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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 1

영화 <벤허>의 시사회에서 갑자기 기도하는 몸짓으로 “신이여! 제가 정말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라며 스스로 감격했다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 윌리암 와일러는 <벤허> 같이 스펙터클한 영화 말고도 로마의 휴일 같은 아기자기한 영화도 곧잘 만들었다. 이 와일러 감독이 미술품을 위조하고 탐정도 등장시키는 재밌는 영화 <Now To Steal Million>을 오드리 헵번과 피터 오툴 주연으로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달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바 있다. 여기에서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가 미술품을 위조하는 사람인데 낡은 캔버스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고흐의 먼지라는 등의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며 미술품 위조자들도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그 아버지가 위조한 마담 세잔이 엄청난 가격으로 경매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에도 옛부터 ‘나까마’라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동양화는 거의 위장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 약 2000여 점을 위조한 영국의 톰 키팅도 위조 미술계의 큰 별이고 이름 잊은 모나리자를 6점을 위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희대의 위작자는 여러분도 잘 아는 미켈란젤로였다.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에 주로 이루어진 그의 위작 행각은 교묘했다. 위작품을 만들고 땅 속에 묻어 세월의 흔적을 만든 ‘잠자는 에로스’라는 조각품을 당시 교황의 조카인 라파엘레 리아리요 추기경에게 팔아넘겼다. 여기서 잠깐, 땅을 파고 묻었다는 행위를 벤치마킹한 일본인이 있었으니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고작 3만여 년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일본 땅에서 57만 년 전의 유물을 찾아냈다는 발표가 사기였음을 마이니치 카메라가 잡아낸 것이다. 본인이 땅에 묻고 발굴하는 모습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일본에는 선사시대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역사적인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선사시대의 유물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파는 쇼를 하다가 적발된 일이 2001년도에 있었으나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할복을 했다는 후속 기사는 없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사기극이어서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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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4 17:13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사상 처음으로 법정에 간 화가와 평론가 2

두 번째 쟁점은 ‘무엇을 그렸느냐.’다. 풍경화라고는 하는데 “이것이 왜 풍경화냐?”, “어디를 그린 것이냐” 등의 질문이 있었다. 휘슬러는 대답한다. “이 풍경화는 크레몬 공원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어두운 공원을 배경으로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어 또 비아냥거림의 목소리가 나온다. 어둠 속에 금물을 뿌렸던 이 그림을 보면서 “떨어지는 불꽃의 구성이나 색채, 세부적 표현들이 풍경화라기보다는 배열의 실험에 불과한 것”이라는 혹평에 다시 “이 그림은 검은색과 금색을 이용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음악으로 치면 야상곡 같은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음악은 가사 없이 느리고 빠르고,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곡만 듣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유독 미술에서만은 가사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고 또 휘슬러가 안타까운 것은 같은 류의 그림을 그리던 터너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며 본인에게는 엄격한 고전의 풍경화의 원칙을 열거하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휘슬리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휘슬리는 막대한 재판 비용으로 살던 집까지 팔아야 하는 가난뱅이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러스킨에게는 휘슬리에게 손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는데 금액은 1파닝(한화 10원)의 웃지 못할 것이었다. 이 재판으로 휘슬러는 파산하고 러스킨도 우리들 말로 쪽팔려서 옥스퍼드의 석좌교수 자리에서 퇴임하였다. 그러나 휘슬러는 나중에 이 불친절한 그림, 즉 야상곡을 800기니(한화 약 1억 2천만 원)에 팔 수 있었다. 누구의 승리인가를 따지기 전에 꼭 한 번은 꼭 있었어야 할 재판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여기에는 사진술의 발명도 큰 역할을 담당한다. 1839년에 발명된 다게레오 타이프로 거의 인물사진을 독식했기에 휘슬러는 잘 나가던 초상화가에서 다른 그림으로 전향을 해야 했고 풍경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실험적으로 비구상까지를 실험하였으니 미술사에서는 이득인가 실인가는 여러분이 따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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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6 16:3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사상 처음으로 법정에 간 화가와 평론가 1

