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도로 후진 기다려주는데 한국 주차장서 차 뺄때 경적 상대 배려하면 여유로워져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차량들로 경춘고속도로는 가다서다가 반복되었지만 마음은 느긋하다. 홍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니 정체도 풀리고 한가로운 산길에서 편안한 드라이브다. 북위 38도 경계를 지나 구비길을 한참 돌아서 11시 10분경에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산행기점에 도착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방동약수터에 들러 유명한 탄산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전나무와 함께 잘 가꾸어진 자작나무 숲도 참 좋다. 억새풀과 들국화 위로 하늘거리는 고추잠자리의 고운 날개 짓은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리는 전령사다.
약 한시간 정도 걸어 계곡트레킹 기점인 고경동교에 도착하니 총무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잰다.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모두들 그늘을 찾는데 다리 밑이 제일 좋단다. 편편한 곳은 먼저 도착한 다른 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건너편 물가로 건너려는데 가게 앞에 자리가 났다고 부른다. 다리 밑을 되돌아가니 길위에도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게 미안한 마음에 "죄송하지만 조금 지나가겠습니다" 했더니만, 나이 좀 드신 분이 "물쪽으로 돌아가면 될텐대 굳이 이리 지나 간다."면서 언찮은 표정을 짓는다. 다시한번 미안하다고 했지만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다리밑에 있는 길도 행인들 통행이 우선이어야 할진대, 그늘을 차지하려고 길을 막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끄트머리에 큰 도로에서도 양보하면서 작은 샛길조차 선뜻 양보 못하는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필자는 자동차 운전을 영국에서 시작했다. 운전면허는 국내에서 취득했지만 장롱면허로 유지하다가 유학가서야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운전한 경험도 없었고 또 우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 영국시스템에 적응도 해야겠기에 비싼 수강료를 내고 도로연수를 받았다. 안전벨트를 먼저 매고 시동을 걸고, 핸들은 반드시 두 손으로 잡으며, 차선을 바꿀 때는 방향표지 신호를 먼저 넣고, 정차시 기어는 중립으로 변속하라는 등등 이론과 실습을 거친 후에 드디어 혼자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섰다. 우리의 초보운전에 해당하는 L(Leaner driver)자 표지를 앞뒤범퍼에 붙이고 배운 대로 한다지만 운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차는 물론이고 골목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전거며 행인들도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조금 익숙해지니까 처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방향을 바꿀 땐 바꾸는 방향을 손으로 표시해 준다. 행인들이야 교차로와 상관없이 도로를 가로 질러 다니니까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닌 시내길은 저속으로 가면 된다. 서행한다고 재촉하지 않으니까 속도에 신경쓸 일 없다. 미숙한 운전으로 좌우회전 타이밍을 놓쳐 도로에서 전진 후진을 거듭해도 뒤에서는 기다려 주었고, 골목에서 차머리를 내밀고 있으면 오히려 큰 길에 지나가는 차가 양보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시작한 4년간의 영국운전경험은 초보운전자 시절의 긴장을 제외하고는 편안했다.
서울에 와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노상이나 주차장에서 차를 빼기 위해 후진할 때, 지나가던 차가 경적을 울려대는 경우다. 주택가나 주차장내에서는 서행 운전해야 할 텐데 기다려 주기는커녕 경고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침 바쁜 시간에 몇 십초 양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꼭 바빠서 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앞길에서 걸리적거리지 말라는 마초심리의 발로는 아닐까? 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교대로 한 대씩 진행하고 있는 데 갑자기 차머리를 들이밀 때도 황당하다. 화가 나서 끝까지 비켜주지 않았고 접촉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어느날,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집사람이 "상대방 잘못만 탓하지 말고 당신이 양보하면 안되나요." 한다. 부끄럽지만 수양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양보했더니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때로는 뒷차로부터 빵빵거리는 질책을 듣기도 하고 드물게는 종주먹 세례도 받지만 양보한 날은 기분이 좋다. 비상등을 켜거나 손을 들어서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해도 좋고, 그냥 지나가도 마음은 여유로워 진다. 내 작은 배려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의미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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