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 막내딸 비극적인 삶에도 마음씨 고왔던 분
국보디자인 회장
석방된 뒤 생활비는 도청과 전주시,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충당했다. 왕의 딸이지만 호적상으론 왕의 딸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에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생활이 빈곤해 때로는 벼이삭을 주으며 생활을 한 적도 있다. 이런 소식을 듣고 필자는 왕의 딸이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집수리도 해주고 부모님 뵙듯 일주일에 한 두 번 찾아가 문안도 드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 분께서 필자를 양아들로 삼고 싶다고 했다. 결혼한 남편이 안동 김씨고 필자가 안동 권씨니까 아들로 삼겠다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어머니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필자는 그 분을 친부모처럼 정성껏 모셨다. 나도 사업에 실패하고 힘들 때였지만 그 분 말씀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양어머니께서는 항시 착하게, 선하게, 곱게 살라며 좋은 교훈들도 남겨 주셨다.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경기전 어머니 문안을 드리러 갔다. 황녀 어머니께서 한 시간 전에 쓰러진 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여 가서 보니 유난히도 건강하신 한 할아버지가 변소를 보다 쓰러져 있었다. 경기전 주변에 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요청해 택시를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시트에 변이 묻어 못 태운다고 하기에 나는 택시기사에게 "돈을 줄 테니 태워달라"고 했다. 전주 도립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치료를 하려 하니 먼저 돈을 내라고 하기에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주고 그 할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노인 무료우대권 내 주복남이라는 할아버지 이름이 있었다. 파출소에 신고하니 한 시간 후에 자녀들이 와서 노인을 인계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황녀 어머니께서는 "너는 앞으로 잘 될거야" 라며 칭찬해 주셨다. 나는 그 때 참으로 힘들게 생활했다. 우리 다섯식구와 함께 단칸방에 살면서도 그런 선행을 한 마음을 항시 변치 않고 살았다. 며칠 후에 주복남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자녀들이 나를 찾아 왔다. 내 생활이 풍족하지 않고 단칸방에서 사는 것을 보고 감동해 돌아갔다 한다.
황녀 어머니는 비참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고운 마음씨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황녀 어머니는 처지가 자신과 같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큰 딸 박근혜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의 딸과 왕의 딸을 만나게 해준 사실도 있다. 따뜻이 배려해준 대통령의 딸에 대해 나는 지금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황녀 어머니는 1982년 5월 향년 61세에 갑자기 밤에 돌아가셨다. 전주 이씨, 전북도청 그리고 전주시의 많은 배려로 외롭지 않게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내 나이 벌써 72세가 됐지만 돌아가신 어머니와 모든 주위 분들의 사랑으로 객지에서도 축복을 많이 받으면서 활동을 하고 있고, 전북의 후배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장학금도 가끔 내고 있다. 황녀 어머니께서 저 나라에서도 부족한 나를 잘 되라고 기도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다. 살아계실 때 좀 더 잘해 드렸더라면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산다. 우리 국민도, 우리 도민도 살기에 어렵다고 느낄 때 왕의 딸 이문용 할머니같이 고운 마음을 가진다면 많은 축복과 행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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