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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⑬ 금지역, 그리고…] 전북 이야기 실은 기차, 이제 강 너머 남쪽으로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금지역 지난 12월 8일, 남원시 금지면. 신월보건진료소, 금지초등학교 등과 함께 금지역이라는 표기가 화살표 모양의 이정표에 박혀 있었다. 그 크기가 크지 않아 자칫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아무래도 서두르지 말고 싸드락싸드락 댕기라고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농협 건물을 끼고 들어가 우체국과 보건소를 지나 좁은, 그러나 곧게 뻗은 길로 쭉 들어가면, 그 끝에는 금지역이 서 있다. 파란 직사각형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얇은 금속판을 세워놓았는데, 다른 역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좀 볼품없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얇은 금속판일 뿐이라, 바람이 불면 웅 웅 하니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에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驛舍) 지붕으로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마치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는 더벅머리처럼도 보인다. 주차된 자동차는 많은데, 인기척은 없었다. 대합실로 들어가는 문도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여객취급 중단 이후로 문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아주 깔끔하게도 벽돌로 메워놓았다. 벽이 된 문에는 금지역은 직원이 없는 무인역입니다라 쓰인 안내만 붙어 있다. 당연히 겨울이라 그렇겠지만, 이파리 하나 없이 서 있는(또 일부 가지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벚나무들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무 것에나 감정을 이입하고 보는 인간의 몹쓸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금지역은 1933년 남원~곡성 구간 개통 때 주생역, 곡성역과 함께 문을 열었다. 주생역과 곡성역 사이,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두 역과의 거리는 6km 정도다. 문을 열 때는 역원배치간이역이었다가, 1980년에 보통역으로 승격한다. 여객수송실적만 보면 의아할 수도 있겠다. 1979년 금지역을 이용한 이가 모두 8만8853명이었는데, 같은 해 옹정역 이용객이 14만3187명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옹정역은 건물도 측선도 없는 본격 간이역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러나 금지역은 옹정역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었다. 1979년 금지역이 처리한 화물은 발송이 3만2750톤, 도착이 4545톤으로 모두 3만7295톤이었다. 전주나 북전주, 남원 등 도시나 공업지대의 역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비슷한 규모의 주생역이나 오수역 등과 비교하면 꽤 수요가 있는 편이었다. 금지역이 할 수 있었던, 아니 할 수 있을 뻔했던 것이 또 하나 있다. 일제 강점기, 송정리역(지금의 광주송정역)에서 광주, 담양, 순창을 지나 경남 진주, 마산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 건설 계획이 있었다. 1922년에 이 가운데 서쪽 끝에 해당하는 송정리~광주~담양 구간이 먼저 개통됐다. 이를 전남선이라 불렀다. 송정리~광주 구간은 광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하여간 이후로도 공사는 계속된 듯한데, 순창에 남아 있는 향가터널과 향가유원지 교각이 그 흔적이다. 그러다 1944년,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제가 공사를 중단하고 이미 깔려 있던 철길도 철거해 버렸다. 이 철길이 전라선과 만나기로 예정돼 있던 곳이 바로 금지역이다. 어떻게 보면,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지금의 순천역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을 뻔했던 셈. 광복 후인 1965년에 광주~금지 구간 공사를 재개한 기록이 있지만, 이 또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만약 이 철길이 이어졌더라면, 그 모습이 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저 평범한 시골 역으로 남게 된 금지역은 1998년 전라선 노반 개량에 따라 한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2007년, 여객 취급 업무를 손에서 놓았다. 이듬해에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됐다. 최근 광주~남원~대구 사이를 잇는 달빛내륙철도 건설이 논의되고 있지만, 논의되는 노선을 지도에서 짚어보면 금지역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거의 10년, 플랫폼 바닥의 블록 사이로 풀들이 올라와 있었다. 역명판 같은 시설물들은 철거됐고, 이제는 다만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역 이름 쓰인 간판이 네 개 있었고, 녹이 슬어서 삭아서 없앴지. 여기 하나, 저 짝에 하나 그렇게 있었는데, 인자 관리를 않고 사람이 없으니까. 태풍이라도 불면 위험하잖아요. 동행한 코레일 관계자의 설명에 납득이 되다가도,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승강장의 지붕 시설물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할까. 녹색 진행 신호가 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 KTX 한 편성이 지나갔다. 확실히, 관리되지 못한 시설물 같은 것이 바람에 날려 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진로를 방해하면 위험할 것도 같다. △에필로그: 다시 만날 그 열차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고 가만히 있노라니 마치 몇 분짜리 단편영화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같은 칸 앞쪽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보채는 소리와 뒷자리에 앉은 승객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띠링띠링 하는 알림음, 문 여닫고 오가는 발소리 등. 기차가 달리며 내는 시-미-라-레-, 덜컹덜컹, 후두둑, 삐이이, 이런 소리에 고명을 올리듯 저녁 소리가 풍성해진다. 복도를 사이로 옆에 앉은 승객이 열차 안의 히터바람에 노곤해진 몸이 풀리는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땅거미 진 어둠 속으로 가로등 불빛들이 고개를 든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철도의 역사는 수탈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호소카와 가문이니 삼릉(미쓰비시)재벌이니 하는 자본가들이 달려들어 전라선 철도를 놓으려, 혹은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결국 수탈과 관련이 있다. 태생은 그렇지만, 일단 놓인 철길은 어떤 식으로든 전북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이리동중 다니던 장하영 씨를 학교에서 집으로 또 집에서 학교로 데려다 줬으며, 춘포 살던 노동자들을 공단으로 실어 날랐고, 신리 주민 이정두 씨가 친구를 만나러 가게 해줬다. 오수 사는 김균자 씨에게도, 남원 사는 조효순 씨에게도 옛 기차의 추억은 선명하다. 그뿐이랴. 현대의 이리(익산)를 만든 것도 철길이었고, 산업화 시기 전주의 물류를 지탱했던 것도 전라선-북전주선 철길이었다. 내일로 티켓 한 장에 의지해 삼례로, 전주로, 임실로 돌며 전북을 맛보는 청년들 모습도, 고속열차 타고 남원에서 내려 봄내음(春香)에 취하는 여행객들 모습도, 모두 철길이 만든 풍경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일수도,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여정일수도 있는 길. 봄꽃 나들이로 여행객 발길에 설렘 가득하던 봄, 태양이 아스팔트까지 녹일 기세로 쨍쨍 내리쬐던 여름, 단풍 익고 코스모스 만개해 향수 불러일으키던 가을, 기차 창밖으로 눈 이불 덮은 시골동네 풍경화 펼쳐지던 겨울까지. 다시, 금지역.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물줄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관촌에서 만났던 그 물이다. 섬진강댐을 지나 순창 땅을 적시고 오수천, 경천, 옥과천과 한 몸이 되어 왔다. 강변으로는 자전거길이 깔끔하게 닦여 있다. 손이 시리고 귀가 얼고 머리는 땅땅 울리는 날씨였는데도, 자전거 여행객들이 유유히 길 따라 다리 밑을 지나갔다.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이 섬진강 물을 건너면 저편은 이제 전라남도 곡성 땅. 이야기를 가득 실은 남행열차 한 덩어리가 다리를 건넌다. 반질반질 빛나는 평행선, 전북도민의 사연을 침목 밑에 고이 쌓아 올린 전라선 철길은 이제 전북을 벗어나 달린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끝>

  • 기획
  • 전북일보
  • 2017.12.23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⑫ 주생역·옹정역] 자물쇠 채운 간이역, 가을도 떠나가네

△ 녹슨 레버와 풀벌레의 시간, 주생역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둘러보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주생역. 언덕 위에 앉은, 붉은 벽돌을 둘러 입은 밋밋한 한 일(一)자 건물이, 앞서 찾았던 서도역과 매우 닮은꼴이었다. 비어있는 역사를 철도 궤도 공사 관련 업체가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닮았다. 역 건물에서 굳이 다른 점을 찾아본다면,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역명판의 모양이 다르다는 정도일까? 서도역은 반달 모양, 주생역은 직사각형.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없었다. 맞이방과 매표소 입구는 퍼즐 맞추듯 여러 판을 이어 붙여 못질해둔 탓에 깔끔하게 막혀 있었다. 주생역은 1933년 10월, 남원~곡성 구간이 개통될 때 배치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금지역과 전남의 곡성역이 동기다. 개업 7년 뒤인 1940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됐는데, 개업 동기들과 비교하면 곡성역은 처음부터 보통역이었고 금지역은 1980년에야 보통역이 되므로 딱 중간 정도 갔다고 보면 되겠다. 수송 실적도 특출난 편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건물조차 없던 옹정역에도 한때 밀릴 때가 있었고, 화물 취급 실적도 남원역이나 곡성역과 비교하면 대단치는 않았다. 그 사이 남원역과의 사이에 상동역이라는 간이역이 하나 잠깐 생겼다 사라졌다.(1966년~1977년)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농어촌 역들이 다들 그렇듯이, 주생역 또한 산업화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결국 2004년 7월 15일, 여객 취급 중단의 칼을 맞았다. 