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색상환 보색잔상을 느끼게 할 때 흔히 빨강의 점을 보게 한 다음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한다. 이때 좀 전에 본 빨간 점의 형태와 같은 녹색이 보이면 정상이거니와 녹색이 보이지 않을 때를 적록색맹이라 한다. 색맹은 색상을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색각 이상이다. 의사들이 분만실이나 수술실에 들어갈 때 평소와 달리 녹색의 가운을 입는 것도 보색잔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붉은 피가 여기저기에 있는데 보색잔상에 의한 잠깐의 허상이라도 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육점을 백정이나 하는 짓이라며 천하게 여길 때, 누구나 꺼리는 일이라서 정육점 1년이면 집이 한 채라는 말이 있었다. 이 시기에 정육점을 개업했는데 장사가 아주 잘돼 많은 돈을 벌었던 한 남자에 대한 보고이다. 돈이 많아지다 보니 좀 더 쾌적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 받기를 원하며 큰 건물을 짓고 1층에 다시 정육점을 개업했다. 처음에 얼마나 동안은 단골손님들이 드나들더니 손님이 적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파리와 놀게 되어 몹시 초조했다. 더 큰 장소, 더 쾌적한 공간이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외지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장사가 돼요?라며 장사가 안되는 이유를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옷소매를 부여잡고 물으니 원인은 실내 공간의 색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흔히 말하는 베이지색, 아늑한 공간으로 느껴지기 위해 노랑 계열의 색채를 한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사러 올 때, 먼저 노랑 계열의 색을 무심코 감지한 다음 고기를 보니 노랑의 보색인 보라색이 고기가 썩어 보이게 하는데 어떻게 고기를 팔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색채에 무심하면 사업에도 지장이 있음을 말하는 보고서이다. 대개의 정육점은 채도 대비를 생각하여 흰 판에 붉은 불빛으로 고기가 더욱 신선하게 보이게 한다.
여기에서 색채에 관한 연구 보고서 중에서 두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그 첫 번째가 인테리어 색채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광부나 간호사, 군인들의 파병 등을 통해 국고를 채우고도 모자라 중동 붐이 일어나 노동자들을 파견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그때는 나쁜 의미로 중동 과부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한 중동 노동자의 사례다. 그도 가난이 싫어서 중동 노동자를 원했고 1년 계약으로 중동에 갔다가 1년을 다시 재계약하고 2년 만에 귀국했다. 김포 공항에서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아내는 보이지 않았고 동네 어귀에서도 볼 수가 없어 거의 미친 상태로 집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산송장이 다 된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귀 기울여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소화가 너무 안 되어 내과에 갔다 한다. 내과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서 혹시 우울증인가 모른다며 정신과에 가보라 하고 정신과에서는 우울증이 아니라며 다시 내과에서의 정밀 진단을 요구하다가 결국 신경성 위장병이라는 진단을 받아내고 약을 먹었으나 차도가 없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를 간호하면서 그는 집안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고 초상을 치르더라도 집안이 좀 밝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밝은 벽지로 도배를 하고 전등도 30촉짜리 백열등을 형광등으로 바꿔 집안은 밝게 하였다. 그랬더니 아내도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는 보고이다. 그때까지 아내가 살았던 집안은 주조 색이 커피색이었다. 또 한 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색잔상이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 먼저 보색이란 색상환에서 정 반대쪽에 있는 두 색상을 말한다. 노랑과 마주하는 보라를, 빨강과 마주하는 녹색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색상들은 서로 보색관계에 있다. 잔상(After Image)은 외부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그 감각 작용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상으로, 촛불을 보다 눈을 감아도 그 촛불의 형상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며 이 잔상을 이용한 것이 바로 만화영화다. 