이 희귀한 사건은 1877년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제임스 에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ller, 1834.07.14. - 1903.07.17.)라는 미국인 화가이며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화가의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작품 하나가 일으킨 세기의 재판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당시 옥스퍼드의 석좌교수이며 직접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권위의 화신인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02.08.-1900.01.20.)이 “나는 예나 지금이나 런던 토박이들의 매우 건방진 행동을 많이 겪어봤다. 그러나 대중의 면전에 물감 통을 던져놓고 200기니(한화 약 3000만 원)를 요구하는 어릿광대를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면서 휘슬러를 어릿광대에게 비유했다. 당시의 러스킨은 화가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한 마디에 화가의 그림 값이 달라지고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본인이 자연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야 한다는 신념의 풍경화가이기도 했다. 당시의 휘슬러는 영국이라는 타국에서 ‘흰색 교향곡’이나 ‘회색과 검정의 조화 제1번’ 등의 초상화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는 40대의 화가였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먹고는 살 수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어릿광대가 되어버린 휘슬러는 러스킨을 명예훼손으로 런던 법정에 고소하고 드디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1877년 12월에 열린 이 재판의 첫 번째 논쟁은 그림을 얼마 만에 그렸냐는 것이었다 일을 한 시간의 장단에 따라 성실한 정도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러스킨의 변호인은 최대한 기분 나쁘게 “당신은 야상곡을 해치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라고 물었다. 순진한 휘슬러는 “하루요, 아니 그 이튿날도 손을 조금 봤으니까 이틀이요”라고 대답하자 “고작 이틀에 200기니?”라며 “자고로 돈은 일한 만큼만 벌어야지. 쉽게 그린 그림에 비싼 값을 받는 것은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이제는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휘슬러는 “그것은 평생을 통하여 얻은 내 지식의 대가이고 평생을 키워 온 예술가의 감각”이라며 항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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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9 16:5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녀는 항상 엉덩이가 뜨겁다 - 뒤샹 2

1919년에 뒤샹은 파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던 모나리자의 싸구려 복사판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려 넣었다. 이 행위는 원작 1점주의의의 고급화된 예술의 사대주의를 비웃으려는 행동이었으니 존경받는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냉소적인 면은 그 뒷면에서 더욱 고조된다. 즉 뒤샹은 자기가 수염을 그려넣은 복사판의 뒷면에 ‘이것은 1919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L,H,O,O,Q라는 오리지널 복사판임을 증명함’이라고 써 넣었다. 그런데 이 L,H,O,O,Q를 프랑스어로 계속하여 읽으면 엘아쉬오오퀴(Elle a chaud au cul)로 발음되어 “그녀의 엉덩이는 항상 뜨겁다”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뒤샹은 “나는 슬픔을 띤 이 여자가 콧수염과 턱수염을 붙이면 대단히 남설적이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사실은 다빈치의 동성애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회상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나중에는 다른 복사판을 그냥 내걸고 ‘다시 수염을 깎은 모나리자’라는 것을 발표하여 마치 수염이 있는 모나리자가 원본이었던 것처럼 알려지게 하는 모독을 다시 가한다. 오늘날 퍼포먼스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벤트, 그 전으로 또 거스르면 해프닝이다. 해프닝이라는 행위를 맨 처음 시도하여 오늘날의 해프닝을 보편적으로 만든 사람, 피카소가 죽은 뒤 이 시대를 움직이는 최고의 화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뒤샹 이후와 이전으로 나눌 만큼 그림의 영역을 한없이 많이 확장한 사람, 로젠버그 등에 의하여 네오다다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다에 네오는 없다”라는 조용한 말로 다다의 일회성과 시대성을 이야기하며 조용히 체스를 두며 살았던 사람, 백남준의 행위를 이끌어낸 사람, 그는 진정한 불멸의 아웃사이더 사상가였다. 그의 작품 제목만 봐도 그가 어떤 사상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풀이하기 싫다며 회화를 포기한 뒤샹의 작품 제목으로는 ‘게단을 내려오는 나부’, ‘처녀에서 신부로의 여행’, ‘급속한 니체에게 옆으로 잘린 왕과 왕녀’, ‘샘’, ‘독신자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진 신부’, ‘물의 낙하’, ‘조명등 글라스가 주어지면’ 등이 있다. 특히 ‘조명등 글라스가 주어지면’은 그때까지의 미술 영역에서는 기상천외할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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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3 16:1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녀는 항상 엉덩이가 뜨겁다 - 뒤샹 1

