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밤입니다. 식당에 일하러 나가신 엄마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은미와 은수는 엄마도 기다릴 겸 현관 앞에 나란히 앉아 눈 구경을 합니다.
“누나.”
“응?”
“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야?”
은수가 양손을 볼에 딱 붙인 채 은미를 바라보며 이렇게 묻습니다.
“비가 얼면 눈이 된대.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그랬어.”
“그럼 선녀님들이 뿌려 대는 솜 같은 건 아니란 말이지?”
“그렇지.”
“그런데 왜 하얀색이야? 무지개색이면 엄청 예쁠 텐데.”
어휴, 이 녀석이…….
은미는 이제 은수가 묻는 말에 답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1학년인 은수는 항상 궁금한 게 많으니까요.
“이제 그만 좀 물어. 나 눈 구경할 거야.”
“치, 누난 항상 그래. 공부도 못하면서.”
“뭐?”
“3학년이면서 구구단도 못 외우잖아. 메롱!”
은수는 놀리듯 이렇게 말하곤 곧바로 일어나 눈 속으로 달음질칩니다.
“누나, 나 지금부터 코끼리만한 눈사람 만들 거다. 나랑 같이 만들지 않을래?”
“싫어. 너 같은 심술쟁이랑은 같이 안 놀 거야!”
허벅지 사이로 두 손을 꼭 끼운 채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은미의 모습이 꼭 파란 색상지 위에 그려진 마트료시카 인형 같습니다.
그 둥근 인형 뒤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계단 끝에는 창문도 없고, 온수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런 낮에도 밤처럼 깜깜한 은미의 집이 있습니다.
빛바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출입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퀴퀴한 곰팡내와 기름때로 얼룩진 부엌, 그리고 두꺼운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좁다란 방이 등장합니다. 은미와 은수는 그 속에 파묻혀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라면도 먹고, 그러다 잠이 듭니다. 솔직히, 아무리 이불을 많이 깔아 놓아도 춥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겨울 내내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나고, 머리는 어지럽고, 몸에선 열이 납니다. 감기가 시작되는 며칠은 이런 것들로 괴롭지만 일주일쯤 지나면 그런대로 견딜만합니다.
오후 늦게부터 내린 눈이 이젠 제법 많이 쌓였습니다. 눈나라 밤하늘 아래, 움직이는 것이라곤 은수뿐입니다.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인 은수는 정말 개구쟁이입니다. 발목까지 쌓인 눈 속에서도 폴짝폴짝 잘도 뛰어 다닙니다. 가끔 발걸음을 멈춘 다음 눈을 날름 받아먹기도 하고, 권투를 하듯 잔뜩 움켜쥔 주먹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기도 합니다.
“너, 그러다 감기 또 걸린다.”
은미는 은수를 불러 까까머리 위에 쌓인 눈송이를 톡, 톡, 털어 줍니다.
“괜찮아. 감기는 맨날 걸리지만 눈은 항상 오지 않잖아.”
은수의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은수의 기침소리는 항상 걱정입니다.
모든 지붕은 하얀 기왓장으로 새롭게 단장해 버렸고, 담장 위로 우뚝 솟아오른 나뭇가지엔 목련꽃만한 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는 콩알처럼 작게 보이고, 가로등 앞에서 폴폴대는 눈송이는 포도알처럼 크게 보입니다. 정말, 엄청난 폭설입니다. 이렇게 눈으로 덮인 세상을 말똥히 바라보고 있으니, 은미의 머릿속으로 한 소녀의 갸름한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겨울이 지나면 은미도 이제 의젓한 4학년이 되겠구나.”
어젯밤, 어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은미에게 <안데르센 동화집> 을 사 주셨습니다. 은미는 학교 숙제도 잊은 채 밤 세워 그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은미는 안데르센>
특히 <성냥팔이 소녀> 를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눈 오는 섣달 그믐날, 한 갑도 팔리지 않는 성냥을 들고 얼어버린 맨발과 맨손으로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소녀가 등장하는 동화 말입니다. 성냥팔이>
책을 읽는 동안 은미는 소녀와 자신이 꽤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을 좋아했던 아버지도 그렇고, 가난하다는 점도 그렇고, 아니 어쩌면 이렇게 두툼한 이불 속에 파묻혀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이 그 소녀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행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은미는 이 눈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이야기 속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려 봅니다. 그러다 문득, 동화 속 내용을 한 번 따라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 직접 경험해봐야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래야 진정한 친구가 되는 법이라고…….’
물론, 성냥팔이 소녀를 따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성냥은 방에 있을 것이고, 소녀의 얼룩진 옷은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와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펄 펄 눈까지 내립니다.
은미는 재빨리 지하 단칸방으로 내려가 성냥을 찾습니다. 다행히 엄마 화장대 서랍 속에 조그만 성냥갑 하나가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오는 은미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
현관 앞에 도착한 은미는 양말을 벗어 신발 속에 집어넣은 다음 눈 쌓인 골목길을 맨발로 걸어 봅니다.
“서,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하지만 은미의 성냥을 사 줄 행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위는 마치 텅 빈 성당 안 같습니다. 골목 군데군데 솟아 오른 은행나무들만이 하얀 외투를 걸친 채 은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차츰, 눈 속에 묻힌 두 발이 시려옵니다. 은미는 황급히 현관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아이, 발 시려.”
