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천리장성 축성은 그대의 공이다. 들라.”
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킨 영류왕은 연개소문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청에 도열해 앉은 2백여 명의 고관, 장수들의 시선이 연개소문에게로 옮겨졌다. 연개소문 혼자서 일어선 것이다. 아직 손에 술잔을 쥐고 있다. 머리에는 옥이 박힌 은관을 썼고 갑옷은 벗고 비단 겉옷 차림이다.
“대왕께 아뢰오.”
연개소문의 굵은 목청이 울리자 청 안이 조용해졌다.
“대인, 무슨 일이냐?”
영류왕이 지그시 연개소문을 내려다보았다. 연개소문은 5부 대인의 수장(首長) 격이었지만 언제나 영류왕의 견제를 받아왔다. 지금도 좌석 배치가 5부대인의 3번째 서열이며 조정 고관의 아래쪽이다. 어깨를 편 연개소문이 2백여 쌍의 시선을 받고는 그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영류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당한 태도다.
“대왕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영류왕의 대답이 냉랭해졌다. 그대 술잔을 든 채로 연개소문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광개토대왕과 장수대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 안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2백여 쌍의 시선이 연개소문과 영류왕을 번갈아 훑어갈 뿐이다. 그때 영류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앗하하. 내가 그대가 묻는 의도를 알겠다. 그 두 분 대왕은 위대하신 왕이시다. 허나 이 건무는 그분들과는 다르다.”
영류왕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가시더니 곧 눈을 치켜뜨고 연개소문을 노려보았다.
“나는 백성을 전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이 백성과 땅을 지키는 일이다!”
어깨를 부풀린 영류왕이 꾸짖듯 말을 뱉었다.
“보국안민이 내가 갈 길이다!”
“그렇습니까?”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연개소문이 몸을 돌려 둘러앉은 2백여 명의 고관들을 다시 보았다. 영류왕의 기세에 질린 고관들은 모두 숨만 죽이고 있다. 연개소문이 입술의 한쪽 끝만 비틀고는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한껏 추켜올리더니 술잔을 추켜올리면서 소리쳤다.
“고구려는 다시 일어난다!”
벽력같은 외침이 청을 울리자 모두 아연실색을 했다. 다음 순간 연개소문이 들고 있던 술잔을 청 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내었다.
“다 죽여라!”
연개소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다. 청의 네곳 문으로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앞장선 장수들은 모두 연개소문의 심복 무장들이다.
“와앗!”
청 안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이 울리면서 당장 살육이 일어났다.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다 죽인다. 사방의 문으로 끝없이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청 안은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 찼다. 연개소문은 달려온 심복 무장으로부터 장검 두 개를 넘겨받았다. 청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관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무기를 맡겨 놓아야 했기 때문에 청 안의 고관들은 비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칼을 받자마자 옆에서 허둥거리는 남부대인 고정태의 머리통을 내려쳐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서부대인 양수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에 달려가 등을 찍었다. 가슴으로 칼이 빠져나갔고 양수가 목청이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대인! 살려주시오!”
외치는 소리에 머리를 돌렸더니 북부대인 사반이 연개소문의 무장에게 목덜미를 잡힌 참이었다. 무장은 칼을 치켜들고 있다.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베어라!”
그리고는 상을 건너뛰어 영류왕에게로 달려갔다. 왕은 세 명의 무장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악을 쓰는 중이었다. 무장들은 칼을 치켜들었지만 베지 못하고 망설인다. 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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