1917년에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는 R Mutt, 1917이라고 사인된 양변기 하나가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다. 그것은 신성한(?) 예술 행위에 대한 모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너무나 당연하게 운영위원들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변기는 누구에 의해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실용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뒤샹이 뭔가를 말하기 위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작품 하나가 그 자리에서 철거되었다고 해서 사건 그 자체마저 무마되고 잊힐 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의 신호탄에 불과했을 뿐이다.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로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일군의 예술 집단은 늘 엉뚱한 사건으로 기존 예술에 대하여 가급적 충격적인 방법으로 모욕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우리는 그들을 다다이스트라 부른다. 고인 물은 이내 썩고, 안이함은 모든 기능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새로운 가치관을 위해서는 막혀있는 물꼬를 터야 했으며 당연하게 그 무기력에 대해 충격 요법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무목적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 대한 갈증이고 위선과 권태에 대한 부정의 몸짓이며 가치관의 재발견을 위한 순교자적 행동이기도 하다. 기존의 의미를 부정하고 그 무의미함을 다시 부정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행위마저 부정해 버린, 그러나 그 초토화된 폐허 위에서 다시 싹이 터올 새로운 창조를 예상한, 그리하여 중단됨으로써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던 예술 운동이 바로 다다이즘이었다. 일반적으로 예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우겨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예술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행위는 절대 예술이 아니라는, 즉 반예술을 표방하고 나섰다. 자기들이 하는 짓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예술을 부정한다는 의미의 또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에 참가한 문화의 테러리스트들 중에서도 두목 정도에 해당하는 뒤샹의 짓거리나 논리는 더욱 비상하기만 하다. 특히 지고한 미술이라 평가되는 작품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는 더욱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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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5 16:4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런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 - 브랑쿠지 4

“나의 생애를 뒤돌아 보면 기적의 연속이었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대다수의 루마니아 농민들과 함께 그 새의 기적을 진심으로 믿었으며, 이는 차츰 공간(대기) 속의 새에 접근해 갔다. 공간(대기) 속의 새는 이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는 당연하게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기계 취급을 하여 관세를 부과시켰으니 소송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전문가의 자격으로 감정을 의뢰받은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에이켄과 토마즈 존즈는 모두 “이것은 예술 작품도 조각 작품도 아니다”고 증언하는 것이었다. 원고 측의 증인으로 법정에 온 영국의 조각가 엡스타인마저 법관의 “이 작품이 새를 표현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작가가 그것을 새라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동의하겠습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이 작품에는 새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몇 곳 있습니다. 이를 테면 가슴을 펴고 있는 새의 새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는 미흡한 대답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관은 “그러면 배의 모습을 연상한다거나 초승달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라고 응수하자, 피고인의 변호인은 즉각 “그렇다면 물고기로도 보이고 호랑이로도 보이겠군요”라고 야유하고 다시 “당신이 만약 사냥을 하는 중에 그 같은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라며 비꼬는 것이었다. 2년 동안 계속된 이 재판은 결국 브랑쿠지의 승리로 끝났다. 브랑쿠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형적으로 만들어진 새가 아니라 새라는 존재가 가지는 본질, 즉 비상이었다고 말이다. 사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내 평생을 걸고 비상의 본질을 추구하여 왔다. --- 나는 것,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파리에 와서 조각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르네상스 이래 최고의 조각가인 로댕에게 그의 조수로 추천한 친구들에게 “거목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해”라고 이아기했다.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로댕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결국 그도 나와 같은 고집쟁이군“이라 말하였다 한다. 20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로댕과 중반까지 살았던 브랑쿠지는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각 다른 개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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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29 16:1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런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 - 브랑쿠지 3

뉴욕의 세관이 그의 작품인 대기(공간) 속의 새가 새를 표현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공업기계의 부품이라고 간주하고 210달러의 관세를 부과시켰기 때문이다. 브랑쿠지는 하는 수 없이 일단 그 관세를 지불한 후 즉시 세관을 상대로 부당 징수의 소송을 냈다.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의 조국 루마니아에서 전설의 새로 알려진 마이아스토라를 먼저 알아야 한다. 브랑쿠지는 대기(공간) 속의 새가 만들어지기 전인 7년여 동안 대리석이나 청동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마이아스토라의 연작을 적어도 7점 정도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 새는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것은 온순한 왕자를 온갖 위험이나 악에서 지키고 마침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고난에 처했을 때는 거기에서 신뢰를 희생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 브랑쿠지는 루마니아의 농민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새로 숭앙받고 있는 이 새를 처음에는 꽤나 구상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봉황새처럼 마이아스토라는 현존하는 새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반 새와 흡사하게 표현되었지만 나중에는 그 신비감을 표출하기 위하여 점차 추상화되었다. 일반적인 새의 모습이 아니라 ‘새의 비상’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나중에는 ‘새’라는 구체적인 명사보다 ‘비상’이라는 추상 명사에 더 접근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이 성스러운 새의 기적이라는 것에 대한 표출까지 갈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그가 직접 이야기한다. “나는 마이아스토라가 머리를 높이 치켜드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포즈가 자만이나 교만이나 도전을 암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비로소 비상에의 에너지를 속여 감춘 이 포즈를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즉 브랑쿠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새의 모습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의지에 있었으며 그보다 더 신비한 ‘기적’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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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22 16:3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런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 - 브랑쿠지 2