전라선 복선화에 따라 선로가 이설되면서 역사가 다시 지어진 것이 2004년 8월 5일인데, 그러니까 역사의 맞이방과 매표소는 열리기도 전에 그 용도를 잃은 셈이다. 봉천역이나 산성역과 비슷한 운명이다. 여객 취급 중단 직전인 2003년 한 해 이용객은 모두 487명. 하루 평균 두 명도 되지 않는 실적이었다. 주생역은 이후 2007년 1월 1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돼 현재에 이른다. 승강장에서 북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과거 철도 차량들이 밟았을 측선들이 몇 가닥 얽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행한 코레일 관계자는 통운 적하장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며 관계자가 취재팀을 이끌었다. 바로 사람 손으로 직접 움직이는 수동식 선로전환기(전철기)였다. 사람이 레버를 조작하면 그 힘으로 선로가 움직여 열차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데, 주생역의 수동식 선로전환기는 레버 하나에 분기기 두 개가 맞물려 움직이게 돼 있었다. 그 사이를 기다란 금속 축이 잇는다. 이제는 다 기계식을 쓰지, 수동식은 안 쓰죠. 수동식은 저기 경기도 의왕 철도박물관에나 있을랑가. 그가 체중을 실어 레버를 잡아당기자 레일이 들썩거렸다. 선로 끝 편에 앉아 멀뚱거리고 있던 초록색 풀벌레 하나가 이에 박자를 맞추듯 수풀 쪽으로 풀썩 뛰어 사라졌다. 녹슬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네. 허허. 그래도 옛날엔 다 이렇게 인력으로 했다고. 그러는 동안, 저쪽 본선으로 KTX 한 편성이 쌩하고 지나갔다. △ 뼛속까지 간이역, 옹정역 역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건물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나 간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주생역에서 남서쪽으로 3km, 그냥 봐선 단순한 철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옹정역이 있었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밟아 올라가면 곧바로 승강장이 나온다. 건물이 없으니 매표소도 맞이방도 없고, 역무원실도 없다. 정말로 간이역, 그 자체다. 시꺼멓게 때가 탄 보도블록은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다. 역명판이나 벤치는 물론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과거에 어떤 구조물이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옛날에는 이 자리에 시내버스 정류장을 닮은 승객 대기 공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그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승강장은 측선 하나 없이 상하행 본선에 직접 닿아 있다. 본선 가운데에는 기둥의 밑동 비슷한 것이 보인다. 선로를 넘어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중앙분리대 비슷한 것이 있던 흔적이다. 승강장의 바깥쪽에도 울타리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출입을 막기 위해 쳐놓았던 것일 터다. 사람뿐 아니라 고라니와 같은 동물들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로드 킬은, 물론 인간 때문에 제 터전을 잃고 배회하다가 치여 목숨을 잃는 동물들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들에게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동행한 철도 관계자는 열차가 지나갈 때 풍압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구조물들을 모두 철거했다고 말했다. KTX가 시속 170km로 통과하는 구간이어서 승강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위로 주생역, 아래로 금지역을 끼고 있는 옹정역은 지난 1959년에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남쪽에 금지역이 따로 있지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금지면사무소와 파출소, 보건지소를 모두 끼고 있는 옹정역 인근이 금지면의 중심지에 더 가깝다. 옹정역 이용객이 금지역 이용객보다 많은 시절도 있었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1978년 한 해 옹정역을 이용한 승객이 15만3109명이었는데, 그해 금지역 이용객 수는 10만819명이었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얼마 못 가 끝난다. 불과 5년 뒤인 1983년, 옹정역 이용객 수는 3분의 1도 안 되는 4만4001명으로 주저앉는다. 같은 해 금지역은 5만4954명이 이용했다. 1975년 8956명이었던 금지면의 인구는 1980년 7344명, 1985년 6087명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자동차가 늘어나고 버스가 편리해졌으며 빨라진 열차는 사이사이 작은 역들을 건너뛰었다. 이 모든 현상이 합쳐져, 앞서 주생역이 그랬던 것처럼 옹정역 또한 2004년 7월 15일에 여객업무를 손에서 놓는다. 복선화로 훨씬 빨라진 전라선 선로 곁에, 아무도 이용하지 못할 승강장만 8월 5일에 새로 깔렸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 419 혁명의 불꽃은 여기에김주열 열사의 고향 옹정리 옹정역 플랫폼에 올라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가을걷이가 끝나 한적한 들녘과 비닐하우스 무리 너머로 금지동초등학교가 한눈에 오롯이 담긴다. 옹정역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이 학교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그리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김주열 열사는 남원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나 금지동초를 졸업(6회)하고 1956년 금지중학교에 진학한다. 3년 뒤 중학교를 졸업, 1년 재수 끝에 경남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합격 소식을 안고 정든 고향집을 떠났다. 그렇게 뜨거운 꿈을 찾아 나선 열일곱 고등학생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갔다가 이승만 정권이 쏜 최루탄에 맞아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되어 고향 땅에 돌아왔다. 금지동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학교명과 함께 김주열 열사 모교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어른 키만 한 비석 양 옆면에는 열사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돼있다. 운동장 한편에서는 모교 후배들이 우리 선배 김주열을 그리며 하늘에 올리는 절절한 추모곡도 볼 수 있다. 옹정삼거리로 나와서 김주열로로 명명된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잠깐 달리면, 열사가 잠들어 있는 묘와 그 묘 아래에 조성된 추모공원이 나온다. 추모공원은 남원시가 2006년부터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으로, 지난해 12월 완공됐다. 추모각과 기념관 문은 평소에는 잠겨 있다. 들어가 보려면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남원시청 주민복지과나 금지면사무소에 연락하면 된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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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7.12.02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⑪ 남원역] 철길 옆 꽃길, 시간도 머물다 가다

교룡산 자락을 돌아, 철길은 터널에 누운 채 남쪽으로 뻗었다. 전주에서부터 나란히 동행하던 춘향로는 이즈음에서 전라선 철길과 영영 이별하고, 대신 국도 제17호선의 바통을 넘겨받은 서부로가 철길과 함께 달린다. 삼거리를 지나자, 맞배지붕을 얹은 커다란 한옥 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는 그네 뛰는 춘향과 부채를 펼쳐 든 몽룡이 보였다. 전라선 전북 구간의 마지막 여객 정차역, 남원역이다. △활기 넘치는 그 플랫폼 10월 20일, 남원역. 역사 앞에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역사에서 나오는 사람이 교차하는 풍경 뒤로, 소풍을 온 것 같은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플랫폼으로 나가려면 선로 위를 통과하는 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전라선의 모든 여객열차가 서는 역답다. 전주익산용산행 플랫폼에서, 김혜정 씨(55)는 인천공항행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 일정이 있어 공항에 가는 길이라는 그의 좌우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부피도 부피였지만 무게도 그냥 딱 봐도 무거워 보였다. 직장 동료 손모 씨(41)가 그를 도우러 나왔지만, 정차시간 내에 짐을 열차에 실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열차는 편리하니까 자주 이용하죠. 자주 없어서 문제지. 그런데 이 짐을 정차시간 내에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하하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던 채수인 씨(19)는 군산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이 마침 졸업 앨범 사진을 촬영하는 날이었단다. 일찍 끝났으니 일찍 돌아가서 면접 준비를 할 요량이라고 했다. 열차요? 자주 이용하는 편이에요. 급하면 KTX를 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궁화호를 타기도 하고요. 학교가 바로 이 근처라서 역으로 걸어서도 오기도 해요. 한쪽에서는 분홍색 옷을 맞춰 입은 어린이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줄잡아 열댓 명 정도인 이 행렬은 진안 안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이었다. 남원에 어떤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차를 타보기 위해 전주역에서 KTX를 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 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한다. 빨라요! 신기해요! 난 타봤는데! 안 신기하거든? △침체를 딛고 다시 흥하다 남원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이름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동충동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옛 남원성 북문이 있던 자리인데, 일제가 성을 헐고 그 자리에 철길을 깔고 역을 지었다. 남원성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던 곳이다. 그 혈전 끝에 전사한 이가 관군과 남원 주민, 명나라 원군 등을 합해 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모신 곳이 만인의총이다. 지금의 남원역은 2004년 8월, 전라선 임실~금지 구간이 복선으로 다시 깔리면서 새로 지어졌다. 