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의용경찰로 인민군 소탕작전 참여 / 전쟁 끝나고 다시 4년 5개월 군생활 / "후유증으로 소리 잘 못듣지만 살았으니 다행"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오전 10시 전주시 진북동 자택에서 만난 6·25참전 유공자 최맹규 씨(85)의 목소리는 여전히 까랑까랑했다.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요. 옛날에 내가 기관총 사수를 하면서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젊은 기자 양반이 질문을 좀 크게 해줘요!”
부인과 함께 사는 오래된 20평형 주택에는 하얀 한복을 입은 부친과 모친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좁은 방과 거실은 오래된 사진과 표창들로 빽빽했다. 방바닥에 앉자 최 씨는 벽에 걸려 있던 흑백사진을 내려놓았다.
그는 “왼쪽에 소련제 소총을 잡고 엎드린 청년이 바로 나예요, 그 옆 소총에 태극기를 걸어둔 사람은 친구, 그 옆은 소대장인데 당시 소대장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기록을 남기자’며 사진을 찍어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932년 12월 10일 김제 금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 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1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1년 11개월을 의용경찰로 복무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 한강 이남에 있던 인민군을 소탕하는 작전에 최 씨가 투입된 것. 1개 사단 규모의 인민군이 지리산에 주둔하는 등 호남지역에도 인민군이 활개를 치자 최 씨가 근무한 정읍과 김제, 고창에서도 전투가 활발했다고 한다.
고지로 올라오는 인민군들이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리면 들고 있던 기관총을 격발했다는 최 씨는 당시 기관총의 큰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돼 지금도 한 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1953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난 뒤 지인의 소개로 아내와 결혼을 하고, 전주 자동차교습소에 다니며 운전면허증을 딴 최 씨에겐 ‘군 입대’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의용경찰 참전을 군 복무로 인정받지 못해 공군에 다시 입대한 최 씨는 3년을 복무하기로 서약했지만, 전역할 당시 병력이 부족해 1년 5개월을 더 복무했다고 한다.
27세에 제대한 최 씨는 부친의 농사일을 돕다가 전주의 한 운수회사에 취직했다. 화물차를 운전하며 4녀 2남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13년간 무사고 운전을 한 공로로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가족들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 온 최 씨는 지난 2002년 김대중 정부로부터 6·25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전쟁이 끝난 지 50년 만이었다.
최 씨는 “정부의 참전 유공자 모집 공고에 김제·정읍·고창경찰서를 찾아가 의용경찰로 활동한 기록이 담긴 ‘인우보증 진술서’를 받으러 다녔다”며 “당시 전우들을 찾으러 경로당을 찾아 가기도 했지만, 유공자 인정에 결정적인 자료는 소대장의 권유로 찍어 둔 흑백사진”이라고 했다.
지난 2012년부터 6·25참전유공자회 전주시지부와 전북도지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 씨는 6일 국립 임실호국원에서 진행되는 현충일 행사에 참여한다.
최 씨는 “요즘 현충일 행사를 하면 지팡이를 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자리를 다 채우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이 날 만큼은 모두가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생각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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