그때의 그는 이미 아모리 쇼(The Amory Show)와 보자르의 국전 살롱 도튼느 등을 통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양치기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마니아의 조그만 마을에서 양떼를 몰며 주머니 칼로 나무에 그림을 새긴다거나(조각) 겨울이면 눈으로 설상을 만들고(소조), 읽고 쓰는 것마저 혼자 익혔던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자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부카레스트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창시절의 브랑쿠지는 피카소처럼 그 미술학교의 최우수 학생이어서 모든 공모전에서 메달과 상금을 독차지하여 그 당시 자기 나라의 전위적인 화가들을 매료시켰으나 좁은 환경에 한계를 느끼고 보따리를 꾸려 길을 떠났다. 때로는 별을 이불 삼아 노숙을 하면서 파리를 바라보고 무조건 걸었다. 그러다가 병을 얻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류네빌에서 머무르고 있는 사이에 파리에서 그 소식을 들은 루마니아인 친구가 2루이를 보내주어서 마침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마침내 1904년 7월 14일, 지칠대로 지친 그는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은 나중에 그가 돈을 벌었을 때 그의 유일한 사치가 “편안한 여행”이었을 정도로 힘들고 길게 느껴졌다. 동료 화가인 수틴과 어울려 영화를 본다거나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루마니아의 노래를 부르고 집시 같은 옷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다가는 보비노에 가서 이본느 조르주나 다미아의 노래를 듣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다. 여성들에게 친절하기는 했어도 이성문제가 사건화되거나 밖으로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의 작업실을 드나들던 친구들은 그가 매우 풍부하고도 다양한 애정생활을 즐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문난 호사벽은 여행이었다. 이 목신과도 같은 루마니아의 은자隱者는 모든 기차와 선박의 시간표를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1926년 브루머화랑의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대기(공간) 속의 새라는 브론즈 작품 때문에 발생한 뉴욕 세관과의 재판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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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5 16:1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런 새를 본다면 총으로 쏘겠습니까? - 브랑쿠지 1

미켈란 제로가 클레멘트 7세의 주문으로 메디치가의 예배당과 묘당의 건축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그 안에 줄리앙 상과 형 로렌조 상을 만드는데, 그들의 모습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켈란제로 자신의 이상과 고뇌에서 만들어진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본모습과 닮지 않게 하느냐는 질문에 “앞으로 10세기만 지나 보세요. 아무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요.”라고 되쏘았던 적이 있었다. 이 말은 수세기 후에 브랑쿠지에 의하여 다시 해석이 된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브랑쿠지 자신을 역사적인 조각의 거장들과 비교하면서 존경을 아끼지 않는 숭배자들에게 “그러지 마. 그 작품들은 밥벌이로 만들어진 것이야. 젊은 시절의 나 역시 그 모든 시간을 밥벌이와 해부, 그리고 모방이나 재현 속에서 손쉽게 했지. 그러나 나 스스로는 독창적이라는 생각 속에서 일을 했지.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부끄러웠어. 묘지의 비석을 위하여 한 쌍의 부부를 닮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계속 깨닫게 된 거야. 그것 보다도 서로 사랑했으나 이제는 땅 속에 같이 묻혀 있을 모든 부부와 닮은 어떤 것을, 그 영원을 표현해야 했다는 말이지.” 이러한 그의 작업실과 가슴속에는 “네가 예술가임을 잊지 말아라. 신처럼 창조하고, 황제처럼 주문하고, 노예처럼 일하거라”는 좌우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즉 자기 혼자 주문만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황제처럼 마구 주문하고,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하는 노예처럼 일을 하고, 이 세상을 만든 신처럼 오묘하게 창조하라는 것이니 작가의 좌우명 치고는 너무나 철저한 것이어서 차라리 무서움이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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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8 17:5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예수는 사기꾼이다? - 프란시스 피카비아 3

