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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수 교수의 문화산책] 루이 14세 ④ '사기캐' 초상화와 말년

△사기캐 초상화 루이 14세는 평생 700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초상화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초상화에는 프랑스 왕가의 색상인 푸른색 바탕에 왕가의 문양인 금색 백합으로 무늬 놓아진 화려한 겉감과 고가의 하얀 담비 털 안감으로 제작된 대관식용 망토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밖에도 왕관, 목걸이, 왕홀, 샤를마뉴 대제(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검은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레갈리아(regalia)를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성령기사단의 훈장으로 만든 목걸이, 푸른색 방석 위에 ‘정의의 손’, 기둥에 새겨진 율법의 신 ‘테미스’의 칼과 저울은 왕의 정의와 왕권신수설을 뒷받침해 주는 장치로 루이 14세의 태양왕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루이 14세라는 VVIP고객의 원츠(wants)를 과하게 반영한 이아생트 리고(1659~1743)의 초상화는 원래 스페인에 간 손자 앙주 공작에게 선물하려고 제작되었지만, 루이 14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르사유 궁 아폴론방에 남게 된다. 평민 출신 이아생트 리고는 이 초상화를 통해 귀족 작위를 받고 궁정화가가 된다. 유럽 최고 군주의 궁정화가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그의 실력에 대한 입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왕족과 귀족들에게 퍼져나갔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가 쇄도하여 그의 아뜰리에는 문정성시를 이룬다. 요즘으로 치면 증명사진 맛집이라고나 할까? △루이 14세의 빛과 그림자 집권 후, 태양왕으로 군림하며 화려한 삶을 살아간 루이 14세의 말년은 어땠을까? 태양이 저물 듯이 태양왕도 저물어 갔다.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고 1680년대부터 국가재정 위기가 위험한 수준이어서 조세는 거두기도 전에 고갈되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그의 치세 말년에 프랑스에서 천연두와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고 그는 자손들이 전염병으로 죽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왕위를 이을 직계 자손들이 줄줄이 병으로 사망하였고 부르사고뉴 공작의 막내 아들이며 자신의 증손자인 어린 앙주 공작만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남게 된다. 민심 또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에 시달린 백성들은 궁핍한 삶에 지쳐만 갔다. 굶주린 배에 전염병까지 돌아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백성들은 사치한 전쟁왕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그가 죽자 국민들은 애도하기는 커녕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임종 시, 왕세자에게 남긴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너는 건축물을 짓거나 전쟁을 좋아하지 말아라. 나를 닮아서는 절대 안 된다. 그 전쟁은 백성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너는 다른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어라.’ 적어도 이 유언을 보면, 루이 14세는 절대 왕권을 이루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임종 직전에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후대에는 이것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의 후손들이 루이 14세의 마지막 유언을 깊이 새겨 들었더라면 부르봉 왕조의 수명이 조금은 더 길어지지는 않았을까?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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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4 16:41

