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북대 2학년 때 농성 중 계엄군에 붙잡혀 / "이세종열사 추락사 아니다" 잘못된 소문 바로잡기도 / 추모식·기념사업 이어와
“5월18일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생각만 해주면 됩니다.”
지난 1980년 5월17일 전북대학교 제1학생회관에서 이세종 열사가 희생당하기 전 김완술 씨(55)는 이 건물 2층 교수휴게실에 마련된 농성장에 있었다.
당시 이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씨는 ‘그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이세종 열사의 외침을 들었지만 이 열사를 하늘로 보내고 본인도 계엄군에 붙잡혔다.
김씨는 “당시 농성장에는 35~40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열사의 외침 이후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붙잡혀 굴비처럼 엮여져 내려왔다”고 회고했다.
부안 출신인 김씨는 전주 신흥고를 졸업하고 1979년 전북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1979년 10·26과 12·12 쿠데타로 이어지는 안갯속의 정국에서 김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북대 학생들은 어용교수 퇴진과 교련수업 반대, 총학생회 부활 등의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대학 교정에는 ‘보안대가 좌지우지 한다. 전두환 물러가라. 어용교수 퇴진하라. 총장 물러가라’는 학생들의 외침이 매일 반복됐고, 학교 잔디밭에서는 학생들의 밤샘토론이 이어졌다.
교내에서 진행된 시위는 5월로 접어들자 거리시위로 번졌다. 당시 전북대 정문(현재 구정문) 앞 철길을 넘나들며 전경과 대치했고 수 천명의 학생들은 전북대 정문에서 시외버스 터미널과 한국은행 앞까지 진출했다.
그해 5월17일 김씨는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동료 학생들과 함께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현장에서 붙잡혔다.
학생회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용차에 태워진 김씨의 당시 나이는 21세에 불과했다.
김씨는 당시 학생회관에서 끌려내려오는 내내 곤봉으로 맞은 머리 부위가 찢어지고,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그는 전주경찰서(현 전주 완산경찰서)로 끌려가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일주일간 조사를 받다 육군 35사단 헌병대 유치장과 보안대 등으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6월 중순 민주화운동을 하다 붙잡힌 여학생과 부상자들이 가담 경중에 따라 하나 둘씩 석방됐다.
“가족들 보는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방지 약속’에 대한 각서를 쓰면 풀려난다”는 보안대 관계자의 회유에 김씨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보안대를 찾은 형을 마주했다.
김씨는 “당시 무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각서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앞에 있는 형을 보자 연필을 들 수밖에 없었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 때문에 각서를 썼다는 김씨. 석방돼 복학을 한 뒤에도 그의 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1984년 ‘이세종 열사 추락사’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무성하자 제1학생회관 앞에서 이세종 열사가 숨질 당시 입었던 옷과 유품을 전시하며 ‘사고가 아닌 무력에 의한 희생’을 주장했다.
현재 김씨는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 120명의 회원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업과 5·18희생자 추모식 등의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17일 오후 5시 전북대학교 이세종 열사 추모비 앞에선 그는 “그러니까 5월 18일 하루만이라도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생각만 해주면 됩니다”라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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