그는 지독한 망나니에 변덕스럽고 돈을 물 쓰듯하며 자랐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것인지 불과 15살에 그린 그림 하나를 아버지가 몰래 살롱전에 출품하여 그것이 전시장에 걸리고 촌평까지 받았으니 대단한 성과였다. 어디 그뿐인가. 돈이 떨어지자 자기 아버지가 수집한 그림 중에서 3점을 묘사하여 진품과 바꿔치기 한 후 진품을 팔아 용돈으로 써도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니. 화가로서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8살의 나이로 남의 유부녀와 스위스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하고 나서 아버지의 도움이 끊기자 호숫가의 조약돌을 그린 풍경화를 그려 몽블랑 역에서 기념품으로 팔아 꽤 많은 생활비를 충당할 수도 있었다. 28살까지는 얌전하게 인상주의식의 그림을 그려 오스만화랑에 넘기니 물질적인 애로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보헤미안 기질이나 외조부의 영향, 또는 아폴리네르와 브락크와 나눈 토론의 영향으로 마음은 이미 추상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그리려 하였다. 마침내 추상 회화의 아버지라는 칸딘스키보다 1년 먼저 카우츄(고무)라는 추상화를 그려 인상주의에 대한 고별을 고하니 오스만 화랑의 지배인 당통이 그 콧대를 꺾기 위하여 그 화랑에서 소장하고 있던 피카비아의 그림 99점을 경매시장에 보내 버렸다. 그러나 그 악의에 찬 공격도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시장에 나온 그의 그림은 곧잘 팔렸고 그의 콧대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더구나 물질적인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넘치게 갖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 외에도 3가지 유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숙부와 부친, 조부의 유산까지 상속 받음으로 해서 그는 20년간 남프랑스의 성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친지들의 힘으로 쿠바에 당밀을 사러 간다는 모호한 구실을 붙여 군대를 빠지고 뉴욕에 들렸다. 영어라고는 예스, 노 밖에 몰라도 불어 강사를 하며 밥벌이를 하는 뒤샹과 합류하고, 곧이어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 뉴욕의 다다를 전개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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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1 16:13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예수는 사기꾼이다? - 프란시스 피카비아 2

다다는 여러분의 희망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천국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우상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영웅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종교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예술가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다다는 여러분의 정치 지도자처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사람들의 이성적인 사기술을 파괴하고,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질서를 재발견하려는 음모를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도 ‘여러분보다 더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모호하게 처리해 버리고 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뒤샹과 더불어 주인공 역할을 떠맡은 피카비아는 나폴레옹처럼 작은 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거만스럽게 몸을 젖혔다. 가슴은 튀어나오게 한껏 부풀린 허풍스러운 모습으로 골목마다 마치 앵두나무 밑에서 앵두를 줍는 것처럼 쉽게 미인들을 사귀어 데리고 다녔던 사내다. 뉴욕에선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을, 론느 강 계곡을 내려가면서는 우연히 만난 시골 유부녀를 쉽게도 사귄다. 겨우 18살에 주루날이라는 잡지 이사의 부인을 빼앗아 제네바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전과도 있는 사내다. 그는 파리 주재 쿠바 공사관이던 아버지와 우산 제조업자의 딸로 부유하게 지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는 미술이나 문학에 관심을 가진 교양 있는 분위기의 집안이었다. 다궤르(은박 사진술의 발명가)의 친구인 그의 외조부는 미술에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미술이 현실의 표현 수단으로써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미술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자기의 손자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 외조부는 “너는 어떤 풍경을 사진 찍을 수 있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형상만은 못 찍는다”고 말하곤 했다. 훗날 피카비아는 그 말에서 광범한 의미들을 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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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5 16:2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예수는 사기꾼이다? - 프란시스 피카비아 1