한 컷 한 컷을 그려 계속하여 넘기면 우리의 잔상 때문에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보자. 음식물이나 의약품은 대개 갈색이나 녹색의 병에 들어 있다. 비타민을 파괴시키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북창(北窓)의 방에 청색 톤의 도배는 더욱 추워 보이고 남창의 경우 황색 톤을 하면 우리는 나른해한다. 색은 또 고문에도 사용된다. 빨간 방에 넣어 놓고 금속끼리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는 고문 방식이다. 우리의 감각기관 시각, 미각, 청각, 촉각, 후각, 육감 중에 80%가 시각이고 그 다음이 7%의 청각이다. 나머지 감각 기관은 극히 미미하다. 신체를 구타하는 방법이 초기 단계에서는 흔히 사용되나 자기를 이원화시키는 사람에게는 안 통할 수도 있다. 즉 맞고 있는 자기와, 맞고 있는 자기를 바라보며 위로하는 자기로 이원화 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고문의 효과는 크지 않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하게 하는 고문 기술이 바로 색채를 이용한 시각고문, 그리고 병행되는 청각 고문이다. 두 가지 고문을 다 하는 것이 그리스 독재 정부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우리나라도 빨간 색의 고문이 도입되어 있었음을 당시 야당 정치인이 밝혔다. 하루를 지나니 눈을 감아도 빨간 색이 보여 운운 했던 것 같다. 고혈압 환자는 정말 견디지 못할 고문이었을 것이다. 옛날에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관절을 넣었다 뺐다 했다는 기록을 신문에서 본 일도 있지만 그 고문도 기초적인 고문이었을 따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스키부대의 군복은 흰색이며 사막 부대의 군복은 올리브색이고 정글을 누비는 부대의 군복은 노랑과 녹색이 얼룩진 정글복이다. 약속된 색도 있다. 빨강은 서시오. 녹색은 가시오, 황색은 조심 또는 준비하시오,이고 청색은 유럽, 황색은 아시아, 흑색은 아프리카, 녹색은 오스트레일리아, 적색은 아메리카인 오륜기하며, 빨간 기미를 띤 주황색은 신학, 그냥 주황색은 공학, 분홍색은 음악, 황금색은 이학, 청색은 철학, 자색은 법학, 녹색은 의학, 흰색은 문학, 흑색은 미학, 미술은 브라운 등은 서로 약속하여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이는 대학 졸업식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클레오 파트라 기껏 화장했다는데 변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간간이 볼 수 있다. 지금도 끔찍했던 기억은 옛날에 유행했던 고스트 화장법이다. 학교에서 보는 청순해야 할 여학생들이 입술을 비롯하여 눈두덩이 등을 까맣게 칠하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유행이란다. 화장은 타인에게 곱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변장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목적에 따라 다르게 바꾸는 것이다. 그러하니 고스트 화장은 화장이 아니라 유령으로의 변장이었다. 눈꺼풀이 두툼하다고 여기면 파랑 톤으로 칠하고 (반대로 눈꺼풀이 움푹 들어간 서양 여자의 경우에는 따뜻한 색을 선택하기도 한다) 볼에 따뜻한 느낌이 나는 연지를 찍고 입술을 붉은색 계통으로 칠하는 보통의 화장법은 얼굴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진출색과 후퇴색을 이용한 셈이다. 차가운 색은 후퇴해 보이고 따뜻한 색은 진출해 보이기 때문이다. 기껏 금발로 염색을 하고는 높은 채도의 노란색이나 빨간 윗도리를 입으면 금발이 아니라 녹이 슬어 보이는 것은 채도 대비를 잘 몰라서이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상품의 포장지를 검은색으로 하여 그 상품을 상하차하는 노동자들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명도 대비에 약한 것이고 건널목 차단기를 노랑과 검정의 빗금이 아니라 흰색과 빨간색으로 하면 멀리서도 잘 보일 텐데 하는 사람도 색의 명도와 채도에 무관심한 것이다. 목욕탕에서 문신한 사람들이 검은색 삼각팬티를 입고 거울 앞에서 몸매를 뽐내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창조주가 왜 대밭이나 긴 풀밭을 거니는 얼룩말이나 호랑이에겐 줄무늬를, 개구리에게는 풀색을, 두꺼비에겐 갈색을, 북극곰에게는 흰색을 주었는지를 한 번만 생각해 보자. 건물의 같은 방향이라도 흰색을 칠한 반쪽에는 고드름이 열리는데 검은색의 반쪽은 고드름이 안 열리는 것도, 북극이나 남극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물주머니는 항상 검은색일까도 생각해야 한다. 히로시마에 어마어마한 위력의 원자탄이 투하되었을 때에도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이 타버렸는데 흰색 계통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왜 형체를 보존할 수 있었을까?
