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개화파·보수파 나눠져 국론 분열
준비 안 된 미래는 희망과 보장이 없듯이 제1조부터 ‘조선은 자주국가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조문에 우리는 오히려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 안심했지만 일본이 초장에 심리적 무장해제를 시키려는 함정였고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일본의 입지를 넓히려는 계략였다. 그 외에 3항구(부산, 후에 원산, 인천 지정)의 개방도 남의 나라 땅에서 일본의 일방적 선정이나, 조선 땅에서 일어나는 일본인 범죄를 일본법으로 처리한다는 치외법권 조항은 후에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특히 통상조약인데 관세율이 설정돼 있지 않아 우리 물품을 보호할 근거조차 없는 심히 불평등한 조약였는데 우리는 전혀 몰랐다. 6년 후(1882) 미국과 조약을 맺을 때에나 통상조약에 관세율이 설정돼야 함을 뒤늦게 알았지만 많은 것을 일본에게 잃은 후였다.
한편 거세게 밀려오는 외압을 감당하려면 내부의 결속력이 필수건만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국론분열은 국가의 동력을 떨어트리는데 치명적였다. 개화세력도 보수세력도 나라의 앞날을 지킨다는 목표는 같았을지 몰라도 방법론에서 평행선을 달리다보니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상대방에게 틈을 벌려 침략의 길을 열어준 모양이 됐다.
그럼에도 역사의 한편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고 이 시절의 희망은 교육였다. 오로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필두로 민간 유지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뻗어나갔다. 바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애국심으로 뭉쳐 민족 운동에 앞장서고 계몽운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희망의 내일을 준비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도 3·1운동의 불꽃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과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35년 만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8·15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된 지 내년이면 어언 70년이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성장으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국가의 위상을 떨치면서 오늘날의 성취가 있었다. 이 역사의 길 위에는 애국의 순국선열과 6·25 전쟁 때 목숨 바쳐 싸운 전몰장병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이분들에 대한 추념일이 현충일이고 6월은 호국의 달이다.
교육 받은 인재들 애국심으로 뭉쳐
내 나라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이 얼마나 참담했고, 나라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한지 임시 정부의 안살림을 도맡고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던 정정화 여사의 귀국전야의 글을 인용해 본다.
“서신 연락조차 닿지 못했던 중원대륙의 흙바람이 휘몰아칠 때, 손가락 같이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 듯이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 곳 그 곳이 내 나라였다. 내 조국이었다. 그렇게 조국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어린 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 안에 계시듯이 조국은, 잃어버렸던 조국은 그렇게 있었다.”
- 정정화 여사 회고록 〈녹두꽃〉의 ‘해방 후 귀국전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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