술과 마약만이 전부이다. 전통이고 정상이라는 낱말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혼돈의 탁류가 온 세상을 덮고 있는 듯하다. 쟝 콕토는 변기 속에 들어 있는 물에 술을 타서 권하고, 뒤샹은 성기에 가짜 수염 하나만을 달랑 달고 춤을 추며 결혼식을 치른다. 발레 치마는 여인의 머리에 두건처럼 둘러지고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을 깎는 질레트 면도기가 신문 광고를 장식하며, 호모 섹스가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오스카 와일드가 선정한 시대의 중요한 두 여성 ‘퀴리 부인과 샤넬’ 중의 하나인 샤넬은 짧은 머리, 가슴과 소매가 없거나 짧은 치마를 유행시키고 정숙해야 할 여인들의 잘 다듬어진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가 끼워져 있다. 못 사는 사람들이 더욱 경멸되고 돈이라는 것은 오직 쾌락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축제, 젊음, 쾌락, 열광, 도전, 그리고 환멸, 불안, 회한 등의 낱말만이 존재한다. 1929년 노아이유 자작 내외에 의하여 전통적인 복장을 하지 않도록 권유받은 축제에 참석한 초대객들의 모습을 보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알루미늄 가방 껍데기, 깃털이나 짚으로 둘러쓴 옷, 심지어 모리스 작스 같은 사람은 수 킬로그램에 달하는 조약돌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오기도 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화가인 쟈크 비용과 조각가인 레이몽 뒤샹을 형으로 두었고, 회화보다는 문학에 더욱 심취해 있던 마르셀 뒤샹은 취미 삼아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그림을 배우고 몇 점의 인상주의식 그림을 그것이 어떻게 그려지는가 보려고 제작해 보고는 인상주의를 한물 간 민속자료쯤으로 간주해 버리는 오만이 된다. 그런 냉소적 상황에 매료당한 피카비아가 나중에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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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8 18:1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아듀 루시 - 줄스 파스킨 2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였다. 이에 이미 17살의 나이에 독일의 짐플리치시무스(Simplizissimus, 1899-1944까지 발행된 뮌헨의 정치풍자 주간지)에서 그를 뮌헨으로 불러들였고, 20살에 이미 충분한 돈과 명예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마약으로 뼈저린 후회를 부르기 시작했다. 1905년, 파리에 왔으나 그 잡지사와의 관계는 계속되어 경제적으로는 아쉬운 것이 없었다. 향락에 싫증을 느낀 그는 젊은 장식미술가인 에르민 다비드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내를 모델 삼아 일과 사랑에 빠져 방랑은 잠시 멈춰졌다. 1914년, 줄스 파스킨은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미국으로 가서 뉴욕, 하바나, 뉴올리언스의 어두운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튀니지를 거쳐 1920년 파리에 도착한 후 1930년 죽을 때까지 클리슈 가에서 어느 여가수가 경영하던 여관 옆에 화실을 얻어 술에 취해 살며 다시 환락을 찾아 희롱하는 광란의 시대를 보냈다. 돈은 끊임없이 잘 벌었어도 화실에는 볼품없는 긴 의자와 여행 가방, 약간의 화구와 욕조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거리의 여자, 할렘 취미를 느끼게 하는 흑인 여자와 음흉하게 생긴 흑인 남자, 집시들, 속살이 비치는 속옷 바람의 통통한 여자들, 우울한 가난뱅이 가수들, 트럼펫을 부는 쿠바인, 유태인 등. 온갖 선정적인 여자들과 방탕한 남자들로 들끓었다. 그는 거의 매일 밤을 이중 10~15명의 손님과 저녁을 나누었고, 토요일은 일대에서 축제를 벌였다. 그 일당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몽파르나스에서 몽마르트르로 나중에는 브이 드 브로고냐에 있는 세느강 연안의 사창가로 긴 행열을 이었다. 1930년 6월 20일,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날을 지샌 다음 날 아침 그는 욕조 속에 앉아 동맥을 그었다. 그러고도 빨리 죽지 못해서 흰색의 긴 비단 목도리를 욕실의 문에 매달아 허망한 삶을 서둘러 마쳤다. 그리고 피가 떨어지는 손가락으로 벽에, 그 옛날 그의 환희였으며 고통이었던 여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듀 루시, 바로 그 전날 밤 그는 자신에게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는 계약을 맺었다. 베른하임 화랑은 그에게 성城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45살의 파스킨은 ‘산다’는 것에 너무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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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1 17:09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아듀 루시 - 줄스 파스킨 1

