전의 부용제는 비가 올때 주변의 물이 흘러드는 얕은 습지에 습지식물이 자라고, 그 식물의 사체가 분해되면서 이탄이 생성되는 이탄습지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탄은 습지에 쌓이고 쌓인 시대별 퇴적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사 연구에 중요 자료가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유기질퇴비의 재료나 피트머스라는 조경 자재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개인이 불하받으려는 것도 다 이탄의 가치를 염두에 둔 것 아니겠냐는 것이 대책위원들의 설명이다.
이탄을 캐던 수렁 같은 옛 습지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20여 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용제는 완벽한 습지로 되돌아왔다. 복사꽃과 포도밭에 둘러싸인 부용제는 수문을 열어두고, 준설을 하지 않게 되자 개방수면은 많이 줄어들고, 갈대, 줄, 부들, 개구리자리, 젓가락나물 들의 수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하중도의 육화 정도를 보여주는 버드나무도 보인다. 한때 부용제라는 저수지 이름에 걸맞게 주인 노릇을 하던 연꽃은 수위가 낮아지면서 그 세력이 많이 줄었다. 수초들 사이로 긴 다리 물새인 왜가리, 백로, 해오라기가 성큼성큼 걸으며 정중동(靜中動) 먹이 사냥에 열중이다. 텃새인 흰뺨검둥오리와 아직도 떠나지 못한 쇠오리들도 분주히 수초를 뒤진다. 저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준설을 하는 인근 시산제나 학제와 달리 넓은 수초지대와 하중도가 형성되어 있는 부용제는 겨울철이면 많은 오리들과 기러기들의 서식지가 된다. 천연기념물 고니도 수 십 마리씩 이곳을 찾는다. 또한 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고 작은 숲에 의존해 살아가는 너구리, 삵 등 야생동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태공간이다.
△습지의 자정 작용, 만경강 수질개선 효과
구불구불 물 가장자리는 둑이 없이 포도밭과 배, 매실 밭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비가 내리면 농사에 사용된 거름, 비료, 농약 등 수질오염 물질이 그대로 저수지로 모여드는 구조다. 습지식물은 이 오염물질을 가라앉히고, 걸러주며, 양분으로 삼아 자라면서 습지를 자연정화한다. 부용제를 떠난 물은 용암천에 다다르는데 오염이 심한 용암천의 수질 개선을 위해서도 부용제는 자연정화습지로서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유입수가 적고 물이 정체되는 구간이 많다보니 탁도가 심하고 수질도 좋지 않다. 유입 수로와 농경지 인접부에 저류 습지를 조성하여 1차 정화된 물이 호소로 넘어가는 시스템을 만들면 수질개선 효과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전북생태환경연구소 도내 내륙습지 현황 조사에 의하면 도내 저수지는 총 2,253개소. 이중 80%가 1930년~60년대에 축조되었다. 그만큼 폐지되는 저수지도 많다. 또한 저수지에 안정된 습지 식생이 안착되면서 생태적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정읍시 소성면 한정제, 고창군 상하면 용대저수지, 임실군 오수면 대정저수지 등 가시연꽃 군락지가 대표적이다.
"저수 용도가 폐지된 소류지라 습지로서의 기능과 가치가 더 큰데요. 이미 습지 식생이 많이 복원되었기에 조금만 손을 대도 훌륭한 생태 거점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2004년 전주시 관내 소류지 64개소 현황 조사를 통해 도시화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소류지의 생태공원화 사업을 공론화 해온 김재병(44·전 전주의제21 사무국장)씨의 말이다. 일부를 준설해서 수면을 유지하고 제한된 구간에 산책 데크와 관찰대를 설치하면 부용초등학교의 생태 교육시설과 주민 휴식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탄 습지라는 지질학적 특성과 근대 문화유산이 오래된 기억처럼 남아있는 인문 환경, 고단한 세월을 온 몸으로 이겨온 사람들의 이야기,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백구 포도의 역사가 잘 어우러진다면 부용제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적 가치를 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김제시는 국가로 관리권이 이양되기 전에 활용할 수 있던 방안을 강구하던 중 우량농지 조성권을 부여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함이었다며 주민들의 반대의사를 받아들여 시 계획을 재검토 하겠다고 밝혔다.
이정현 NGO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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