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치즈 기술을 한국에 전파하고 장애인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헌신한 지정환 신부가 지난 13일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 신부는 1960년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오며 전북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일평생 약자와 함께 했고,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따뜻한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 희망을’ 벨기에에서 임실까지
1931년 벨기에의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지 신부는 1958년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왔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먼 길, 외국인 사제의 눈은 전쟁의 상흔으로 피폐해진 한국 땅에 새 희망을 주겠다는 사명으로 빛났다.
1960년 3월 첫 발령을 받은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에서는 ‘지정환’이라는 한국이름을 얻는다. 그의 본명 ‘디디에’의 발음과 비슷한 ‘지’를 성으로 정하고, 전주교구 김이환 신부의 이름 ‘환’을 따 ‘정환(正煥)’이라고 이름 지었다.
1961년 부안을 거쳐 1964년에는 척박한 산골동네 임실 성가리의 한 임시성당에 주임신부로 발령받는다. 지 신부는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산양을 키운다.
하지만 판매가 힘들고 남아서 버려지는 산양유가 늘자, 처리 방법을 고민하던 중 ‘치즈’를 떠올리게 된다. 남는 산양유에 누룩을 넣고 약탕기에 끓이는 등 여러 시도에도 치즈 생산은 쉽지 않자 지 신부는 유럽으로 치즈 견학까지 다녀온다.
그렇게 1969년 농민들과 함께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치즈 공장이 임실에서 출발을 알리게 된다. 임실의 모짜렐라 치즈는 서울의 유명 호텔과 피자가게로 판로를 넓히며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완주 ‘별아래 집’과 전주 ‘무지개 가족’
임실에 치즈 산업이 꽃피는 사이, 지 신부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1970년대 말 발병한 ‘다발성신경경화증’ 이라는 불치병으로 하반신 마비 증세가 나타난 것.
결국 1981년 지 신부는 임실치즈 산업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며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떠난다.
3년 후 치료를 마치고 휠체어를 탄 채 다시 한국에 돌아온 지 신부는 사비를 털어 전주에 장애인을 위한 집을 연다. 중증장애인의 재활을 돕기 위한 공동체 ‘무지개 집’과 ‘무지개 장학재단’. 완주 소양의 ‘별아래 집’에서 거주하던 지 신부는 불편한 몸에도 전주의 ‘무지개 장학재단’을 부지런히 오가며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을 위한 복지 증진에 여생을 바쳤다.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사회와 만나는 것에 큰 관심을 뒀던 지 신부의 뜻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도 했다. ‘임실치즈농협’과 ‘지정환 치즈피자’의 많은 체인점에서는 브랜드 사용료로 무지개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지속적으로 기부했으며 ‘세영재단’과 ‘무지개가족’도 장학금 조성에 뜻을 함께 했다.
△한국에 온지 57년, 한국인 되다
2016년 정부는 임실 치즈 개발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장애인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 지정환 신부의 공로를 인정하며 한국 국적을 수여한다. 한국에 온지 57년 만에 진짜 한국인이 된 것.
2017년 5월에는 임실치즈 50년사 복원 작업을 위해 두 팔을 걷었다. 지 신부는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이후 현재까지의 활동 자료를 기증함으로써 임실군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임실치즈 관련 ‘역사문화공간 복원사업’에 힘을 실어줬다. 이 자료에는 지 신부가 당시 촬영했던 임실읍 시가지와 치즈 생산과정, 치즈공장 신축 및 치즈 생산에 참여한 주민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다. 지 신부는 임실치즈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53년 세월이 담긴 사진자료를 일일이 편집, 앨범으로 제작했다.
그의 성원에 힘 입어 2017년 10월 27일 임실읍 옛 치즈공장에서는 임실치즈 50년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치즈역사문화공간’의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지정환 신부는 “어려운 주민을 위한 치즈산업이 결실을 맺어 감회가 새롭다”며 “오늘의 임실치즈가 탄생하도록 지원한 심민 군수와 군민들에 찬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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