헤밍웨이, 피츠 제랄드,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유트릴로, 샤갈, 브랑쿠시, 기슬링, 수틴, 파스킨, 브락크, 트리스탄 짜라, 만 레이, 후지타, 데스노스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뿌듯할 만큼 유명한 사람들, 혹은 유명해질 사람들이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옹기종기, 그렇지만 격렬하게 모여 살았다. 세기 말과도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즐기며 1950년대의 명동처럼 그렇게 살았다. 보헤미안 혹은 에뜨랑제 예술가들, 그들이 살아가는 단면을 당시의 키키라는 여인의 회상을 통해 보면 도무지 뒤죽박죽이다. 키키라는 여인이 유트릴로 앞에서 포즈를 잡고 모델을 선 뒤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서 그림을 보았다. 그랬더니 시골집 한 채가 그려져 있었다거나 거리에서 텀블링을 하며 자신을 홍보하기에 바빴던 후지타라는 일본인 화가가 3000명의 모델을 그렸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로부터 키키가 모델을 서러 와서는 이젤을 빼앗아 후지타의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는 오히려 후지타에게 모델료를 받아 갔다는 등, 심지어는 위에 열거했던 거의 모든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20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약속했다는 식으로 전혀 정상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쉽게, 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이루어지던 그때,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 그 에콜 드 파리에 뒤늦게 어느 날 홀연히 파스킨이 나타났다. 파스킨은 넉넉하게 돈을 벌었음에도 오랜 방랑의 언저리에서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고독과 허망, 그리고 비애의 그림자를 끌고 이 저주받을 회오리의 한가운데로 끌어당겨진 것이다. 서부 영화의 감성 어린 주인공처럼 검은 눈에 검은 옷, 검은 양말, 검은 모자에 검은 구두까지를 모두 검은색으로 감싼 그는 스페인계 유대인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이탈리아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루마니아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다국적인 방랑자로서 모든 나라말을 묘한 악센트로 다 말할 수 있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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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4 17:0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나는 엉덩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2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하여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일군의 화가들을 우리는 ‘에콜 드 파리’라 부른다. 대표적으로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이 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김창열, 남관, 이응노, 권옥연, 이성자, 손동진 등이 있다.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다시 이주해 간 몽파르나스 거리에서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웩웩거리며 발악을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예술론을 이야기하며 굶고 취하고 혹은 값싼 정어리 통조림을 나눠 먹어가며 추위에 떨었을 것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경우에는 조각을 하기 위해 남의 공사장에서 주춧돌을 훔치고 하다 만 돌을 다시 가져다 놓고 하던 시절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기품이 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어느 날 귀족 부인에게서 혼자만 초청할 수 없으니 모두를 초청한 가운데 현관부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림만을 걸어 놓고 그에게 간접 구애를 했다. 이후 그 부인과 잘 지내던 어느 날 그 귀족 부인이 낙태 수술을 위해 독일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그 부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네가 감히 천재의 씨를 지워?”라고 할 만큼 자존심이 강했고 그중 제일 주정뱅이였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가 죽기 며칠 전 동료 화가인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며 역시 화가인 수잔 발라동을 찾아가 그녀의 품에 안겨 울면서 유대인이 부르는 죽음에 대한 기도의 노래를 부르던 것이 그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다. 인간의 그 슬픈 정념만을 관조한 방랑자이면서 기품 있는 교양을 간직한 그가 르느와르 화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관능적인 그림 앞에 선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나는 이 엉덩이가 탐스러워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이 그림을 그렸지”라는 자랑에 단 한 마디로 쐐기를 박아 버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선생님, 나는 엉덩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에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전기 영화에서 잔 에뷔테른으로 하여금 눈물을 가득 머금고 “사랑이 뭔지 아나요? 진정한 사랑! 그런 사랑을 해보셨나요? 영원히 비난받아야 할 사랑을요. 난 해 봤죠”라는 독백을 하게 한 영감을 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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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7 16:34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나는 엉덩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

그냥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옛날에 그들을 알기 시작했을 때 가끔---. 마르틴 하이데거나 이마누엘 칸트는 그 이름부터가 철학스럽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인스러우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화가스럽다는 생각. 그림을 보다 보면 머리가 타원형이고 목이 길어 괜히 노천명을 연상케 하는,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을 다시 정념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약간 기형적인 여인들을 볼 수 있다. 대개는 눈동자 속에 동공은 없고 파란색만 칠해져 있을 뿐이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프랑스인의 얼굴에 나의 조국 이탈리아의 파란 하늘을 그립니다.”라며 맛깔스럽게 응수하던 사내.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보다는, 그들의 자질구레한 일상보다는 다만 본연의 생명력만을 그리려던 사내,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그 엄청난 정념의 비애를 그리려던 사내, 가슴 저리게 슬픈 현실 속에서도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각만을 고집하던 사내, 시를 좋아하던 얌전한 귀공자에서 술주정뱅이 탕자가 되어 그 천재를 펴기 시작하던 사내, 36살의 나이로 생을 반납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잘 생겼던 사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을 등지고 이국 땅 프랑스의 자선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던 잔느 에뷔테른느에게 “우리는 정말 한 치의 틈도 없이 사랑했었지”라는 잔인한 유언으로, 정말 한 치의 틈도 없이 영생에서의 사랑을 위해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하게 한 사내. 그래서 그의 꿈을 이뤘고, 자신 또한 죽어서 비로소 불멸의 화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사내, 그 둘이 같이 묻힌 무덤의 묘석에는 이탈리아 말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드보로노에서 태어나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바야흐로 영광에 쌓이려 했을 때 죽음이 그를 빼앗아 갔다. 잔느 에뷔테른느. 1898년 4월 6일 파리에서 태어나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헌신적인 반려자였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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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0 16:5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또 다른 사람 피카소 - 4

