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촌놈에서 우리나라 일류 기업 임원까지 오른 것도 모자라 국내 굴지 대기업들을 상대로 물류 마케팅을 벌이고 있는 작지만 강한 '탄소 같은 사나이'가 있다. 이 기업은 바로 우신산업 주식회사로 이곳의 CEO는 전북 군산이 고향이지만 그의 젊은 청춘은 타지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곳에서 배운 모든 기술을 한 데 집약해 다시 고향에 회사를 설립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는 아직 자신을 청춘이라 칭하며 '죽을 때까지 일하고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를 신조로 대한민국 육해공을 통틀어 전북을 전진 산업화 기지로 만드는 게 그의 마지막 꿈이라고 한다.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그가 살아온 소설 같은 일대기와 함께 그가 일군 사업체의 미래 전략, 그리고 전북 경제와의 상생을 3차례에 걸쳐 조명해봤다.
△ 1시간 걸어서 초등학교 다녀
'탄소 같은 사나이' 우신산업 CEO 국중하(79) 대표는 1936년 2월15일 군산시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고평부락에서 태어났다. 고평부락은 지대가 높은 평야지대란 뜻을 의미, 국 대표는 논으로 둘러싸인 작은 부락에서 태어나 일제시대부터 6.25 동란,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까지 모두 겪었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 시절 당시 군산 마령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분교인 금암국민학교를 나왔다. 교실은 4칸에 그쳤고 전교생도 80명이었을 정도였으며 그는 집에서 1시간 거리인 학교를 매일같이 걸어서 등교했고 당시 일본군이 말을 타고 전쟁을 벌이던 시절로 억새같이 강한 마초를 뜯어야만 해 온손이 베인 흉터투성이로 얼룩졌다.
이후 중학교로 진학해야 했지만 성적이 전체 17등에 그쳤던 그는 중학교 진학에 있어 제1의 걸림돌을 맞았다. 익산 강경 실업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곳은 전교 1, 2등만 갈수 있는 곳으로 성적이 안 돼 담임선생님이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몇날 며칠 울며 선생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통사정을 한 결과, "중학교에 떨어져도 원망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추천 승낙을 받았고 결국 강경실업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당시 금암국민학교에서는 모두 9명이 이 학교 시험에 응시했고 이 가운데 국 대표를 포함한 다른 1명만 합격, 그는 일생에 있어 최초의 도전을 이렇게 극복했다.
△대학생때 지원 입대 인생 전환점
강경실업중학교는 5년제 학교로 고등학교란 개념이 없던 당시 중등·고등교육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으며, 그가 중학교 2년(6.25 발발) 때 대한민국 최초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됐다. 그는 이리공고로 진학했으며 고교 2년 여름방학 가출을 통해 그는 일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고교 2년 당시 '엄한 호랑이'로 불렸던 그의 아버지는 딸을 제외한 자식들에게 재산 상속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그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기를 거부했다. 당시 그의 한문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잘못된 상속제 때문에 젊은이들의 자립정신이 희박해지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 재벌들의 경우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만 가르침이 끝나면 가차 없이 홀로서기를 시키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우리는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에 따른 상속거부가 이어진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는 것이 뭘 안다고 상속을 거부하냐"고 호통 쳤고 아버지가 무서운 그는 침묵해야만 했다.
바로 여름방학이 다가왔고 그는 '부모님 전상서'란 편지 한 통만 남기고 곧바로 서울행 가출을 시도했다. 한마디로 상속 거부 투쟁을 위한 그의 조그만 항거였다. 같은 마을에 있던 친구 한 명이 일찍이 돈을 벌기 위해 서울의 한 다방에서 주차맨을 하고 있었고 그 친구에게 연락해 같이 살면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리해 방학이 끝날 무렵 그는 시대상의 대표적 생필품이던 부모님의 흰 고무신 두 켤레를 사들고 한 달간의 가출에 종지부를 찍었다.
너무도 엄했던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으로 가득했지만 용기를 내 "아버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사님의 가르침대로 내 스스로 당당히 서고 싶었습니다"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고,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 없이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북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고 2학년 재학시절 그는 다시 인생의 제2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남자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그곳 '군대'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대학4년 졸업 때까지 영장이 나오지 않지만 본인 스스로 '지원'을 통해 군대를 가게 된다. 당시 시대 상황은 '군대 가면 죽는다. 영장 나오면 도망가라'는 말이 사실화 될 정도로 군대 기피 증세가 심했지만 그는 우리나라 3대 의무였던 '교육, 납세,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자원입대 했다는 것.
논산 연무대 훈련소를 거쳐, 광주 포병학교,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한 그는 제대 당시 부대로부터 우수군인 표창을 받는다. 군인 대부분 학력이 초등학교에 머물렀던 그 때 그의 학력은 대학생으로 부대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았고 그런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것이다.
△ 대기업 스카우트 입사 기술 익혀
군 제대 이후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1962년, 졸업과 동시에 국내 제1의 대기업으로 꼽혔던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공채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뗀다. 호남비료 구성원들은 우리나라 초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 대학생의 입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지역 각 동네별로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직업은 면서기였는데 호남비료 회사에서 나오는 급료는 면서기 급료의 7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다. 국 대표는 그 시절 급료를 저축하고도 돈을 쓸데가 없을 만큼 남아돌았다고 회상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사회봉사도 시작, 충주대학교에 다니던 불우 여학생이 있었는데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돌아가셨고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시와 편지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로 국 대표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일체를 지원했다. 그 문학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수백통에 이를 정도며, 그 소녀는 국 대표의 이 같은 동정심을 연정으로 착각, 향후 졸업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 구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집안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중매를 통해 결혼하기에 이렀고 당시 신혼여행은 온양온천으로 갔다가 아버지 산소를 들르는 등 그의 행동은 일반인들과 뭔가는 달랐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호남비료 회사 5년차 재직 당시 그는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들을 총 관리하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공채시험에 응시했고, 당당히 합격해 이곳에서 기계 설비를 담당했다.
국내 첫 동대문 지하철 공사도 그가 맡았고 다시 5년 후 극동건설이 만들던 포항종합제철 공장을 짓지 위한 기술 인재로 스카웃 제의를 받고 회사를 이직했다.
극동건설에서 1년간 제강 공장을 만드는 데 주력했던 그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현대그룹에서 실시했던 중간간부 공채 시험에 다시 응시해 현대건설 기계과장으로 들어갔다.
5년마다 한 번씩 회사를 옮겨 그 회사의 신기술들을 모두 습득한 '괴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그는 현재중공업 건설의 철골 설계 시공을 맡았고 당시 톤당 18만원 하던 철골의 단가를 10원으로 낮추는 지대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그는 39세 나이로 현대그룹 이사의 직함을 달게 되는 등 그의 신화가 시작됐다. 당초 현대그룹에는 또 다른 최연소 이사가 있었는데 그 이사는 바로 33세 젊은 나이로 이사가 된 현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국 대표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직장 상사로 모시고 있으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뒤에서 든든한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그는 1987년 3월 세상 부러울 것 없던 현대그룹의 이사 자리를 박차고 세상으로 나와 자기만의 회사(지금의 우신산업)를 설립하기에 이렀다. 현대, 대우 등 국내 굴지 대기업을 상대로 자동차 연료통 등을 생산해 납품하고 있으며, 지금의 우신산업은 세계 속의 우신산업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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