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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록주,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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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박록주 명창

박록주 명창은 경북 구미 출신으로 판소리에 일생을 바치며 치열하게 살다간 거장이다. 또한, 사랑도 사연이 많았던 인물로 소설가 김유정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나와 연희전문학교에 다녔던 유명한 소설가로 1935년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조선일보 '소낙비'가 당선이 된다. 이후 조선중앙일보에 '봄.봄'을 발표했고 1936년에 '산골나그네', '동백꽃'을, 1937년에는 '땡볕' '따라지' 등을 여러 지면에 발표했다. 하나같이 우리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주옥같은 단편소설로 지금도 그의 작품은 사랑받고 있다.

김유정은 1937년 지병인 폐결핵으로 서른 해 남짓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 직전에 청순하고 애절한 사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박록주 명창을 향한 애절한 순애보이다.

김유정의 절친한 휘문고보 친구 안회남이 유정 사후에 그를 그리워하면서 쓴 소설 '겸허 김유정전'에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정이 맨 처음 연애한 이성은 한 유명한 기생이었다. 물론 짝사랑이다. 그 시절의 유정은 점잖은 집안의 처녀들을 퍽 경멸하고 싫어하였는데 이것도 그의 가정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었으며 ㅡ중략ㅡ 유정이는 그때가 이십을 조금 넘은 때였고 그녀는 적어도 그보다 오륙 세는 위였을 것이다> 현실의 소설에서도 나타나듯이 김유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박록주를 첫 사랑했다. 그가 박록주에게 보냈던 편지와 박록주가 쓴 글이다.

<1926년 가을. 내 나이 24세.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 추석이 갓 지난 어느 날이었다. 겉봉엔 내 이름 석 자가 정성 들인 글씨로 씌어 있었다. 발신인은 '봉익동 00번지 김유정'이라는 사람이었다. 생소한 이름이어서 의아스러운 마음으로 흥분 속에 겉봉을 뜯었다.

# 박록주 선생에게

저는 전문학교에 다니는 김유정입니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올시다. 나이는 18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익동 00번지에서 살고 있사옵니다. 부모는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은 형님과 누님이 저를 돌봐주고 있사옵니다. 박록주 선생님이여, 저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에게 당돌하게 편지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김유정 올림 # 

ㅡ중략ㅡ 수많은 편지가 왔고 나는 그를 만나 말했다. "학생이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기생의 몸, 학생의 신분으로서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당신이 나의 마음을 받아줌으로써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ㅡ중략ㅡ 내(박록주) 마음은 아파서 얼른 오르지 못하고 같이 서 있었다. 유정에게 말했다. "이제 가세요", "가겠습니다. 저를 다시 찾을 때까지 기다립니까?", "기다리세요"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나는 유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음을 미리 알았다면 한마디 말이라도 다정히 하여 줄 걸 하고 후회스럽기조차 했다. 6.25 피난처에서 나는 친구 동생을 통해서 <동백꽃>이란 유정의 소설집을 처음 대했고 그가 그런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에게 너무 쌀쌀히 대한 것이 새삼 죄스럽게 느껴졌다.  [문학사상 1973년 4월호 중 '록주, 너를 사랑한다'] >

그렇듯 이 세상 모든 운명의 사랑은 뜨겁게 오고, 소리 없이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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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 #김유정 #판소리 #명창 #문학사상 #휘문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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