[권혜수 교수의 문화산책] 루이 14세 ③ 모든 소문을 잠재우고 태양왕이 되기까지

루이 14세는 5살에 왕위에 올라 72년이라는 유럽 왕실 사상, 최장기 집권을 하며 절대왕권을 확립하였다. 봉건제를 바탕으로 한 귀족 중심의 지방 자치제였던 프랑스를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재의 나라로 제도를 재정비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그렇다면 프롱드의 난에서 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린 귀족들을 순한 양처럼 길들이고 유럽 최고의 절대군주가 된 루이 14세만의 노하우는 무엇일까? 첫째, 베르사유 궁, 그의 홈그라운드로 귀족들을 끌어들이다. 모든 운동경기에는 홈그라운드에 이점이 분명 작용한다. 루이 14세도 이 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귀족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왕권중심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귀족들을 궁전으로 끌어들였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절대왕권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은 귀족들이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베네치아 거울 장인이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73m 길이의 거울의 방이 완성되었다. 거울 제조법이 국가 기밀일 만큼 거울이 귀하던 시대에 이 방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의 부러움을 샀고, 루이 14세는 화려함의 극치인 베르사유 궁에서 다양한 연회를 열며, 귀족들에게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였다. 귀족들은 어느새 베르사유만의 특별한 문화에 빠져들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성대한 행사에 참석하려면 자신의 영지가 아닌 베르사유 궁에 살아야만 했다. 베르사유 궁에 거주하려면 국왕에게 잘 보여야 했고, 자연스레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의 영지 관리는 소홀해졌다. 베르샤유 궁은 단순히 사치를 위한 궁전이 아니라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목적으로 십분 활용되었다. 둘째, 차별을 통제 수단으로 이용해 귀족들을 길들이다. 루이 14세는 사람을 차별하고 불편감을 주는데는 선수였다. 신분이 낮은 지위의 귀족일지라도 왕을 감동시키면 높은 관직과 큰 이윤이 남는 일을 맡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자, 귀족들은 왕에게 잘 보일 수 있다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왕에게 잘 보이려면 일단 가까이 있어야 했기에, 왕의 용변을 처리하는 일이나 변기를 들고 다니는 일을 귀족들이 앞 다투어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하인들이 할 법한 일들인데, 왕의 변기를 들고 시중드는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프롱드의 난에서 보였던 귀족들의 위세가 완전히 꺽인 것은 확실했다. 반대로 높은 지위의 귀족일지라도 왕의 눈 밖에 나면 베르사유에 더 이상 머룰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궁정 문화와 모든 이권 사업에서도 배제된다는 뜻이었기에 귀족들은 반란은 꿈도 못 꾼 채, 왕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일과를 귀족들이 시중들게 하였다. 자신의 사생활을 전부 공개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17세기 판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스스로 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극 중 트루먼은 자신의 삶이 대중에게 방영되는 것을 몰랐고, 알고 난 후에도 괴로워했다. 반면, 루이 14세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였고 집권 후, 숨을 거둘 때까지 미드 시리즈물처럼 자신의 삶을 공개하며 기획, 출연, 연출까지 하는 종합 예술인의 삶을 살았다. 윌리엄 새커리가 풍자한 루이 14세의 모습. 마네킹에 입혀진 왕의 복식, 복식을 착용하지 않은 70대 루이 14세의 초라한 모습, 복식 착용 후, 루이 14세의 모습(왼쪽부터). /권혜수 교수 제공셋째, 이미지 메이킹으로 태양왕이 되다. 그는 복식을 통해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감추는데 귀재였다.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는 ‘왕의 권위가 미용사와 디자이너에 손에서 만들어진다.’라고 언급하며 루이 14세를 풍자했다. 이 풍자화는 작은 키. 대머리, 배가 불룩 나온 앙상한 다리의 노인에서 풍성한 가발과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한 루이 14세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남성 최초로 하이힐을 신을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하이힐과 가발을 이용해 작은 키를 훨씬 커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해지는 외모를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복식을 활용해 태양왕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문화예술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발레 공연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7세 때부터 부상을 당해 발레를 그만두게 되는 27살까지 매일 2시간씩 춤 연습할 정도로 발레에 열정을 보인 그는 뛰어난 발레솜씨에 공연 기획력까지 갖춰 문화예술공연을 통해 태양왕의 이미지를 확립해 나갔다. 그는 발레 공연 때마다 아폴론신을 연기하며 자신을 태양왕의 이미지에 투영하였고 더불어 귀족층은 항상 태양왕 아폴론에게 무릎을 끓고 절하는 모습을 공연에 넣어 관람하는 이들에게 중앙집권적 절대 왕권을 각인시켰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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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3 16:14

[권혜수 교수의 문화 산책] 루이 14세 ② 출생 배경

결혼 23년 만에 루이 14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큰 경사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유는 부친은 여자를 이상하리만큼 멀리했고, 모친은 두 번의 염문설이 날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모친(안 도트리슈)의 집안은 대단했다. 그녀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세습 받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였다. 황제의 명예와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가문으로 위세를 떨친 합스부르크가의 번영 뒤에는 정략결혼이라는 수단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는 시를 보면 이 가문이 얼마나 정략결혼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루이 13세의 아내, 안 도트리슈는 아름다운 얼굴에 큰 키의 소유자였고 특히, 그녀는 자신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모든 유럽 왕실들이 이 결혼을 부러워했으나, 루이 13세는 아버지와 같이 반스페인 정책을 옹호했고, 자신을 심하게 학대한 어머니가 추진한 정략결혼에 자존심이 상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다. 프랑스의 왕비가 된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유산으로 남편과 소원해져 프랑스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자 왕비의 자리를 망각하고 프랑스 국가 기밀을 스페인으로 빼돌렸다. 이것이 발각되자 남편과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외로움을 느낀 왕비는 버킹엄 공작(1592~1628)과의 스캔들로 온 유럽을 뒤집어 놓았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된 알렉산드로 뒤마(1802~1870) 의 소설 <삼총사>에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등장한다. 외로운 여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영국의 버킹엄 공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낮은 귀족 계층에서 빼어난 외모, 뛰어난 춤솜씨와 언변술로 영국 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마음을 사로잡아 당시, 왕족에게만 부여되던 공작 작위를 받은 인물로 이 사건은 유럽 최고의 미남과 미녀의 스캔들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륜이라기 보다는 '썸'을 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 궁정에는 왕비를 시중드는 하녀들과 감시하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 대신으로 방문한 버킹엄 공작과 여왕이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루이 13세는 왕비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태어난 루이 14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추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급기야 프롱드의 난 때,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어쩌면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절대군주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불편한 출생 배경에 대한 반대급부일지도 모른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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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5:02

