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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진안 얼음골마을 - 장수굴·풍혈냉천·…자연의 신비·전설을 품다

치마산은 바위굴 위의 산… 과학적 규명 필요 / 대두산 냉천, 허준 약 달이던 물로 소문 유명세

▲ 치마산 냉골에서 피서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바위 절벽에 가까스로 붙어 가지를 내뻗은 소나무는 신선이 앉아 있던 자취가 선명하다.

 

▲ 진안 양화마을 풍혈냉천에서 관광객들이 더위를 쫓고 있다.

지금은 잊힌 '전설의 고향', 완주 구이면 치마산.

 

전주에서 27번 옛길을 따라가다 구이 저수지 끝머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망산마을 뒤로 우뚝 솟구친 산이 있다. 치마산(馳馬山)이다. 마치 장군이 말을 타고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를 향해 질주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하지만 매스컴을 타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아는' 은근하고 조용한 산이다. 이 산에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고 일상의 짜증을 가셔줄 '비밀병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갔다.

 

마산(607m)은 아이를 등에 업은 어미 모습의 모악산(793m)을 건너다보고 있다. 산의 무릎께는 용광사라는 작은 절집이 있는데, 이 절집의 이영재씨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알려왔던 것. 그는 이 자리에 절집을 처음 앉힌 도일 스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첫눈에 용광사는 허름한 대웅전과 요사채, 종탑과 약사여래상 등으로 겨우 절집 모양을 갖춘, 퇴락한 암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집에 들어서면 낯설면서도 낯익은 광경을 목격하고 놀란다. 진안 마이산 탑사를 빼닮은 우람한 돌탑들이 대웅전을 호위하고 있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도일 스님은 마이산 탑사를 세운 이갑룡 선생의 큰 손자다.

 

절집 마당에는 음양수라 일컫는 약수가 커다란 돌확 가득 찰랑거린다. 한때 500여 명의 신도와 인근 사하촌인 두암과 망산, 항가리 마을 사람들에게 피부병과 당뇨병 같은 질병을 예방하거나 낫게 해준, 말 그대로 '약수'(藥水)다. 차고 단 물은 산허리 얼음골에서 흘러내려온다. 절집을 왼쪽에 끼고 5~6분 올라가면 얼음골이다. 냉골로도 불리는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 단박에 선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커다란 넓적바위들이 얼기설기 쌓여 숭숭 구멍을 만들어놓았는데, 구멍마다 오소소 한기든 바람이 새어나온다. 이것 참 신기하다.

 

여기 사람들은 이곳을 '베틀굴' 혹은 '삼신굴'로 부른다.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선녀들이 내려와 베틀에 앉아 천의무봉의 옷감을 짜고, 삼신 할미는 굴속에 들어앉아 마을 여인들에게 자식을 점지해 주었던 곳이다. 선녀와 삼신할미의 마음에 얼마나 쏙 들었길래 그런 전설이 전해진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굴 앞에 앉아 있으면 마냥 머물고 싶어지고, 어느덧 생각과 마음이 가지런해지고 온몸은 소슬해진다. 여기서 다시 5~6분 산길을 올라가면 지혜롭게 생긴 장수바위 이마가 불쑥 나타난다.

 

장수바위는 사방 20여 m에 높이 15m 되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다. 치마산의 주인공답게 늠름한 자태로 저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장수바위 둘레에는 흥미롭고도 슬픈 내력이 깃들어 있고 아름답고도 기이한 형상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눈에 담아두고 가슴에 새길 만한 볼거리와 느낄거리가 빼곡하다.

 

장수바위 앞쪽 펀펀한 곳은 무성한 칡넝쿨과 웃자란 잡초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1300여 년 전에는 장수바위를 배경으로 장수사가 서 있던 절터다. 장수바위 가슴을 장식한 마애석불이 그 무렵 혜안국사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전해져와 그리 짐작한다. 마애석불은 보려고 애써야만 간신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꾹 다문 얼굴로 연꽃 위에 가부좌한 모습이 흐릿한 기억처럼 남아 있다. 세월에 풍화되고 한국전쟁 때 총탄세례를 맞고 사람들의 몹쓸 손길에 훼손된 탓이다.