옛 남원역으로부터는 직선거리로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지도를 놓고 보면 그다지 멀어 보이지는 않는데, 막상 직접 찾아가 보면 새 남원역은 도심과 좀 격리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겠고, 새 남원역 주변 택지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신도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탓도 있겠다. 역 광장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기사 김모 씨(54)는 아무래도 옛날 역이 낫다. 거긴 상권이 형성돼 있으니까. 여기(새 남원역)는 식사를 하기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사실 남원역이 외곽으로 옮겨지면서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 철도통계연보 기록을 보면, 이전 전인 2003년 한 해 68만9041명에 달하던 남원역 이용객 수가 이전 다음 해인 2005년 55만5978명으로 13만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또 사정이 달라졌다. 열차 이용의 편리함이 역을 오가는 불편함보다 크면, 이용객은 자연히 늘기 마련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KTX 운행이다. 2011년에 전라선 KTX가 개통되고 2012년에 KTX 필수정차역이 되면서 이용객 수가 크게 늘어, 2015년에는 71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관광도시 남원답게, 수도권에서 단체로 오는 여행객도 많다고 한다. 정병훈 남원역 부역장(45)은 봄가을이면 여행상품을 기획해서 많이들 내려오는데, 특히 봄에 많이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편 남원역에서는 여행객들을 위해 자전거를 빌려주기도 한다.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 이용객은 아직 적은 편이라고 하는데, 동선에 따라서는 이 자전거도 매력적일 수 있는 선택지다. △광한루, 사랑과 전쟁 남원역에서 나와, 남쪽으로 빠져 남문로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길가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저기 원경으로는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리산이 보였다. 왼편으로는 곧 만복사지가 나온다. 김시습의 소설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그 만복사다. 고려 문종 때 처음 세워졌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인상을 비롯한 몇 가지 석조물만 남아있다. 왕정교를 건넌 뒤 남쪽으로 길을 틀었다. 남원역에서 길 따라 약 3km, 요천 북쪽에 광한루원이 자리해 있다. 조선 초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를 와 광통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다고 한다.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광한루원을 흐른다. 문자 그대로, 흐른다. 물은 이제 곧 용이 되든 뭐가 되든 될 것 같은 거대한 잉어들을 품고, 호남제일루 광한루를 제 얼굴에 비춘다. 연못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오작교다. 견우와 직녀 사이를 이어주었다던 그 오작교에서 딴 이름이 맞다. 그렇다면 아래 흐르는 물은 은하수가 되겠다. 그러니, 광한루는 작은 우주다. 전설 속 광한전과 은하수, 오작교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춘향제의 무대로도 쓰이는 완월정이 서 있다. 사실 지어진 지는 얼마 안 되지만(1971년 신축),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춘향과 몽룡이 나오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알려진 자리지만, 반대로 전쟁의 자리이기도 했다. 1597년 남원 전체를 불태우다시피 했던 정유재란의 전화가 이곳에도 미쳐, 광한루 또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누각은 나중에 인조 때 다시 지은 것이란다. 또 동학농민혁명 때, 남원성을 빼앗기고 쫓겨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성밖시장 저잣거리 자리가 지금의 광한루원 주차장 인근이라고 한다. 광한루원에서 시나브로 걸을 작정을 하면, 요천과 천변길, 춘향테마파크며 함파우 소리체험관이며 남원 항공우주천문대며 하는 남원의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물론 지리산도 식후경. 추어탕 전문점이 광한루원을 둘러싸다시피 할 정도로 성업 중인데, 먼저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서도 괜찮겠다. △옛 남원역과 겹겹이 쌓인 시간들 까딱- 까딱- 까딱. 나무로 된 흔들의자가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코스모스와 백일홍이 고개를 끄덕인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그래서 무슨 예복이라도 걸친 듯한 고양이 한 마리가 레일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남원 도심 한복판, 동충동 옛 남원역은 조용했다. 쓸쓸하거나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조용했다. 한때 이곳을 시끄럽게 했던 것들이 떠나버리고, 이곳에는 열차 대신 사람과 시간이 찾아와 도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주민 조효순 씨(79)도 그 풍경 속에 있었다. 여그 사는데, 가까우니까 자주 와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보고. 쪼께 쉬었다가 가죠. 지금이야 도심 속 조용한 별세계가 됐지만, 기억과 기록을 더듬으면 전북 동남권 최대의 역이자 전라선 철도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했던 과거도 있다. 이를테면 1970~80년대 춘향제가 열릴 때면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오곤 했는데, 남원역 플랫폼도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꼴이었다. 당시 연간 백만을 우습게 넘던 이용객 수 규모에 걸맞지 않게 플랫폼이라고 해봐야 섬식 승강장 하나뿐이었으니, 미어터지는 건 다반사였다. 얘기헐 것이 뭣이 있냐던 조 씨는, 그땐 역 마당까지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이곳에서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1971년 10월 13일,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58명을 태우고, 제192호 완행열차가 서울 방향으로 출발했다. 출발 직후 언덕길을 올라가던 열차는 중간에 멈췄다. 출력 1800마력의 신형 디젤기관차였지만, 급유펌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힘도 못 쓰고 주저앉은 것이다. 그러다 브레이크의 공기가 다 빠지면서, 열차는 올라온 길 그대로 다시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때 남원역에 유조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두 열차는 그대로 부딪혔고, 수학여행길의 남원국민학교 6학년 학생 19명을 포함해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정비 불량에다 미숙한 사고 대처가 겹치며 벌어진 참사였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모두 침목 밑에 고이 접어놓은 채, 동충동 남원역은 2004년에 역으로서의 기능을 새 남원역에 내주고 안식에 접어들었다. 그 뒤 그대로 방치되면서 도심 속의 흉물이 될 뻔했던 이 자리가 꽃밭으로 거듭난 것은 2008년. 바로 옆 묘포장 자리에 2007년 조성된 향기원과 묶어 꽃 단지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지금은 옛 남원역사 4만2000여㎡, 향기원 1만7000여㎡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꽃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철길에, 플랫폼에 발이 닿게 된다. 어쩐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이 풍경도 조만간 다른 모습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남원시는 2019년 이곳에 중앙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아직 옛 남원역사를 보존할지 허물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 기획
  • 권혁일
  • 2017.11.04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⑩ 서도역·산성역] 코스모스 피어도 가을 손님 타고 올 열차 없네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가을이 오는 건지 여름이 가는 건지, 이제 서늘한 건지 아니면 늦더위가 남은 건지, 9월 중순의 사매 공기는 어쩐지 어려웠다. 원래는 덕과와 사매면 중심부를 통과했던 활 모양 길이 어느 세월엔가 서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직선이 돼 있었다. △ 현재와 마주보는 과거, 서도역 서도역은 이 신작로의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온다. 공사가 한창이던 울퉁불퉁 도로를 따라 약 2㎞, 새 서도역이 꽤 높은 돌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다리 밑을 지나 들어가면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옛 서도역이 있다. 남원시 사매면이라고는 해도, 임실군 오수면과의 경계선상이기 때문에 생활권이 오수와도 겹치는 곳이다. 지금이야 조그만 마을이지만, 옛날엔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단다. 서도역이, 사람이 무지 많았어요. 순창 쪽에서도 이리 와서 열차를 타고 그랬으니까. 요 앞에 가게도 많았어요. 저 집은 방앗간이었고, 저 집도 가게였고 이 거리에만 이발소가 두 개가 있었어. 그런데도 명절 때면 한나절씩 기다려야 됐어. 김용구(62) 노봉혼불체험휴양마을 위원장의 증언이다. 길마다 한들한들 핀 채로 가을을 온몸으로 알리는 코스모스 무리를 따라, 취재팀이 옛 서도역을 찾은 것은 지난 9월 15일. 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배경이 됐던 곳, 그래서 혼불 문학마을의 시작점이 되는 옛 서도역에도 마른 나뭇잎이 하나둘 나뒹굴기 시작했다. 영상촬영장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면 자갈 깔린 앞마당이 나온다. 그 가운데 선 나무 주위로 뱅글뱅글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는 어른 두 사람이 두 팔을 벌려 껴안아도 다 덮지 못할 만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뒤로 나무로 외양을 꾸민 조그만 역사가 자리했다. 관리인이 따로 상주하고 있지 않아 평상시에는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없는데, 맞은편 혼불숭어리들름터에 찾아가 열어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역사 한쪽으로는 조그만 공원이 마련돼 있다. 소설 <혼불>의 원고가 적힌 4만6000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고지를 쌓아 작가의 열정을 표현했다고 적힌 조형물이 시선을 이끈다. 칼보다 강하다는 펜, 그 펜을 받아내는 원고지가 금속 재질로 화(化)해 쌓여 있는 것이, 어떤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보선 사무소 건물이 나오고, 이리저리 갈라져 있던 철길이 하나로 모여 남원 쪽으로 뻗다 만다. 