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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장이 떴다] 시골 어르신들의 설 나기 계획은⋯"몸 아파도 허야지"

고요한 완주 화정마을이 들썩이는 설 명절, 어떻게 보낼까?
어르신들 마음은 다 똑같은 법, "사랑 듬뿍 담아 장만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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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마을 전경

화정마을은 고요합니다. 오래 전 내려앉은 고요는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자동차 경적과 대화 소리로 가득 찬 도시와는 다르게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강아지·고양이의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정겨운 어르신들의 대화 소리도 들리지만 그것도 잠시 여느 시골 마을이 그렇듯 다시 고요해집니다.

"왔어요, 왔어. 설날이 왔어."

그래도 매년 두세 번은 매일 고요할 것 같은 화정마을 골목길이 시끄러워지는 때가 옵니다. 바로 설·추석을 비롯해 집집마다 중요한 날이면 잠시나마 고요가 깨집니다. 평소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던 아들·딸, 손자·손녀, 친지 등이 찾아오기 때문이죠.

매년 설 연휴가 오기 직전 주부터는 매일 점심 먹고 경로당에 모여서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도, 오후 2시만 되면 게이트볼을 치러 가는 할아버지들도 오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여기저기서 '달달달달' 트럭 시동 거는 소리도 들립니다. 장보러 가려고 준비하는 듯합니다.

"할머니, 날 추운디 어디 가시게. 할아버지랑 뭐 맛있는 거 잡수러 가셔?"

돌아오는 대답은 다 같습니다. "장보러 가야지!" 버스가 많지 않고 자동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인 시골 마을에서는 밖에 나가는 것도 일입니다. 할머니·할아버지는 시골 마을에서 시내로 통하는 읍내에 나간다고 한껏 예쁘게 꾸민 채 장보러 나갑니다. 두 시간 지났을까 화정마을로 트럭 한 대가 들어옵니다. 아까 장보러 가셨던 할머니·할아버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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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율례 할머니

"나 민생지원금 다 썼어!"

오율례(76) 할머니는 며칠 전 받은 완주군 민생안정지원금 30만 원을 하루 만에 다 썼습니다. 시아버지·시어머니부터 상할아버지·상할머니, 할아버지·할머니 차례 지내고 설 명절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 해서 먹여야 하기 때문에 부족하다는 겁니다. '청년 이장이 떴다' 취재진과 한창 이야기 중이던 할머니가 갑자기 손뼉을 치십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나 오징어 안 샀네. 그 늘어난 오징어 전 부치려면 사야 하는디. 나 인자 생각 났네."

민생지원금 탈탈 털어 다 썼지만 아직도 장을 다 못 봤습니다. 할머니는 "홍어·조기는 샀고 고기도 좀 샀지. 딸·아들 주려고 그렇지, 뭐. 그래도 설인디 맛있는 거 해서 맥이고 싸 줘야지. 안 그려?"라고 말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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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주 할머니

"이번에는 얼마 안 혀. 그냥 겉절이 조금 하고 꼬막이나 좀 무치고 전 부치고 말라고. 몸 아파서 더는 못 하겄어."

최은주(80)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취재진의 머릿속에는 백 개도 넘는 물음표가 떠다닙니다. '다 하시는 것 같은데⋯?' 몸이 안 좋아서 전처럼 많이 하실 수 없다고 하시지만 준비할 게 산더미입니다. 자식들 온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하냐고 하십니다. 할머니의 푸짐한 마음에 괜스레 웃음이 지어집니다.

할머니는 "나 그냥 얼마 안 샀어. 소고기 2근, 돼지고기 조금, 배추 3포기, 꼬막 조금. 떡국은 끓여 먹어야지 않겄어? 자식·손주들 온다는디 어떻게 안 혀, 안 그려?"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다 똑같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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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칠월 할머니

"그런데 어떻게 안 혀. 말이 그렇지. 먹을 건 조금 허야지 않겄어?"

다른 할머니는 놀러가신다고 자랑하십니다. 이칠월(90) 할머니는 최장 9일에 달하는 설 명절 연휴를 맞이해 자식·손주와 놀러가기로 했습니다. 취재진이 "그러면 이번에는 장만도 안 하시겄네?"라고 말하자 "그치. 이번에는 자식·손주들이 놀러가자고 하네? 그래도 집에서 먹을 건 좀 해야지. 겉절이나 좀 하고 전이나 부치지, 뭐∼"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설 연휴 1박 2일 여행만 갈 뿐 음식 장만 준비는 똑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진짜로 할머니의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몸이 아파도, 안 해야지 생각해도, 진짜 조금만 해야지 생각해도 오랜만에 집에 올 자식·손주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지금도 화정마을 할머니·할아버지는 장보러 나가시고 장만 준비에 바쁘실 겁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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