장 제온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기원전 4세기 때의 화가 제욱시스가 포도송이를 들고 있는 소년을 그렸는데 새가 포도를 쪼려고 하였다. 그때 같이 있던 화가 아펠레스가 새들이 자네의 그림을 평가한다라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인즉, 제욱시스가 소년을 좀 더 사실적으로 잘 그렸다면 소년이 무서워 새가 감히 포도를 탐내진 못하였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에 대한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한다. 제욱시스가 아펠레스의 말을 듣고 그림을 어떻게 고쳤을까? 소년을 고쳤을까 아니면 포도를 고쳤을까? 다시 말해서 소년을 고쳤다면 소년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렸을 것이고 즉 고도의 기술력을 동원하였을 터이고, 포도를 고쳤다면 포도를 근사한 것에게서 벗어나 더욱 본질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여기서 미술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문학적 가치 탐구를 말하며 인간 내면의 생각, 정서, 느낌 등을 형태나 색채 등의 조형 요소를 통하여 시각적, 공간적, 조형적으로 표현해내고 그것을 이해하며 감상하는 활동 모두를 의미한다) 제욱시스가 소년을 수정하여 포도송이와 같이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에게는 어떻게 모방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고, 이와 반대로 포도송이를 다시 수정했다면 그에게는 무엇을 모방하는가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포도송이를 들고 있는 소년의 물질적이며 감각적 외양보다는 그 본성, 즉 참다운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 모방 개념의 핵심이며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치는 예술로의 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사람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모방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모방한 것에게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저서 「형이상학」에서 그가 말하려는 모방의 개념이 있다. 모방이란 결코 대상의 흉내나 고지식한 사실성이 아니고 그것의 미적 재현이다. 참고로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은 미의 본질을 사람의 감각 작용보다도 이성적 인식,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인 막스 쟈콥은 세상의 첫 번째 시인은 하늘은 푸르다라고 했고 그 후의 시인은 당신의 눈은 하늘처럼 푸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 먼 훗날의 시인은 당신 눈에 하늘이 보인다고 말했을 것이고 오늘의 시인은 하늘과 같은 당신의 눈이라고 감탄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하늘=당신의 눈이라는 등식이 하늘은 푸르다는 기본 시각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오늘을 알기 위해서는 어제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되어 왔음을 상기시키는 의도이며, 예술적 표현은 오늘의 것만 보고 난해하다거나 이해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술은 시대적 산물이고 현실의 거울이다. 밀레의 만종이 명화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그 시각 그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수공적인 재생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역사 속의 전통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통만 고집하는 것보다 전통에 의거하여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어려운 그림을 그리는 대명사로 흔히 피카소를 떠올린다. 그러나 피카소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시절에 살았더라면 모나리자를 그렸을 것이고 반대로 다빈치가 20세기를 살았다면 게르니카의 학살과 같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도회의 네거리를 갓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분명히 우리의 것이었음에도 보기에 어색하여 뒤돌아보는 경우와 같다. 우리는 흔히 세대차이라는 말을 한다. 한 세대를 30년이라 한다면 그 짧은 세월에도 우리의 사고가 다름을 말하는 것인데 하물며 몇백년이 지나도 우리의 사고나 풍습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하면 우리의 생각이나 풍습도 변한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발전이 아니라 변화라는 말을 사용해야 되는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눈으로 그림을 평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화가가 관객의 생소한 느낌을 책임지려고 해서도 안 될 말이다. 지나 온 세월을 인식하고 오늘을 봐야 비로소 하늘=당신의 눈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우선 잘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 그린다? 잘 만든다? 잘 꾸민다?에서 잘이라는 것은 기능인가 개념인가? 이런 것들을 수학 문제처럼 확실하게 갈라서 말할 순 없다. 그림을 딱 잘라 정의할 수 있을까? 미술은 인문학의 기초이며 자름 길이다. 그리고 인문학이란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그에 기초하여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실천적 행위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기에 다들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는 것이리라. 그림이 무엇이더냐는 김홍도의 질문에 신윤복이 답한다. 그림은 그리움입니다. 그리워서 그리고, 그리고 나니 또다시 그리워지는 것입니다라 답하지만, 이것 또한 그의 의견일 뿐이다. 마음을 그린다는 말도, 마음에 그린다는 말도 모두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반공승공멸공의 시대에 북한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렸던 윤이상 재독 음악가의 회상에 의하면 북한 교향악단을 지휘하려는데 연주가들의 기계처럼 정확한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교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한다. 기원전 이집트 미술처럼 획일적인 양식만을 요구한다면, 감상자들에게도 보고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통제한다면 미술이 인본주의라거나 인문학의 지름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추(醜)함이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도 벌써 오래되었지만 본래 아름다움이 미술의 본질이었다 하자. 아름다움은 아름이 앎이라 하여 한문 지(知)로 환원시켜 많이 알고 깨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아름을 한 아름, 두 아름으로 해석하여 아름을 내 것으로 풀이하여 아름을 내 것다움을 개성(個性)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면 되지 어떤 이론? 책은 왜 읽어?에서 잘은 기능이다. 즉 닮게 그리는 기능, 그 많은 기능 중에 오직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 전에 없던 새로움을 창조하고 발전시키고 융성하게 만든 사람이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새해부터 이승우 화백의 미술이야기가 연재됩니다. 이 화백은 중국 청도서울전주익산군산고흥에서 개인전 32회를 했고, 저서는 <미술을 찾아서>, <현대미술의 감상과 이해>, <아동미술>, <색채학>이 있습니다.
군산 출신 배우 김수미 씨 별세⋯전북 애도 물결
"다 같이 다 함께"… 원불교 전북교구 교단 기틀 정비, 새로운 도약 준비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금산사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겸손의 중요성
전주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 ‘행복한 동행 문화축제’ 연다
전북시인협회장 후보에 이두현·이광원 최종 등록
따뜻한 동심 담긴 그림 세상에서 다시 만나다
달빛 아래로 흐르다, 10년 우정으로 빚은 시화 여정
부안여성작가 13명, 30일까지 제9회 단미회展 ‘Art Memory’
불기 2568년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 봉축 행사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