서도역은 1931년 전라선(당시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 개통 때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제1412호)에는 1931년 전주~남원 구간 개통 당시 정차역으로 고시돼 있는데, 남원시에 따르면 역사가 지어진 것은 그 이듬해인 1932년이라고 한다. 철길 위로 바삐 오가며 역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열차의 기억을 찾아 역사 뒤편으로 가보니, 더욱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울긋불긋 코스모스마저 그 일부처럼 느껴진다. 배롱나무꽃이 떨어지기 시작한 플랫폼에는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니, 강모가 전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용하던 장소니 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오른쪽, 그러니까 북쪽에는 관사와 우물이 서 있다. 1930년대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역장 관사는 침실, 화장실, 거실 등이 갖춰져 있어 제법 널찍한 내부를 자랑한다. 그 위,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옛 철길 한쪽으로는 레일바이크 시설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는 폐 철로에 턴 테이블을 놓은 형태였는데, 지난 2015년께 지금과 같은 순환형으로 선형을 바꿨다고 한다. 지금은 바퀴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가만히 앉아 있지만, 남원시 관계자에 따르면 곧 정비를 거쳐 내년에는 운행이 가능하게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그 바로 맞은편,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된 밋밋한 한일(一) 자 건물이 있다. 새 서도역이다. 전라선 철도가 개량되면서 2002년에 이곳에 새로 지어졌는데, 2004년 7월 여객 취급이 중지되고, 2008년 7월 1일 역무원이 철수했다. 지금은 시설 관리 업무 위탁 업체 직원들이 역을 지키고 있다. 오수역 시설관리반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플랫폼에는 오래돼 색이 바랜 사진처럼 처연히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봄날 개나리를 닮은 노란색으로 만들어졌을 점자블록은 허옇게 변했고, 조각조각 부서진 파편들만이 늦가을 낙엽처럼 통행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한 달여가 지나, 10월 13일에 옛 서도역을 다시 찾았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랬나, 뭐랬나.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이곳의 낙엽은 망명정부의 지폐라기보다는 지나가버린 비둘기호 열차 티켓 정도가 적당하겠다. 은행나무가 노란빛을 뿌리고 있는 서도역 풍경 앞으로, 붉은 관광버스 한 대가 나타나 멈췄다. 내린 이는 어림잡아 삼십여 명. 김용구 위원장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새마을호는 못 세우더라도 무궁화호만큼은 세웠으면 좋겠어요. 이게 숙원사업이에요. 김은미(47) 체험마을 사무장이 옆에서 거든다. 보통 남원역으로 가서 전세버스로 여기까지 와서 보고 또 시간 맞춰서 남원역으로 가서 나가고 그러거든요. 아예 서도역에 열차가 서면, 여기서 내리면 되지 않겠어요? △ 산성역, 사람 흔적은 어디에 안내를 따라 돌아 들어가자, 취재팀을 맞이한 것은 서남대 정문이었다. 산성역으로 가야 하는데, 서남대는 왜? 하는 의문도 잠시, 조용한 캠퍼스를 가로질러 난 도로를 지나 남원천변을 잠깐 달리자 이내 산성역이 나타났다. 서남대에서 직선거리로 한 1㎞ 될까 말까. 후문쪽 원룸촌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한 가까운 자리였다.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이쪽이 찾아낸 것이 가깝다 할 정도로 존재감이 옅었다. 도로에 흔한 폴 사인이나 이정표도 없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지난 2003년에 새로 지어졌다는, 붉은빛이 도는 벽돌을 두른 역사는 꽤 깔끔했지만, 형태가 좀 어색했다. 여객 기능이 있는 역사에는 보통 정면 가운데쯤에 승객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다. 정면이나 가운데가 아니라도, 딱 역사 앞 광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출입구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산성역의 정면 가운데 부분에는 회색 문 굳게 닫힌 역무 공간이 있었다. 매표소와 맞이방으로 갈 수 있는 승객 출입구는 건물 남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좀 옹삭시럽게도 보였다. 승강장으로 나가는 정도는 막혀 있었다. 대신 역시 좀 옹삭시럽게, 건물 옆 틈을 통해 나갈 수 있었다. 여수 방향 승강장으로는 건널목 나무 발판을 밟고 갈 수 있었지만, 본선을 가로질러 반대편 승강장으로는 이렇게 비교적 편하게 갈 방법은 없었다. 여객 취급이 중단된 다른 무인역들과 마찬가지로 발판이 치워져 있었다. 사실 이 역사와 시설은 사람 손때를 거의 타지 않은 것들이다. 2003년 12월 25일 새 역사가 준공됐지만, 이듬해 7월 15일에 여객취급이 중단됐다. 이 기간 산성역을 이용한 이는 1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대충 이틀에 한 명 정도 타거나 내린 셈이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등록된 연혁으로는 1967년에 임시승강장으로 개업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실 산성역의 역사는 더 오래됐다. 1931년에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함께 문을 열었는데, 광복 직전인 1944년에 폐지됐다. 이후 1967년에 되살아나 1980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1980년 산성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10만 8348명, 이 역에서 취급된 화물은 3만 2601톤이었다. 발송 화물이 185톤, 도착 화물이 3만 2416톤이었다. 그러나 이후 승객이 꾸준히 줄어들었고, 결국 2004년에 여객취급이 중단된다. 같은 날 봉천서도주생옹정역이 함께 여객취급 중단의 칼을 맞았다. 남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방향을 바라보면 교룡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남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이 산에는 산성역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교룡산성이 버티고 서서 남원을 지키고 있다. 철길은 바로 그 교룡산을 스치듯 돌아 내려가는데, 그러면 곧 남원역이 나온다. 하선에 진행 신호가 들어왔다. 곧 전기기관차가 이끄는 무궁화호 한 편성이 지나갔다. 차내 방송도 이 무렵이면 나올 것이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남원, 남원역에 도착하겠습니다. ● 노봉마을과 혼불문학관, 천추락만세향의 혼불 사랑 지난달 15일, 푸른 잔디가 파도처럼 넘실대는 혼불문학관 앞마당. 김준식(47)김영아(47) 씨 부부가 천천히 거닐며 문학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혼불>의 열렬한 팬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최명희문학관부터 작가가 잠들어 있는 건지산의 묘소까지, <혼불>과 관련된 곳이라면 전부 찾아다녔다고. 이곳 혼불문학관도 가끔 찾아온다고 했다. 진안 출신인 김준식 씨는 작가와 같은 전북 출신이다 보니 작가를 통해 내 고향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며 혼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작가가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대해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좋다고 말했다. <혼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 혼불문학관은 노봉마을 윗자락, 청호저수지를 끼고서 이 근방을 전부 내려다보는, 가히 백대천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릴 만한 자리에 지난 2004년 들어섰다. 문학관에서는 <혼불> 이야기와 최명희 작가의 생애에 대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최명희 작가의 생전 집필 공간을 재현해 놓은 부분이 눈길을 잡아끈다. 오는 11월 4일, 남원 사매면 서도길에서는 <혼불>을 사랑하는 마을 주민들이 팔을 걷고 신행길축제를 연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옛 서도역을 중심으로 혼불문학관 등 노봉혼불문학마을 일원을 무대로 하는 마을 잔치다. 주민들이 잔치국수 등 푸짐한 음식을 지어 축제를 찾는 이들과 오순도순 나눠 먹고 농산물 프리마켓 등 농경문화 체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김은미 사무장은 이날 낮 11시 개막을 앞두고 가장 먼저 손님들을 맞이할 신행길 재연 행렬에 주목해보라고 추천했다. 옛 서도역에서 마을회관을 거쳐 혼불문학관 혼례청까지 이어지는 이 행렬은 혼불 속 효원 아씨 신행길을 뼈대로 마을 사람들이 직접 꾸민다. 소설 속 한 대목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기회다. 그맘때면 옛 서도역 앞이 노오란 국화꽃들로 진하게 물들겠네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정말 예쁜데, 다음에 한 번 또 구경 오세요. 김 사무장이 귀띔했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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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1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⑨ 봉천역·오수역] 철길이 관통하는 ‘개와 사람의 시간’