현관 앞에 도착한 은미는 서둘러 신발을 신습니다. 순간, 어디선가로부터 성냥팔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뭐? 나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맨발로 눈 속을 몇 걸음도 걷지 못하는 네가?
은미는 부끄러워 신발을 벗습니다. 하지만 저 차가운 눈밭 속을 다시 걸을 자신이 없습니다. 은미는 그렇게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습니다. 그리고 성냥갑 속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입니다. 환한 불빛 때문인지 은미의 볼그레 달아오른 볼이 더 붉게 보입니다.
“누나, 뭐해? 밤에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
놀이터 쪽에서 눈을 뭉치던 은수가 은미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응, 자꾸만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이 떠올라서.”
“성냥팔이 소녀? 그게 누구야?”
책을 싫어하는 은수가 성냥팔이 소녀를 알 리가 없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 성냥을 팔아서 살아가는 여자아이인데, 오늘처럼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던 날 거리에서 추위에 떨다 그만 죽어 버렸대. 정말 불쌍하지?”
하지만 은수는 은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눈밭 위를 내달리며 열심히 눈뭉치를 굴립니다. 눈발이 많이 약해 졌습니다. 잠시 후면 그칠 모양입니다.
은미는 다시 몇 개의 성냥에 불을 붙입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바라보며 그랬듯이 등에 포크가 꽂힌 거위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꼬마전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크리스마스트리를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영 또렷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개의 성냥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집니다.
은미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엔 이제 마지막 성냥이 놓여 있습니다. 은미는 그 성냥에 불을 붙입니다. 포르락하고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은미는 천천히 두 손을 모읍니다.
순간, 불꽃 속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입니다.
아! 백짓장처럼 희고 가냘픈 얼굴…….
분명, 어젯밤 동화책 속에서 보았던 성냥팔이 소녀의 얼굴입니다.
“바로 너였구나!”
은미는 반가운 마음에 소녀를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하지만 소녀는 은미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단지 구름처럼 공중에 떠 있는 할머니의 도톰한 얼굴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할머니, 절 데려가 주세요…….
소녀가 이렇게 나지막이 속삭이자, 할머니가 눈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녀의 하얀 볼은 다시 붉어지고 입가엔 초승달 같은 미소가 번집니다. 소녀는 졸음에 겨운지 천천히 눈을 감습니다.
그래, 착한 아기야. 나에게로 오렴.
할머니가 두 팔을 벌립니다. 그제야 은미는 불안합니다. 은미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추운 겨울, 거리에서 잠이 들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은미는 소녀를 향해 뭐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끈적끈적한 풀로 단단하게 붙여 놓은 것만 같습니다.
‘안 돼! 그렇게 잠들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단 말이야. 제발, 일어나! 내가 너의 친구가 되어 줄게. 난 말이야. 눈 속에 묻힌 네 발이 얼마나 시렸을지, 성냥불로 언 몸을 녹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충분히 알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 제발 눈을 떠. 일어나란 말이야!’
아, 불꽃 속의 소녀는 이제 할머니의 품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습니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퍽!”
순간, 굵다란 눈뭉치가 은미의 머리위로 떨어집니다.
“헤, 헤, 미안해.”
은수입니다. 은수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은미 너 졸았구나.”
엄마가 돌아오셨습니다.
“엄마!”
은미는 벌떡 일어나 엄마의 품속으로 와락 달려듭니다. 엄마의 품속은 역시 따스합니다.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런데서 잠들면 정말 큰일 난다.”
“누나 진짜 잔거야?”
“아냐. 그냥 잠시……”
은미는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더니, 잽싸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눈으로 뒤덮인 동네 풍경과 은수가 만들어 놓은 장독만한 크기의 눈사람뿐입니다.
꿈이었구나…….
은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엄마의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떼려는 순간, 은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엄마의 까칠까칠한 손을 입 가까이로 가져갑니다.
“응? 손이 왜 이렇게 차? 꼭 얼음장 같아.”
그리고 호, 호 하고 연방 입김을 불어댑니다.
“원 녀석도. 나 보다 네 손이 더 찬 것 같은데.”
엄마는 그런 은미가 대견스러운 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습니다.
“엄마, 누나 발 좀 봐. 맨발이야!”
이번엔 은수가 놀란 듯 은미의 발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그제야 은미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현관 바닥 위에 서 있는 은미의 두 발이 전혀 시리지 않습니다. 아니, 꼭 따스한 난로 옆에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은미는 신기한 듯 한 쪽 발을 들어 올려 손으로 만져 봅니다.
“엄마, 나 이상해! 발이 전혀 시리지 않아.”
순간, 은미의 몸이 공중으로 힘차게 솟구치더니 엄마의 가슴 깊숙이 파묻힙니다.
“어휴, 발이 얼었나 보네. 이런 말썽꾸러기. 신발도 신지 않고 눈 구경을 하다니…….”
엄마의 품속은 더없이 따스하지만 왠지 답답합니다. 엄마는 꽁꽁 언 은미의 두 발을 계속 손으로 문지릅니다. 그러자 은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엄마, 나 내려 줘! 정말 괜찮아. 하나도 발 시리지 않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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