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는 2024년 1월 18일부터 0시부터 '전북특별자치도'라는 새 시대를 연다.
1896년 8월 4일 갑오개혁으로 전라도에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리되며 정해졌던 ‘전라북도’라는 명칭은 역사에 남고 ‘전북특별자치도’로 새역사를 쓰게 된다. 현재도 쓰이는 전라도라는 명칭으로 묶여 소외받아 온 전북으로서는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는 셈이다.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전북은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자치'를 향해 뛰어왔다. 역사적 혼란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 전북은 '자존'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현대 들어서는 중앙 정부와 광주·전남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속에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일제강점기 '자존'을 위한 투쟁
일제강점기 '자치'라는 단어는 '자존', 그리고 '자주'를 위한 움직임으로 바뀌어 의병 등 전북의 항일 운동으로 나타났다.
전주와 삼례, 그리고 정읍, 김제를 포함하는 호남평야 일대는 비옥한 토지로 우리나라 미곡 생산의 거점이 되는 지역으로,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일제에 의한 경제 수탈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일본 농업경영자들은 군산을 거점으로 옥구, 전주, 정읍, 익산, 김제 등 평야 지역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한 후 농장을 설립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적 수탈이 본격화됐다.
이때 떠오른 것이 전북의 의병과 항일운동이다.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를 위한 투쟁이자 몸부림이었다.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해 봉기한 의병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호남, 그리고 전북은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의병 운동이 적었지만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를 시작으로 한일신협약,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면서 호남은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호남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을사늑약 체결 후 최익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읍 태인 의병이다. 태인 의병은 전북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 의병이라는 의미를 갖고, 의병운동이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는 등 전국 의병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후 전북 지역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전북의 의병 수와 교전 횟수는 1908년 219회 교전, 의병 수 9960명, 1909년 273회 교전, 의병 수 5576명으로 1908년에는 전국의 1/4, 1909년에는 전국의 절반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북 지역 3·1운동은 3월 3일 천도교와 개신교 조직망을 통해 전주, 군산, 이리(현 익산) 곳곳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독립선언문이 배부되면서 시작돼 약 한 달 반 동안 지속됐다. 3월 4일 군산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일제는 물러가라, 조선은 독립했다”는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 시위를 전개했고, 그 뒤를 이어 전북도 14개 전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0일에 오수보통학교, 3월 15일에 고창보통학교, 4월 4일에 김제보통학교, 4월 18일에 줄포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많은 전북 출신 인물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각 교단에서 추천받아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은 3월 1일에 낭독할 독립선언문과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 통고서 등을 만들어 서명했는데, 전북 출신의 박준승, 백용성, 임규, 정노식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본격적인 '자치'의 시작
본격적인 '자치'라고 볼 수 있는 지방자치 시대는 제헌헌법에 명문화되며 개막했다. 전북도 자치의 역사는 대한민국 자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현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과정에서 전북이 전국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 지방자치제도는 1948년 제헌헌법 제8장의 지방자치 규정으로 명문화됐다. 그러나 당시 국내 질서 불안과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지방의원 선거를 하지 못했고, 1952년에야 기초의원 선거(4.25)와 광역의원 선거(5.10)가 각각 처음으로 치러졌다. 치안 문제로 당시 전북도 4개 군(당시 남원군·완주군·순창군·정읍군)에서는 선거가 연기되기도 했다. 이마저도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지자체장을 임명제로 바꾸며 중단됐다. 1972년 유신 헌법 부칙에 ‘지방의회는 조국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사실상 지방자치제 폐지를 선언하며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는 암흑기를 걸었다.
1961년부터 이어진 군사독재 기간 사실상 폐지됐던 지방자치는 1987년 민주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과 함께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다. 1988년 헌법 제118조 지방의회 설치에 관한 규정을 유보한 부칙을 폐지했고, 1990년 10월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단식을 계기로 지방선거가 추진됐다.
1991년 제4대 지방의회 선거를 통해 30년의 암흑기를 깨고 새 역사가 시작됐다. 1991년에는 두 차례 선거를 통해 광역·기초의원을 선출했고, 전북에서도 52명의 도의원을 선출, 임기에 들어갔다. 당시 단체장은 임명직으로 유지됐지만, 1995년 단체장도 선거로 선출하는 통합지방선거가 실시되면서 외형적으로 온전한 지방자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도 전국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의원들의 5분 자유발언(당시 4분 자유발언)을 처음 시작한 곳이 전북도의회라는 것을 아는 인물도 많지 않다.
아쉬움도 크다. 전북 출신 정치인의 경우 소석(素石)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등 전국에서 내로라했던 인물이 다수 포함됐던 곳도 전북이었지만 명맥은 이미 끊긴 상황이다. 소석의 현실 정치에서의 퇴장과 함께 호남의 정치는 광주·전남의 정치로 굳어졌다.
다만, 현재의 전북, 미래의 전북은 과거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소외와 낙후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자 전북특별자치도가 추진됐다. 전북 자치의 역사는 현재진행중으로, 전북은 새로운 변화와 비전을 품고, 새로운 출발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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