춘향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는 길. 조물주가 처음부터 이 땅을 길로 쓰라고 만들어놓은 듯, 좌우 양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맥이 늘어서며 춘향로를 호위한다. 섬진강 상류의 한 줄기인 둔남천이 옆에 바짝 붙었다. 철길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서편 산기슭을 훑으며 지나던 것이, 산지를 관통하는 터널 속으로 숨었다. 물론 무슨 지하철처럼 땅속으로만 달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수면을 지나 오수면으로 접어들자마자, 철길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얼굴을 내민다. △ 봉천, 무역할의 역할 뜬금없게도,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에 역이 하나 있었다. 생긴 것은 서울의 도시철도 역, 그러니까 대충 한 2호선 지상 구간 어디쯤의 역 같은데, 오가는 사람은 없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고 보니 서울 도시철도 2호선에 봉천역이라는 역이 또 있었지. 아마 봉천역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그쪽 봉천역을 떠올릴 것이다. 한글로 써놓으면 같은데, 한자가 다르다. 이쪽은 鳳泉이고, 서울 2호선 봉천역은 奉天이다. 공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금속 가림막 앞에 봉천역이라 적힌 간판이 누워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가려면 철문을 하나 통과해야 하는데, 원래는 있었던 맞이방 같은 시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붉은 벽돌로 치장한 역사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무채도의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혼자 맑고 푸른 빛을 뽐내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서대전익산전주방면이라는 표지가 흥미롭다. 종착지가 용산이 아니라 서울인 점이. (이 역이)지금은 어떤 역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여객 수요 문제도 있고, 정차역이 점차 줄어든 영향도 있죠. 바람이 세차게 부는 플랫폼 위에서, 조연호 오수역 시설관리반 선임장(48)의 말이 무덤덤하게 날렸다. 죽림온천역처럼 쌍섬식 플랫폼을 갖춘 선하역사 구조인데, 그래도 얼마간은 승객들이 이용했던 죽림온천역과는 달리 봉천역은 그런 기억조차도 없다. 2004년, 단선 시절 전라선에 있던 오류역과 봉천역을 합친 새 봉천역이 이곳에 들어섰다. 바로 전해인 2003년 열차를 타거나 내린 이가 오류역이 213명, 봉천역이 660명이었는데, 그러니까 둘이 합쳐도 연간 1000명을 못 넘는 신세였다. 훨씬 전에는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이를테면 1977년에는 오류역과 봉천역이 나란히 4만5000여 명의 이용객 수를 기록했다), 어쨌든 이용객 수로 전라선 최하위권이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의 봉천역은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약 840만 명이 이용했다. 그런 고로, 2004년에 여객 취급이 중단돼 버렸고, 새 역은 지어지자마자 버려지는 신세가 됐다. 원래는 관촌역에 있었던 것과 같은,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시설도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 벤치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흔적뿐. 역명판도 뽑혀서 측선 자리 쪽에 누워 있다. 시설물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서 철거한 것이라 한다. /권혁일 기자 △ 임실은 안 서도 오수는 선다 오수면은 2010세대 4392명(2016년 통계 기준)이 사는, 임실군에서 임실읍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이다. 그 중심부는 둔남천과 오수천이 이룬 부채꼴 평야 지대에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이곳에 있던 오수역은 조선 후기까지도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오수역은 철도역이 아니라 역참제의 역을 말하는 것이다. 둔남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옥색 아치가 보이면, 거기부터가 오수면 중심부고, 이 다리를 건너면 2004년에 새로 지어진 새 오수역이 나온다. 대명리 수로고개 초입 즈음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헤어진 철길은 터널과 다리를 거쳐 오수역에 이른다. 산과 내를 일직선으로 질러가느라 철길이 지상 십여 미터 위에 떠 있는 탓에, 역도 꽤 높이 돋운 자리에 들어섰다. 오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의견(義犬) 상징물이 옆에 함께 서 있다. 석재로 외장을 두른, 전형적인 2000년대 초 공공건물처럼 생긴 역사. 그 안 아담한 맞이방에서는 대부분 노년층인 승객들이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마을호 특실 등급인 남도해양관광열차가 플랫폼을 스쳐 쌩 지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오전 11시 50분, 용산행 무궁화호 도착을 5분여 남짓 앞두고 역무원이 플랫폼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자 승객 10여 명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양순덕(74) 씨는 멀리 여행을 떠나듯 보따리가 한 짐이다. 두 손 무겁게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서울 사는 아들 만나러 가는디, 필요하게 생긴 거 이것저것 챙겼다며 웃음으로 답했다. 여그서 태어나 이때까지 평생 살면서 기차 많이 탔지. 우리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멀리 갈라면 기차가 편해. 화장실도 있응게. 오수역에는 전라선의 무궁화호 등급 열차가 빠짐없이 멈추는데, 이는 임실역보다도 상하행 4편씩이 많은 것이다. 2015년 한 해 오수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8만9305명. 같은 해 임실역은 7만3627명이 이용했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 레일 잃은 옛 역사엔 추억만 옛날엔 역이 커서 오수, 삼계, 지사면 쪽 사람들이 전부 이 역을 이용했죠. 지금도 많이들 이용하고요. 옛 오수역사 인근 식당에서 만난 이해숙 씨(60)는 임실엔 안 쉬는 기차도 오수에는 쉰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수면 사람들은 역까지 전부 걸어 다녔다고도 덧붙였다. 이정표는 없었지만, 옛 오수역사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수면사무소에서 삼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똑바로 걸어가면 금방이고, 오수초등학교가 바로 앞에 있다. 과연 걸어서 다닐 만한 위치다. 더 쉽게 가고 싶다면, 마을 초입에서 의견로를 타고 직진하면 그만이다. 이 의견로가 바로 옛 전라선 철길이 있던 자리다. 식당 맞은편에서 만난 김균자 씨(59)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오수역 원주민이다. 아버지가 철도와 관계된 일을 하셨다고 했다. 저 식당이 사택이었어요. 관사. 일본 사람들이 지어놓은 우물도 있었고. 옛날엔 사쿠라 나무도 많았어요. 나무 올라가서 노는 애들도 많았지. 역무원들이 무임승차자 잡으러 뛰어다니던 풍경도 생각나고. 사쿠라 나무는 벚나무다. 김 씨는 사실 어렸을 적엔 사쿠라 나무랑 벚나무가 다른 것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김 씨는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리면 준비, 땅!을 외치며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하교하는 오빠를 마중하러 달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어린 날 김 씨는 저녁노을을 배경 삼아 오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옛 오수역사는 고요했다. 1931년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처음 문을 열었다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있는 이 건물은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다.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벽 위에 오수역이라는 간판과 옥색 지붕이 올라가 있었다. 한쪽에 오수자율방범대라고 쓰인 간판이 함께 걸려 있었고 같은 글자가 쓰인 차량도 한 대 주차돼 있었지만, 역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방범대가)요즘은 활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차가 다닐 적에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였을 앞마당에는 마을 주민이 널어둔 듯한 곡식들이 한여름 햇볕을 만나 바삭바삭 마르고 있었다. 이제 더 사람이 떠날 일도, 돌아올 일도 없는 이 건물은 사람들의 온기 대신 먼지와 거미줄로 채워져 있다. 낡아 여기저기 금이 간 벽면과 뜯어져 나간 천장만이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뒤편에는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와 인도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초가집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을 나무 벤치와, 한때 여러 소식을 전했을, 옛 삼각형 로고와 한국철도 표식이 붙어 있는 게시판, 이용객들이 열차표를 샀을 구멍 뚫린 창 정도를 제외하면 철도와 관련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건물 한쪽엔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임실군청은 별다른 보존활용 방안을 세워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오수역 이전 이후 옛 오수역 부지는 매입했지만 건물은 매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익산시가 나서서 옛 물건들을 보존하고 각종 사진 자료와 지역 주민 구술 채록 자료 등으로 꾸민 춘포역과 비교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균자 씨는 오수역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레일도 없어지고 관리도 잘 안 돼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레일을 다시 놓을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 가까운 서도역과 어떻게 연계할 수는 없을지 곡성역처럼요. 오수역이 살아있는 역이 됐으면 좋겠어요. 잊히지 말았으면. /권혁일김태경 기자 △ 오수義犬, 오수의 犬 오수 주민들의 애견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보였다. 오수역의 어제와 오늘을 사이좋게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 오수교를 지나 오수공용버스정류장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정미소 건물에는 개 캐릭터 벽화가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있다. 여기도 개, 저기도 개, 전부 개다. 고려 후기에 최자가 엮은 시화집 '보한집'에는 당시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키웠다는 의로운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취한 채 들판에 누워 낮잠을 잔다. 그러던 중 들녘에 불이 붙어 퍼지면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 상황을 본 개가 냇가로 들어가 물을 적신 후 제 몸을 던져 그 불을 끈다. 그렇게 불길이 잡히고 김개인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개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 같은 개의 충성심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져와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새겨준다. 오수(獒樹)라는 지명도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주인이 개를 묻으면서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 개(獒)와 나무(樹). 개의 충성심이 마을 이름까지 선물했다는 이야기다. 