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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아내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오전, 전주 오거리광장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일역사를 극복하고 우호를 추진하는 모임' 회원 130여명이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는 집회였다. '한일역사를 극복하고 우호를 추진하는 모임'은 일본인 결혼이민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이날 집회는 전주 뿐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13개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회원들은 "이 같은 사죄가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인 죄를 씻기엔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의 목소리를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고 집회 이유를 밝혔다.

 

이들의 사죄집회를 보면서 문득 한사람이 생각났다. 여러해 전 취재로 만났던 스가노 토모코 할머니다. 1922년생, 올해 91세지만 당시 중풍으로 투병생활중이셨으니 생존해계신다면 참으로 반가울 일이다. 스가노 할머니는 일제식민지시대, 한국남자와 결혼해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 와세다 대학에 유학중이었던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지만 남편에게는 이미 결혼한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그래도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낳으면서 한국인의 아내로 살았다. 호적도 없으니 법적으로는 아이들과도 남이었으며, 주민등록증도 얻지 못한 서러운 삶이었다. 20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이 작고하고 나서는 생계까지 도맡아야 했다. 일본인으로 멸시받으면서도 참고 견뎌야만 남의 집일과 품팔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절, 할머니가 즐겨 부른 노래는 이미자의 '가슴 아프게'였다.

 

스가노 할머니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일제시대,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은 적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내선 결혼' 장려정책 때문이었다. 1920년에 있었던 왕세자 이은과 일본 왕족인 이방자여사의 결혼은 내선결혼의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당시 총독부는 내선결혼을 이룬 가정에 표창장까지 내릴 정도로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 한다. 내선결혼의 대상은 대부분 힘없고 가난한 조선남자들이었다. 일제의 잔혹한 농지수탈과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26년에 내선결혼으로 459쌍이 가정을 이루었으며 1927년 499가정, 1928년 527가정 등으로 해마다 그 숫자가 늘어나 1940년대에는 해마다 1천여 가정이 내선결혼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그들, 한국인과 결혼했던 일본인 여성들의 말년은 대부분 생활고와 질병에 시달렸다.

 

국적이 일본이어서 생활보호대상자도 될 수 없었던 그들은 남편과 아이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자신의 조국 일본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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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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