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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품 - 백제의 지방 간접 지배 방법 상징

▲ 금동관모
▲ 금동신발

삼국시대의 익산이라고 하면 서동요의 무왕과 선화공주를 떠올릴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다룬 이 이야기는 백제 무왕 때 제2의 수도로 부상했던 익산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시절 익산이 차지했던 높은 위상은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섰던 5C 무렵의 유물들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다.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에 위치한 사적 347호 입점리 고분군은 5세기 무렵 백제와 익산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입점리 칠목고개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의 중턱에 분포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그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1호분의 출토품들이 이번에 소개할 것들이다. 입점리 고분군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돌로 방을 짠 무덤(橫穴式石室墳)인 1호분에서는 관장식, 중국제 청자사이호, 장신구, 토기, 말갖춤, 철기류 등이 출토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금동신발(金銅飾履)이다. 이러한 유물들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금은 잘 변하지 않는 성질과 특유의 색상을 지니고 있지만 원료를 구하기 힘들다. 또한 고급 금공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훈련과 기술을 갖춘 전문 공인이 있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금공제품은 부의 원천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청자사이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스스로 유약을 바른 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청자가 높은 가치를 가졌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던 만큼, 자기가 출토되는 유적들은 대부분 백제의 옛 땅에 있다.

 

고고학자들은 익산을 비롯하여 금동관모나 금동신발이 출토됐던 유적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백제의 지방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 방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동제품과 청자사이호는 백제와 입점리 집단의 위계질서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입점리 1호분에 묻혔던 사람은 아마도 익산에 근거지를 두었던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독자성이 보장된 관계 속에서 관모의 수여를 통해 위계질서를 재확인했던 것이다. 백제가 익산을 직접적으로 지배했던 때는 무왕이 활약했던 시기인 6~7세기 때의 일이었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백제지역에서는 금동관모가 사용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금동관모나 금동신발 등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을까. 아니면 고이 모셔두었던 것들일까. 아마도 금동관모는 모자처럼 정수리에 올리고 끈을 둘러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동신발은 평소에 신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장송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까.

 

/최경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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