이 의로운 오수의 개의 명성은 오수면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오수리 시장 옆 원동산 공원에 세워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인 의견비가 대표적인데, 이는 말 그대로 주인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한 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아담한 공원 안에는 비석 말고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의견 동상이 있는데, 두 앞발을 언덕 위에 '척'올리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그 기상에서 사뭇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임실군문화체육센터 옆 오수의견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연못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여러 의견 동상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이름하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주인 사랑 챔피언 견들'이다. 신라 시대 오수개, 영국의 보비, 일본의 하찌코, 알프스의 배리, 미국 알래스카의 발토 등. 저마다 제 주인과 아름다운 이야기보따리 하나씩 간직한 친구들이다. 공원 바깥쪽으로 나와 의견교를 바라보며 천변을 따라 걷다 보면 강아지풀들이 반겨주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다리 초입에는 이제 오수에서 빠지면 서운할 개 석상도 양옆에 자리해 있다. 이 다리를 지나가는 도로 이름이 의견로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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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2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⑧ 관촌역·임실역] 비수기와 성수기 사이, 그 어디쯤에서

하늘 어딜 봐도 파란 구석이 없었다. 회색 커튼이 햇빛을 깔끔하게 막아선 가운데, 그 아래로는 구름인 듯 안개인 듯 고양이 털을 뭉쳐놓은 것처럼 생긴 덩어리 몇 조각이 고갯길을 휘감으며 저공비행 중이었다. 춘향로를 타고 슬치 남쪽 사면을 굴러 내려가면 이제 임실군 땅으로 접어든다. 길 동쪽으로는 번화한 마을이 나오고, 계속 나아가면 섬진강의 상류인 오원천과 마치 호남제일문처럼도 보이는 사선문이 차례로 인사한다. △옛 얼음창고와 승강장 옛 시설물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또 비탈을 내려오니 펼쳐진 것은 평탄한 들녘. 조금 전까지의 풍경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관촌역은 그 평지 위에 서 있었다. 마치 학교 건물처럼도 생긴 꽤 큰 역사(驛舍)는 1997년에 지어진 것이다. 관촌역이 그때 처음 생긴 것은 물론 아니고, 1931년에 전라선(당시 이름 경전북부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될 때 배치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관촌면사무소와 버스 터미널, 초중학교가 있는, 그리고 고려조선 시대 오원역이 있던 면 중심지로부터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이용객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1970년대만 해도 한 해 이용객 수가 19만여 명으로, 이는 임실역보다 근소하게 많은 수준이었다. 역과 오원천 사이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됐음을 알 수 있는 회색 건물이 서 있다.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었다는 주민 임남례 씨는 얼음창고라고 설명했다.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 얼음을 여기다 쟁여놨다가 전주, 군산으로 실어가고 그랬죠. 그만큼 번성했던 마을이라는 뜻이겠다. 관촌역 앞을 지나는 차량은 많지만,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관촌역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2002년에 개통된 병암지하차도 때문이다. 대부분은 지하차도를 지나 쌩 내달리고, 병암리나 대리 어딘가에 볼일이 있는 차량 정도가 길 가장자리로 빠져나온다. 이 가운데서도 관촌역에 볼일이 있는 경우는 매우 적다. 일단 열차를 탈 일이 없다. 이곳에 서는 여객열차는 이미 2008년 12월 1일부로 사라졌다. 여객열차가 서지 않게 된 이유야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 2008년의 11개월 동안 관촌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이가 310명에 불과했다는 통계만 봐도 그렇다. 전주나 남원까지 시원하게 내달릴 수 있는 춘향로가 그대로 관통하는데, 마이카 시대에 철도가 여객 분야에서 딱히 경쟁력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 임실역과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취재진이 찾은 7월 24일은 마침 화물도 비수기를 맞은 시기였다. (관촌역에서는)비료를 주로 취급하는데요, 1~6월은 농번기 대비로 비료가 많이 올라가죠. 지금(7월 하순)은 끝났어요. 관촌역 관계자가 화물 플랫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근에 군부대가 있는 터라 군 관련 화물을 취급하는 것 또한 관촌역의 주요 업무에 속하지만, 마침 또 시설 공사로 한동안 관련 업무가 멈춘다고 했다. 그야말로 비수기 중 비수기인 셈이다. 그래도 비수기라고 해서 역이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날도 화물 플랫폼에서 트럭 한 대와 지게차 한 대가 비료를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객 승강장으로 나가려면 일단 좌우를 살펴야 한다. 육교도 지하도도 없이, 열차가 지나는 철길을 그대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살피다 보면 왼쪽에 서 있는 주목 두 그루가 눈에 띈다. 아는 사람은 아는, 관촌역의 명물이다.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맺히는데, 주민들이 이 열매를 종종 따먹기도 했단다. 임남례 씨도 그랬다고. 아마 나무가 나보다 늙었지? 빨간 열매가 열리는데, 따먹어도 암시랑 안 혀. 그래도 씨앗 부분에는 독성이 있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먹어서는 안 되겠다. 플랫폼은 휑했다. 역명판도 없고, 타는 곳 알림 표지도 없다. 과거 여객열차가 설 적에는 플랫폼에 버스정류장처럼 생긴 시설이 있었는데, 이것도 어느 틈에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붉은 플랫폼 가운데 하얗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화물열차와 KTX가 무심히 지나가고,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황급히 우산을 받쳐 들자마자 ITX-새마을 열차 한 편성이 비를 뚫고 남쪽으로 달렸다. 권혁일 기자 △내일러 중간 기착지 임실 한 무리의 승객들이 플랫폼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친구가족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대학생 내일러 김희엽 씨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오늘이 내일로 2일차예요. 임실역에는 치즈테마파크 때문에 들렀어요. 체험활동을 예약해 놨거든요. 임실 다음엔 여수로 갈 계획입니다. 이날, 이렇게 유난히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역 광장으로 나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택시들이다. 베이지 톤의, 동글동글한 인상을 주는 역사(驛舍) 앞의 광장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있었다. 어디들 가시려구요? 승객을 기다리던 한 택시기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그에 따르면, 다른 지역에서 관광을 위해 기차를 타고 임실역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택시를 타고 전북119안전체험관, 치즈테마파크 이 두 곳을 목적지로 부른다고. 그렇다면 치즈마을은?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주로 걸어가는 이들이 많단다.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임실역을 기점으로 잡으면 이렇게 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물론 치즈마을을 거쳐 테마파크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임실역에서 치즈마을까지는 성인 걸음으로 20여 분 남짓. 역을 뒤로하고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철로 밑으로 굴다리가 나타난다. 그곳을 통과해 임실치즈마을, 어서오세요라고 쓰인 알록달록한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도로변을 따라 한 줄로 서서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금성교라는 이름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다리를 장식하고 있는 샛노란 치즈 모형에 잠시 시선을 뺏긴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맹공격을 퍼붓고, 사람은 익어간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면,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느티나무 그늘이 환영 인사를 건네 온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큰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앞에 마을 구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그 뒤로는 금성천(방염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마을의 중심에서 여름 한 자락을 수놓고 있다. 치즈교라는 앙증맞은 이름의 짤막한 다리도 있다. 임실 치즈가 유명 브랜드로 자리 잡고 치즈마을이 남녀노소가 사랑하는 관광지가 되기까지엔 벨기에에서 온 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의 노력이 컸다.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그가 1966년 임실에서 산양 두 마리를 키우면서 임실 치즈의 역사는 시작됐다. 연평균 기온, 강수량 등 기후조건과 자연환경이 젖소를 사육하는데 알맞아 목장과 유제품 공장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치즈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임실치즈테마파크가 나온다. 치즈테마파크는 치즈판매장, 치즈&식품연구소, 레스토랑, 치즈숙성실, 유가공공장, 홍보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치즈 판매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유럽의 성과 닮은 건물이 떡하니 자태를 드러낸다. 동화 속 나라에 온 듯한 기분도 내본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 앞에서는 한 아이가 양팔을 휘젓고 있고,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그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는 20대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단연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포털 사이트에서 '임실 여행'을 검색하면 치즈마을과 치즈테마파크에 다녀온 이야기가 넘쳐난다. 