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이윽고 왕비 교지가 입을 열었다.
“성충이 이제는 심중을 굳힌 것 같다. 갈수록 심하게 대왕을 압박하는구나.”
“제가 김춘추 공의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누가 보았단 말입니까?”
“신라에 심어놓은 첩자겠지.”
“그 첩자가 누군지를 밝히지 못하지 않습니까?”
연기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흰 얼굴에 염소수염을 길렀고 풍채가 좋다. 37세의 대성8족 중 하나인 연씨 일족이다. 부친 연대수는 바다 건너 백제령 담로의 태수를 지냈으며 조부 또한 좌평을 지낸 명문(名門)이다. 그때 교지가 지그시 연기신을 보았다.
“덕솔, 네가 한번 더 김공께 다녀와야겠다.”
“지금은 위험합니다. 마마.”
연기신이 굳어진 얼굴로 머리까지 저었다.
“성충이 보낸 밀정들이 제 주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성충의 기질로 보아서 암살자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마마.”
“넌 다음달에 3품 은솔이 된다.”
“제, 제가 말입니까?”
연기신이 눈을 크게 떴다. 결코 반기는 얼굴이 아니다.
“마마, 그러면 더욱 의심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공(功)이 없는 데다 더욱이 신라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터인데.”
“누가? 성충이?”
교지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성충은 대왕을 능멸한 죄로 곧 귀양을 가게 될 것이다.”
“귀, 귀양을 말씀입니까?”
“어제 궁성의 청에서 일어난 사건을 듣지 못했단 말이냐?”
“계백의 친위기마군 대장 직임을 바꿨다고만 들었습니다. 성충이 반대를 해서요.”
“대왕을 능멸했다.”
교지가 차갑게 말했다.
“넌 조회에 참석하지 않아서 자세히 모른다.”
그렇다면 왕비는 조례에 참석한 또다른 고관으로부터 내막을 들었다는 뜻이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연기신이 교지를 보았다. 왕비 교지는 신라 선화공주이며 선군(先君)인 무왕(武王)의 왕비가 데려온 여자다. 선화공주는 교지를 딸처럼 애지중지 키우다가 태자(太子)인 의자와 결혼시켰는데 무왕도 반대하지 않았다. 자신도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처지인 것이다. 교지는 선화공주의 친척인 신라 왕족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때 교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넌 동방(東方)의 현동성에 태왕비(太王妃)의 심부름을 가는 것이다.
“아, 예.”
“태왕비의 심부름은 대왕도 막을 수가 없지 않겠느냐?”
“당연하지요.”
더구나 성충까지 귀양을 간다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교지가 말을 이었다.
“계백이 연개소문한테서 받은 밀서 내용은 다 베껴놓았다. 그리고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도 내가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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