 

장수바위 아래쪽에는 장수굴이 있어서 여름에 찬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솟아나온다. 굴 안에는 온천 같은 샘이 있는데, 그 옛날 장수사 절집에서 이 물로 절집 살림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전에 담이 큰 마을청년들은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 4m를 곧추 내려가 미로처럼 생긴 굴속을 탐험하며 여름날을 보내기도 했다는데, 마을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굴 입구에서 불을 피우면 진안 마이산 쪽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전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빨치산을 소탕하면서 굴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굴 입구도 돌로 메워져 있다.

 

장수바위 뒤쪽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와 두꺼비 형상, 쌓다만 돌탑, 고인돌 같은 넓적바위 등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줄 듯 발걸음을 붙잡는다. 밧줄을 타고 15m의 장수바위 위로 올라가면 기이하고도 멋드러진 천년송들이 흙도 없는 바위를 움켜쥐고 늙어간다. 한그루는 용트림 무늬가 선명하고 그 음전한 형태가 여자의 그것처럼 뚜렷하다. 바위 절벽에 가까스로 붙어 이리저리 가지를 내뻗은 소나무는 신선이 앉아 있던 자취가 선명하다. 낭떠러지 끝에 방석처럼 튀어나온 자리는 도일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명상에 잠겼던 곳이다. 온통 자연의 신비와 비밀스런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곳이 왜 '전설의 고향'으로 회자되었는지 알 만하다.

 

둘러본 대로 치마산은 이를테면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굴 위에 떠 있는 덕산인 셈인데, 신령한 산기운을 단박에 알아본 옛사람들이 산의 지형을 말이 달려 나가는 형상으로 정확하게 짚어낸 것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어쨌든 감탄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은 지리학자와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이 달려들어 산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흩어지고 스러진 유적과 이야기들이 더 흐려지기 전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될 때다.

 

치마산을 내려오면서 문득 깨달은 생각 하나는, 사람들의 유별난 모악산 사랑에 가려 지척에 있으면서도 치마산을 오래도록 방치했고 그것이 치마산의 행복이자 불행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즈넉한 치마산의 매력이 까발려지면 사람들 발길로 북적이고 그럴수록 더욱 훼손되는 건 아닐까, 지레 걱정스럽다.

 

△ 천연 냉풍이 쌩쌩, 냉수가 콸콸콸, 진안 풍혈냉천

 

치마산의 베틀골 같은 지형을 '풍혈'이라 한다. 산등성이나 산기슭에 있는 풍혈은 여름엔 냉풍이, 겨울에는 온풍이 나오는 구멍이나 바위틈을 이르며, 바람의 길인 땅속 굴을 통해 구멍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여름에도 얼음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냉풍이 불면 '풍혈'이라고 하지 않고 '얼음골'이라고 부른다. 이런 희귀한 지형 아래 흐르는 물은 매우 차가워 '냉천'이라 하며 광물질이 많아 '명수'(맛있는 물)로 꼽는다. 그 첫손에 꼽히는 곳이 진안 양화마을의 풍혈냉천이다. 안 가볼 수 없다.

 

진안 대두산의 냉천은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약 달이던 물로 소문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여름철 명소다. 또 위장병과 피부병, 무좀과 땀띠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늘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평일이고 이른 아침이어선지 관광객은 눈에 띄지 않으나, 소문대로 냉천은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섭씨 3도의 차가운 물을 콸콸 쏟아내고, 언덕 바위틈 풍혈에서는 안개처럼 서늘한 냉기가 뿜어 나와 풀잎마다 이슬이 맺히고 바위마다 푸른 이끼가 끼어 있다.

 

찬바람이 가장 많이 불어 나오는 산 아랫도리를 빙 에둘러 돌과 시멘트로 담을 쌓아 만든 공간도 있는데, 동굴처럼 어둑한 그곳은 습습한 한기로 으스스하다. 온도계를 보니 섭씨 4도를 가리키고 벽에서는 연신 냉풍이 불어 나온다. 한구석에는 몇 달 전 갈무리한 싱싱한 배추가 쌓여 있고 지난해 김장김치가 담긴 통들이 늘어서 있다. 냉장창고로 이용하면서 닭도리탕과 민물매운탕 등을 파는 식당을 겸하고 있다.

 

자연은 한여름 불볕더위를 내려 우리를 고달프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겨낼 서늘한 풍혈냉천을 함께 선사하여 우리를 감탄시키고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든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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