그의 심부름으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같이 이탈리아에 갔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여자 잔느 에뷔테른느가 그를 만나기 전날 밤, 살아있는 신을 만난다는 감격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면회가 거절되었다는 일화 등에서 더욱 당시의 모습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친구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도 마찬가지다. 유태계 이탈리아 화가로서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피카소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갑자기 이탈리아에서 전시 계획이 생겼으니 어디에 가서 내 그림들을 선별해 그림을 이탈리아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 가서 잔느 에뷔테른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다. 그리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혼자 피카소를 만났을 때, 그 방에는 힘찬 말의 소묘가 있었다. 말은 에드가 드가라는 화가가 전유물처럼 많이 그린 것 아닌가? 그래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물었다. “저것은 드가 선생의 것인가?” “드가같이 계집 같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힘찬 데생을 할 수 있겠나? 그것은 대 피카소 것일세.”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만들고 이상한 취급을 받을 때 기욤 아폴리네르의 입체파 화가들이라는 책으로 활성화되었을 때, 거의 모든 화가들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그릴 때의 일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도 계속 시도해 봤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아 고민을 할 때다. 피카소에게 “모든 사물을 그렇게 봐야 하나?” 대답은 너무나 피카소다웠다. “누가 그래? 나는 벌써 끝났어.” 사진작가 데이비드 덩컨은 피카소의 허락을 받고 그의 집에서 며칠 묵으며 그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빼라고 하셔도 됩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아니 무슨 말을 하시오? 당신이 본 대로 나를 찍은 것이고, 그러니 이 사진들은 모두 진실 그대로지요.”라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사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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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3 16:48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또 다른 사람 피카소 - 3

‘내 귀는 소라껍데기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시로 유명한 시인 장 콕토가 방문했을 때, 그는 아프리카 악기인 미림바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두드리고 있던 미림바를 장 콕토에게 넘기자 장 콕토는 전문가답게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그는 “아하! 예상했던 대로군. 당신에게도 전혀 음악이 없어.”라며 낄낄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 콕토가 음악적인 지식같은 것은 모두 버리고 아무렇게나 두드리기 시작하자 “그건 좋아. 참 좋아.”라며 다시 낄낄대는 것이었다. 이 일화는 그가 규격을 위한 규격을 싫어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음악가 모리스 라벨과 친구이고 젊은 시절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도 같이 일한 적이 음악을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이어서 전통 음악에 대해서 아주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명배우 게리 쿠퍼와 우정을 나누고, 게리 쿠퍼가 그 우정의 징표로 보내 준 하얀 카우보이 모자와 자동 권총 콜트 45를 꺼내 깡통을 박살내고는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쉽군"이라며 으스대다가 멕시코의 상스러운 노래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살아있는 신이라 여겨 외경심에 가득한 기자의 “취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나의 부인 재클린과 벌거벗고 탁구를 치는 것”이라며 가볍게 응수해 버린다. 정기적인 검진을 위해 의사가 오는 날이면 의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온 집안을 우당탕탕 뛰는 소동을 부리기도 했다. 또 간접적으로 의사의 검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리는가 하면 이렇게 장난기를 보이던 그가 어느 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사색에 잠겨 다른 사람의 근접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물론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기도 하고 질투를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처럼 아직 살아서 신격화된 사람도 드물다. 1년에 한 번쯤 가는 투우장에서는 그가 들어온다는 장내 아나운서의 말이 있으면서부터 그가 자리를 찾아 앉을 때까지 관중들의 기립박수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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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30 17:0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또 다른 사람 피카소 - 2

아무튼 피카소가 젊은 날 무명 시절에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왔으나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알아 반겨줄 리 없었다. 비를 피해 뛰어들어 간 화랑에서 그는 저 비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들고 있던 그림을 맡아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 75살쯤의 그가 끄적거린 그림 하나가 2500불 정도의 시장성을 가졌고 그의 전문 화상인 칸바일러는 그의 그림 한 장을 100만 불에 팔기도 했다. 그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무슨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아. 사람이 일생에 한 번은 복권에 당첨될 수도 있어. 그런데 칸바일러는 매일같이 당첨되는 것처럼 내 그림을 판단 말이야. 가격은 10만 불이든, 100만 불이든 문제가 아니지. 우리가 하루에 50번씩 식사를 할 수는 없거든, 얼마에 팔리거나 그것은 마찬가지지”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내심은 자신의 그림이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에 대해서, 또는 세계의 유명 미술관에서 앞을 다투어 자신의 그림을 구입해 가는 것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그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사인 sign 따위는 필요하지 않지. 왜냐하면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고 있으니까.”라는 자신만만, 어쩌면 건방진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그는 그림이든 판화든 간에 사인을 하지 않고 나중에 자신의 그림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뒤늦은 사인을 해 주고는 그 대가로 일금 일만 불을 사례로 받는 철면피함도 보여 준다. 어느 날 화상 피에르 마티스가 그의 초기 작품을 들고 그의 사인을 받으러 왔다. 사인이 있어야 그 그림을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피카소 자신이 친구 마티스에게 선물했던 것인데, 피에르 마티스는 앙리 마티스의 아들이 아닌가. 그러나 돈을 준비하지 않고 자기의 아버지와의 관계만 믿고 찾아온 피에르 마티스가 피카소의 사인을 못 받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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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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