정종인 임실역 부역장은 기차에서 내린 내일로 여행객들은 주로 치즈마을이나 치즈테마파크로 가는 길을 물어오곤 한다고 말했다. 점차 활성화돼가는 임실역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는 육군 35사단이 전주에서 임실로 이전하면서 군인들도 많이 보게 됐다고 덧붙였다. 역과 부대 사이를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영된다고. 지난해 6~8월 기준 임실역 이용객 수는 월평균 6315명. 지난 한 해 이용객이 월평균 6099명이었으니, 여름철, 그러니까 내일로 시즌의 이용객이 많은 편이다. 다만 아직 활성화의 효과는 본격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역 앞 슈퍼마켓에서 만난 주민은 활성화에 대해선 다소 부정적인 답을 내놨다. 글쎄요. 옛날보다 사람이 늘진 않은 것 같은데. 시간과 투자가 좀 더 필요한 걸까? 지난 2015년 임실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7만3627명이었다. 7월 25일 낮 12시 20분, 임실역. 상하행 플랫폼에 딱 하나씩 있는 벤치와, 그 벤치 위로 드리운 푸른 지붕, 그 뒤로 보이는 푸른 들판과 더 뒤쪽의 능선이 만드는 풍경이 자못 목가적이었다. 고요를 깨고, 남쪽에서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달려와 그 풍경에 자기 몸을 보탰다. 익산으로 향하는 이 무궁화호에서 내린 이는 단 두 명. 15개월 된 아이와 함께 내린 공성원 씨는, 휴가를 맞아 친구가 사는 집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아이 장난감이 잔뜩 담긴 가방은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뭉게구름처럼 가볍고 평화로워 보였다. 공 씨 일행이 떠나고, 열차도 떠나고, 임실역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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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2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⑦ 신리역·남관역·죽림온천역] 물 흐르는 대로, 산 휘어진 대로…이제는 멈출 일도 없이

좁은목을 지나고부터는 산이 마치 골목의 담장처럼 전주천 좌우로 늘어서, 정말 이름 그대로 좁은 통로가 된다. 이 지형으로 전주와 남원 사이를 잇는 춘향로와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 그리고 전라선 철길이 전주천과 함께 달린다. 물길과 찻길과 철길이 나란히, 혹은 서로 교차하며 달리는 셈이다. 이들의 공존은 전주천 발원지 인근인 완주군 상관면 슬치까지 이어진다. 철도는 색장동을 지나, 완주군 상관면으로 접어든다. 그 경계에 해당하는 것은 신리터널이다.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에 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단선이던 전라선 옛 구간에 있던 옛 신리터널은 1931년 10월 개통돼 70년 가까이 쓰이다가, 2011년 5월 전라선 복선전철화 개통 후 버려졌다. 이곳이 2015년에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지난 6월 27일, 취재진은 마중물 갤러리가 된 옛 신리터널을 찾았다.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월암교를 지나 곧장 좌회전하면 나오는 곳이다. 월암교 동단부터 선로를 걷어낸 기찻길 터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침목도 레일도 없이 자갈들만이 옛 모습을 추억하는 듯 드문드문 깔려 있다. 갤러리 바로 옆 위쪽에 뚫린 새 터널에는 이따금 기차가 쌩 지나간다. 지난 시대를 바로 옆자리에 두고, 빠르게도 멀어진다. 입구 앞길 정원에는 옛 철길자리 양옆으로 온갖 식물이 장식돼 있다. 입구에서부터 찬 기운이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온도계는 14~16도에 머물러 있다.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이곳을 주로 찾는 것은 미술작품 전시 관람과 도예 수업을 위한 발길들. 주말에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고, 평일에는 강의와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올 4월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하는 강옥자 씨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이곳에서 별별미술관을 꾸리고 있는 그는 이 공간을 그림, 도예, 만화 등 미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터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습기가 많아요. 그래서 종이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죠. 여기 전시된 작품은 거의 다 제가 그리고 만든 것들이에요. 제 작품들이 실험대상이 된 셈입니다. 습기 때문에 종이가 버티기는 힘들지만, 대신 조소 작업에는 유리한 면이 있다고 한다. 흙이 빠르게 굳지 않아서다. 이곳의 구조는 단순하다. 오로지 직진뿐이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 휴게실 등 구획이 나뉘어 있긴 하지만, 샛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구부터 반환점까지가 전부 하나의 큰 덩어리 같다. 기차 입장에서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통과하던 길. 길이 225m, 딱히 긴 터널도 아니고, 특별할 것도 없던 통로였겠다. 하지만 이제는 양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과 천정의 장식을 살피느라 저절로 뒷짐 지고 사뿐사뿐 걷게 되는 길이다. 터널 저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며 자꾸만 나아가게 되는 별 희한한 미술관이다. 강 씨와 함께 터널의 북쪽 끝, 전주시 색장동 땅으로 나왔다. 강 씨가 포부를 밝혔다. 수익 고민을 안 하긴 어렵죠. 하지만 전 이 공간이 우리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이 미술을 배우고 작업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바로 옆의 새 철길로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쌩 지나갔다. 역시 속도 차이가 엄청나다. /김태경 기자 신리는 새마을이다. 새 신(新)에 마을 리(里)를 쓴다. 완주군 상관면의 중심지로, 한일장신대가 이곳에 있고, 전주 남부를 빙 돌아온 국도 21호선이 이곳에서 춘향로(국도 17호선)와 만난다. 우체국면사무소와 신리역 등 상관면의 주요 시설도 이곳에 있다. 높이 솟은 신세대 지큐빌 아파트를 보면 정말 새마을 같은 느낌이 든다. 1931년 문을 연 신리역은 상관면의 중심역이나 다름없는 역이지만, 여객 수요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신통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인 2005년 이 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602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간선열차 이용객은 967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통근열차 폐지가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난 2010년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1981년 지어진 凸자 모양 옛 역사는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역 광장이었던 자리는 주차장이 됐다. 역의 기능은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옮겨졌지만, 맞이방도 없고 도로 쪽 출입문도 따로 없는 새 역사는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 물론 이 역에는 아무도 없다. 전주역에서 이곳까지 관리하는데, 취재진이 찾은 이날(6월 26일)도 전주역 관계자가 동행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리 없는 플랫폼에는 파릇파릇 풀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플랫폼 남쪽 끄트머리에는 화단(?)이 있었다. 루드베키아가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일명 계란꽃이라고도 하는 개망초 같은 들꽃들도 눈에 띄었다. 전주역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니다고 하는데, 고속열차도 다니는 간선철도 구간에서 열차가 들꽃 바로 옆을 지나가는 모습이 결코 흔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퍽 재미가 있다. 새 역사 주변에는 철길의 유지보수를 위한 자재 따위가 보관돼 있고, 둘레에는 공사장을 방불케 하듯 고철 기둥들이 쌓여 큰 언덕을 이루고 있다. 옛 역사 자리 인근 공터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던 주민 이정두(69) 씨는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던 일을 까마득한 시절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옛날에 학교 다닐 때나 어쩌다 친구가 찾아오면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며 전주와 가깝고 시내버스도 다니다 보니 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신리역 터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752번과 같이 전주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버스들이 20~30분 간격으로 멈추곤 한다. 그러니 신리역이 까마득한 옛 시절처럼 자기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옛 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별 특징도 없이 흔한 건물이었음에도. /권혁일김태경 기자 도로 동쪽에 큰 건물 몇 채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죽림온천 단지의 뒤로는 전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또 전라선 철도가 지난다. 1993년 개장한 죽림온천은 전북의 대표 관광지가 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보도된 내용을 보면 개장하자마자 하루 평균 이용객 2000여 명, 주말이면 6~7000명 이상도 몰렸다는데, 1996년에는 한 해 동안 이곳을 찾은 이가 무려 114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죽림온천 단지라고 하지만, 사실 이 단지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온천이 두 곳 있었다. 북에서 두 번째 건물이 죽림온천, 그리고 다섯 번째 건물이자 가장 큰 건물이 송산온천이었는데, 대체로 수질은 죽림온천 쪽이, 시설의 쾌적함은 송산온천 쪽이 우세하다는 것이 당시 이용객들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사업 주체 간의 갈등과 자금난 등이 겹치면서 초기부터 휴업과 재개장이 반복됐고, 결국 지금은 두 온천은 운영되지 않는 상태다. 이 상태로 벌써 몇 년은 흘렀는데, 다만 두 온천 사이에 위치한 상가는 아직 살아있다. 온천 단지 남쪽, 높이 자란 나무들 뒤로 죽림온천역이 보일락 말락 서 있었다. 