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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프롤로그 - 전북 임진왜란사의 위상

1592년~1598년 임진, 정유재란
조선, 명, 일본 참여한 국제전
전북 관군, 의병 왜란 속 역할 커
웅치, 이치 국가 방어 결정적 계기
관군, 의병은 전국 단위로 활약

‘국가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이듬해 사헌부 지평 현득승에게 전쟁의 정황을 전하면서 덧붙인 의견이다.

이처럼 전북이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웅치(진안과 전주사이에 있던 고개)·이치(금산 서평)전투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전북 관군과 의병은 전국적으로 많은 전투를 수행했다. 고창과 장성 지역 유림이 일어난 장성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에는 부안 호벌치 전투, 남원성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양란 당시 전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박하다.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랑해전에 묻힌 변방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는 13일은 임진왜란이 발발(음력 기준)한 429주년이 되는 해이다. 양란 당시 전북에서 일어난 전투, 전북 의병장과 관군의 활약, 역사적인 의의 등을 전반적으로 조명한다.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전북

조선·명·일본 동아시아 삼국이 참여한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은 국제전쟁의 성격을 가진다. 7년에 걸친 전쟁은 삼국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어난 인적 물적 피해는 이들 국가의 격변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교체됐고,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대두했다. 조선도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인조반정(1623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그만큼 양란이 동아시아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전북이 겪었던 고초는 컸다. 병참기지라는 이유로 상당히 많은 관군과 의병이 투입됐으며, 이들은 전국 각지를 이동하며 왜적과 싸웠다.

각종 피해도 극심했다.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대규모 인력이 사망했고, 왜군은 생존한 포로를 대규모로 연행해갔다. 포로 가운데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에게 다시 전매돼 유럽 등지로 흘러간 이들도 있었다.

(왼쪽) 남문창의록. 1592년 임진왜란 때 거병한 김경수(金景壽) 이하 몇 사람의 행장 사실을 수록한 창의록. / (오른쪽)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방의 평강 채씨 일문을 중심으로 한 의병조직의 활동상을 기록한 흥덕남당창의동맹록 /사진제공=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왼쪽) 남문창의록. 1592년 임진왜란 때 거병한 김경수(金景壽) 이하 몇 사람의 행장 사실을 수록한 창의록. / (오른쪽)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방의 평강 채씨 일문을 중심으로 한 의병조직의 활동상을 기록한 흥덕남당창의동맹록 /사진제공=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전북 전투·의병활동 개관

왜란당시 전북 대표 전투는 웅치·이치전투(1592년)다. 웅치전투는 왜군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본진과 곡창지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시간을 지연시켜, 조선의 수군과 전라감영의 병력이 결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관군과 의병이 처음으로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로 꼽히기도 한다.

전라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활약한 이치전투는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완전히 저지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전투는 한양과 경기도 전투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1593년 경기도 행주산성을 막아낸 행주대첩에서도 전국 관군이 활약했다. 권율이 전쟁이 끝난 뒤 군사을 이끌고 북상해 병력 1만여 명을 이곳에 집결시켜서다. 이들 의병은 경상도 지역의 왜군을 막기 위해서도 파견됐다.

의병 역시 전국적으로 많은 전투를 수행했다. 1592년~1593년 고창유림이 대거 참여한 ‘장성남문창의’(유생의병)는 웅치전투를 비롯해 진주성 싸움, 경상도 전투 등에도 참여했다. 남원출신 의병장 변사정은 옥천, 상주, 선산, 함안 등지에서 적을 토벌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도 큰 활약을 했다. 당시 고창 의병장 채홍국과 평강 채씨 문중 인사들은 부안 호벌치에서 일대 혈전을 치렀으며, 의병 이복남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특히 남원전투 이후 전라도민들은 큰 희생을 치렀는데, 2만4394명의 코가 잘려나갔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전북 의병이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이유는 관념이 크게 작용했다”며 “다른 지역 의병은 향토수호의 개념이 강한 반면 전북 의병은 국토수호의 개념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때문에 전라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극심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부분도 있다”고 부연했다.

임진왜란 웅치 혈전 순국선열 추모제
임진왜란 웅치 혈전 순국선열 추모제

 

역사적 평가

이처럼 큰 활약에도 전북 관군과 의병의 활약상은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한산도·행주·진주 3대 대첩과 명랑해전에 조명을 받지 못하는 데다, 경북과 전남 등에 비해 왜란사 자료 정리와 연구가 미비한 상황이다.

연구인력 및 자료 부족이 큰 이유다. 전북의 현황을 살펴보면, 웅치, 이치 등 일부 지역 전투를 제외하고는 종합적인 연구와 자료 정리는 미비한 실정이다. 정유재란 시기 연구는 공백 상태이며, 일부 의병을 두고는 진위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정리와 고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관찬·사찬기록, 각 문중 소장 자료, 일본·중국의 고문서 등을 수집한 뒤, 연구를 거쳐 학술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는 게 도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 패러다임을 전북 의병에 적용하다보니, 이들의 위상과 활동이 축소되거나 연구에 미진한 부분이 발생했다”며 “전북에서 활동하거나, 전북출신 문·무관, 의병에 대한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서 정리한 뒤, 새로운 연구·검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후 객관적인 시각으로 양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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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북일보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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