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국경을 넘었습니다.”
옆을 따르던 장덕 해준이 낮게 말했을 때는 유시(오후 6시) 무렵, 기마군은 이제 일렬종대로 산기슭을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곳은 사람 하나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외진 산길, 옆쪽은 자갈투성이의 불모지인데다 물줄기도 없어서 짐승도 드문 땅, 신라군 국경 초소는 5백여보 떨어져 있었는데 이 시간에는 저녁 준비로 밖에 나오지 않는다. 기마군은 초소를 뒤로하고 술시(8시)가 될 때까지 영토 안으로 더 진입하고 나서야 작은 개울가에서 멈췄다.
“변복해라.”
계백이 지시하자 각 무장들이 제각기 군사들에게 지시했고 한식경도 되지 않았을 때 기마군은 신라군으로 변했다. 각자가 신라군 복장을 말에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백도 허리띠를 떼고 신라 무장의 가죽갑옷으로 바꿔 입었으며 황금색 용 한 마리를 자수로 놓은 검정색 두건을 썼다. 이찬 등급을 나타내는 두건이다. 장덕 화청과 해준은 붉은색 두건을 썼으니 신라의 6급품 일길찬이 되었고 청색 두건을 쓴 효성은 9급품 급벌찬이다.
“자, 오늘밤은 영내로 더 깊게 진입한다. 출발이다.”
버릴 것은 땅에 묻고 신라군이 된 기마군이 계백의 명령에 따라 다시 떠났다.
“내일 저녁에는 삼현성에 달아야 한다.”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계백이 소리쳤다. 이제는 신라군이 되었으니 수군대며 지시할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백제왕 의자가 동방방령 의직에게 말하고 있다.
“달솔, 그대는 김유신만 막으면 된다. 김유신이 대야주를 지원하려고 내려올 때 허리를 끊어라.”
“예, 대왕.”
의직이 허리를 굽혔다가 펴고 의자를 보았다. 이곳은 동방(東方) 동북쪽의 황야, ‘백제대왕’의 거대한 깃발이 꽂힌 백제군의 본진이다. 대왕 의자가 친히 2만 친위군을 거느리고 북상했고 동방방령 휘하의 동방군 2만5천에다 북방군 5천까지 합해서 5만 대군이 벌판을 뒤덮고 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서 수천개의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터라 마치 땅에도 별무리가 펼쳐진 것 같다.
“대왕, 옥체를 보중하소서.”
“전쟁이 빨리 그쳐야지.”
의직의 시선을 받은 의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는 이미 갑옷 차림이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진막을 나온 의자가 위사장이 잡고 선 말고삐를 받아 쥐더니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 올랐다. 어둠 속에는 이미 수백기의 위사대가 주위에 벌려서 있다.
“별이 밝구나.”
하늘을 올려다 본 의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의직은 바로 말을 받았다.
“이번 출정에 대운(大運)이 따른다는 징조올시다. 대왕.”
“앗하하.”
마상의 의자가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달솔, 지금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면 뭐라고 말을 받을 거냐?”
“액운이 떨어졌으니 거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대는 곧 좌평이 되겠다.”
“입만 가지고 승진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왕.”
“잘 지켜라.”
의자가 정색하고 말하자 의직이 허리를 꺾어 절을 하고나서 낮게 소리쳤다.
“대왕. 만세, 천세.”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말고삐를 채어 몸을 돌렸다. 위사대에 둘러싸인 의자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의자는 친위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것이다. ‘의자대왕’ 깃발을 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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