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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미래유산 ‘비사벌초사’ 명칭 찬반 논란 이유는

신석정 시인 가옥 ‘비사벌 초사’ 두고 명칭 논란
<삼국사기> 본기 “비사벌 완산주 설치했다”는 기록 원인

비사벌초사 신석정 고택 /사진제공=전주시
비사벌초사 신석정 고택 /사진제공=전주시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던 전북의 시인, 신석정 선생(1907~1974)이 살았던 자택 ‘비사벌초사’를 두고 명칭논란이 한창이다.

역사사료에 비사벌이 전주의 옛 이름처럼 등장하지만, 당시 완산주(전주 옛 이름)와 비사벌의 지리적 위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도 그 시기의 비사벌은 경남 창녕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북 내 일부 식자층은 ‘비사벌’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전주가 오래도록 지켜야 할 ‘미래유산’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발단 <삼국사기>

문제의 원인은 <삼국사기> 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진흥왕조 기사에 따르면, ‘신라는 진흥왕 16년(555년)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와 함께 같은 책 제36권 지리지에는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삼았다’고 나와 있다.

이를 근거로 비사벌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옛 전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특히 전북 문학인들의 작품, 전주찬가, 전북대 교지 등에도 상징적으로 쓰였다.

앞서 신석정 선생도 1950년대 ‘비사벌’을 전주의 옛 지명으로 여기고,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 집을 뜻하는 ‘초사’와 결합해 ‘비사벌초사’라 이름을 붙였다.

 

△역사적 사실과 배치 가능성 제기

그러나 1990년대부터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 획정된 영역을 보면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흥왕 16년 인 555년, 전주는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병도 전 성균관대 교수는 자신이 삼국사기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 <삼국사기 역주 하> (1996)에 ‘당시 백제의 심장이었던 땅을 취해 주(州)를 삼은 것은 어림없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문헌 기록을 수용해 ‘전주와 창녕의 옛 지명이 똑같이 비사벌이라는 점에서 서술에 착오가 있었다’고 부연했다.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를 비롯한 5명의 역사학자가 펴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2012)에서는 완산주를 경남 창녕에 설치한 비사벌주로 해석하고 있다.

이강래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이 쓴 <삼국사기 인식론> (2011) ‘비사벌(창녕)에 있었던 가야 사람들을 백제의 완산(전주)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곳(전주)을 비사벌로 부르는 전통이 생겼다. 이런 전통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잘못 기술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창녕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삼국사기> 를 비교 분석한 뒤, 김부식이 비석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로 파악했다.

 

△전주시 ‘명칭 유지’ 입장

앞서 지난 2018년 ‘비사벌 초사’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전주시는 명칭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신석정 선생님께서 작고하실 때까지 거주를 하셨고, 비사벌이라는 이름도 직접 지으셨다”며 “후대에서 바꾸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헌사료에 나온 기록보다 신석정 선생님께서 실제로 사셨던 고택이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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