[권혜수 교수의 문화 산책] 루이 14세 ① 아버지가 누구지?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권혜수 석좌교수(서울발레시어터 대표·한국전통문화예술원 대표)가 역사 속 그림을 통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하여 산책하며 이야기하듯 쉽고 편안하게 풀어드립니다. 그림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메타포들이 숨어 있어서 그림만 제대로 해석해도 그림 속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 그려진 사람의 성향, 그린 사람의 의도까지 알 수 있습니다. 복식사와 색채학을 전공한 권 교수는 미술사 도서 자료를 바탕으로 공부한 내용을 딱딱한 글이 아닌 증거가 되는 그림을 보이며 전북일보 독자들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목숨을 위협받던 소년에서 태양왕이 된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4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특명! 철가면을 쓴 죄수, 그 누구와도 이야기 못하게 하라. 알프스 고지 요새의 피네롤 감옥, 1667년 간수장이었던 생마르스는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발신인은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의 최측근인 루부아(1641~1691) 장관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죄수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왕실에서 지불할 것이다. 철가면을 쓴 죄수를 독방에 가두되, 왕족 대하듯 극진하게 모시고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어라. 가구, 음식, 의복은 최고의 것으로 제공하라. 그러나 그가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4번을 이감되면서도 34년간 철가면을 벗지 못했던 사나이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면을 벗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직후, 죄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훼손하고 매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얼굴이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힐 만큼 누군가와 닮아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배후가 루이 14세라면⋯. 철가면을 쓴 사나이와 왕이 친족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철가면을 이야기는 호사가들을 통해 오랜 세월 다양한 소문이 있었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먼저, 공식적으로 그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철학가 볼테르(1694~1778)로 그는 철가면을 쓴 죄수가 루이 14세의 친형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영국의 역사가 휴 로스 윌리엄슨은 그를 루이 14세의 대리부로 추정하였다. 실제로 루이 14세의 부친인 루이 13세(1601~1643)가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합의 하에, 대리부를 들여 임신하였고 이 문제로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을 것을 걱정한 루이 14세가 친부(대리부)를 감옥에 가두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는 입장이다. △“루이13세가 친부가 아닐 수 있다고? 그럼, 이 꼬마를 어떡하지?” 프롱드의 난*(La Fronde 1648-1653), 루이 13세가 사망한 후, 귀족 반란군이 파리로 몰려들어 왕실 가족들을 잡아들였다. 루이 14세의 모친, 안 도트리슈(1601~1666)와 재상인 마자랭(1602~1661)추기경은 파리를 빠져 나갔지만, 미처 피신하지 못한 루이 14세는 귀족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귀족 반란군은 그가 루이 13세의 친자가 아니고, 왕비가 마자랭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라며 루이 14세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이 순간, 아무 힘이 없는 어린 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눈을 꼭 감은 채, 자는 척 하는것 뿐! 귀족들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어린 왕자에게 쏟아낸 모욕적인 발언과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은 분명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반감을 가진 귀족 세력이 일으킨 내란이다. 프롱드의 뜻은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의 세력에 저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1차는 고등법원의 프롱드, 2차는 귀족의 프롱드이다.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펼친 재상 마자랭이 귀족들의 기득권을 과도하게 빼앗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자, 위기를 느낀 귀족 세력들이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반란군은 제압 된다.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 왕권에 대한 귀족층 최후의 반란으로 기록된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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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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