철도를 떠받치는 교각 아래로 들어가면, 죽림온천역이라는 팻말과 함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혹여 역사 정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나 둘러봤지만, 그런 것은 없고 오직 다리 밑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렇게도 들어갈 수 없다. 원래 출입구였어야 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시설관리원 김영수 씨(56)가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이곳에는 김 씨를 포함해 시설관리원 3명만 남아 있다. 이들은 선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는 시설관리반만 남아있죠. 적자 때문에 여기뿐 아니라 신리, 봉천, 서도, 산성, 주생, 금지, 이런 역들 다 폐쇄됐거든요. 엄밀히는 폐쇄된 역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여객취급만 중지돼 있을 뿐이지 춘포역이나 송천역, 아중역처럼 아예 폐역된 것은 아니다. 그러면 뭐하나. 열차는 멈추지 않고, 탈 열차가 없으니 올 승객도 없다. 1999년 5월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1단계 신리~임실 구간 개통과 함께 문을 연 죽림온천역은 원래 도로 건너편에 있던 남관역을 계승하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죽림온천 이용객 수요를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99년이면 죽림온천이 슬슬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였고, 역사의 위치도 미묘하게 불편했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죽림온천역 개업 이듬해인 2000년 한 해 이용자 수는 2265명이 전부였다. 과거 역 직원들이 찾던 식당을 운영했다는 동네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없응게. 마을이 윗동네 열 가구, 여기 서너 가구, 다리 건너 동네도 한 서너 집 있나? 빈집이 많아요. 또 집에들 차가 다 있으니까. 역 생기자마자 온천도 저렇게 돼서. 지난 2006년 11월,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역사에는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와 용산~여수 간 무궁화호, 이렇게 상하행 두 편씩만 적혀 있는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남아있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는 전주죽림유황온천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커다란 거울 두 장이 붙어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서면, 빛깔이 죄다 바래서 무채색으로 통일된 풍경이 나타난다. 사람이 앉은 지 대체 몇 년이나 지났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의자에는 시꺼먼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고, 팻말들은 녹이 슬어 있었다. 바닥 일부는 빗물을 오랫동안 맞아서인지 움푹 패 있었다. 하선에 녹색 신호가 들어왔다. 곧 누리로 열차 한 편성이,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하는 예의 그 멜로디 경적을 올리고는, 속도를 유지하며 플랫폼으로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쪽으로는 이제 한때 국내에서 가장 긴 일반철도 터널(6128m)이었던 슬치터널이다. /권혁일 기자 남관초등학교 맞은편, 버스정류장 뒤쪽에 길 하나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잠깐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하나 갈라지고, 오른쪽으로는 평탄한 부지가 나타난다. 죽림온천역의 전신이자, 산악철도 전라선을 상징하는 역이던 남관역이 있던 자리다. 역사나 플랫폼 등 구조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의외로 그 터는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곳곳에 철도공사 자산이라고 적힌 팻말이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슬치 고개는 만경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면서 완주군과 임실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경사가 심해 통행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춘향로를 타고 자동차로 넘기에도 험한 편인데, 급경사(급구배)에 취약한 철도로는 이 슬치 한 번 넘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 시절에는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던 열차들이 이곳에서 멈춰 증기압을 올린 뒤 달려야 했다고 한다. 갈 때 급한 오르막이면, 올 때는 급한 내리막이다. 관촌에서 슬치를 넘어 내리막을 타던 열차가 제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고 위험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왼쪽에 있던 피난선이었다. 지형을 이용해 열차를 멈추던 시설이다.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사고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다. 1990년대에도 연중 1~2차례씩은 벌어지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서기섭 씨(60)는 옛날에는 슬치재 경사가 심하니까 열차가 못 올라가고, 그럼 올라가다 거기서 내리고 그랬다면서, 이 자리가 옛날에 열차가 브레이크 못 잡으면 이쪽으로 보낸 선이다고 말했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따르면, 남관역은 1929년 6월 16일에 죽림역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문을 열었다. 이후 1931년에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면서 남관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보통역으로 격상된다. 40년 이상 그렇게 지내 오다가 1977년 5월 16일, 승객 부족을 이유로 여객 취급이 중지된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여객 취급이 중지되기 전까지 남관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5783명이었다. 다만 단선이던 전라선의 상황과 슬치를 넘어야 하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신호장으로서의 역할은 계속 남아있었다. 그러다 1999년, 신리~임실 구간이 복선으로 이설 개통된다. 복선이 됐으니 이제 열차 교행을 위한 시설이 필요 없어졌고, 슬치는 터널로 지나게 되니 피난선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남관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권혁일 기자

  • 기획
  • 전북일보
  • 2017.07.07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⑥ 전주의 옛 흔적] 철길은 아스팔트가 덮고, 역 자리는 무엇이 덮었나

p.introduction:first-letter { font-size: 45px; float: left; color: #906; line-height: 35px; padding-top: 7px; padding-right: 3px;}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넓지도 않은, 기껏해야 2차선밖에 안 되는 도로를 몸집 큰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건널목 차단기는 올라가 있었다. 북전주역에서 빠져나온 철길은, 한 가닥은 아스팔트의 강을 가로질러 이제는 흰 꽃잎을 다 떨어내 버린 이팝나무들 사이로 뻗었고, 또 한 가닥은 한일시멘트 공장 방향으로 누웠다. 지난 5월 26일, 취재팀은 전주 팔복동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부터, 전주를 관통하던 옛 전라선 철길의 흔적을 더듬었다. 철길 걷힌 자리엔 자동차가 이게 원래 철길 자리여. 텃밭에 바가지로 물을 뿌리고 있던 정운오 씨(76)는 바로 앞을 지나는 4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전주역 앞에서 추천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신복로다. 옛날 철길의 모습이 어땠는지 묻자, 정 씨는 풍경이랄 게 뭐 있어라면서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기가 (손을 높이 드는 시늉을 하며)이렇게 높았거든. 철길이 그 위로 지나가고. 저쪽 버스 서 있는 데 있잖여? 거기 조금 못 미쳐서 굴다리가 있었어. 동네로 들어가는 길, 굴다리. 높이 돋운 노반 위에 누운 철길은 마을 사람들에겐 일종의 장벽이었다. 굴다리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을 터. 정 씨도 종종 철길을 넘어 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1981년에 전라선 철도가 전주시 외곽으로 옮겨지고, 과거 철길이 차지하던 공간은 도로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복로 일대는 자동차 공업사가 밀집해 있고 폐차장과 운전면허학원도 찾아볼 수 있는, 자동차와 관련한 종합 패키지와도 같은 지역이다. 정 씨의 텃밭을 뒤로하고서 반듯한 길을 따라 쭉 걷자 추천이 나타났다. 추천이라고 하면 약간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천과 삼천이 하가지구 즈음에서 만나 한 몸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추천이 된다. 인근에 추천대라는 누각이 있고, 추천대교가 가로지른다. 봄철이면 하안이 벚꽃으로 물드는데, 그런 벚꽃길이 그대로 쭉 만경강 둑방길로 이어져 춘포, 목천포 어드메까지 장관을 이룬다. 옛 철길은 신복로 자리로 흘러 내려와서 추천대교 바로 위를 지났다. 아쉽게도, 철교가 있었던 흔적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플랫폼엔 창포 향도 났을까 추천을 건너면 이제는 철도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권삼득로와 기린대로 사이 어디쯤을 가로지르는 직선인데, 블록마다 도로(라기보단 골목에 가까운 길)가 끊어지는 탓에 어떤 도로가 정확히 일대일로 옛 철길과 대응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짓긴 어렵다. 그래도 역의 흔적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덕진 시외버스 간이터미널(정류장), 덕진광장이 바로 옛 덕진역의 흔적이다. 마침 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빨간 시외버스가 정차 중이었다. 버스는 군산대야익산 방향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충남 보령이나 충북 청주, 강원 강릉 등지로 가는 버스도 탈 수 있다. 덕진역은 전라선의 전신이자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의 후신인 경전북부선이 표준궤로 개축된 1929년에 개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향토역사학자 이용엽 선생의 부친인 故 이상래 선생의 1916년 5월 21일 자 일기에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임시 운행돼 운동장 인근의 덕진역을 통해 이리 출신 관중이 운집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또 1942년 발간, 2009년 국역 출간된 <전주부사>에는 경편철도는 전주이리 양 역 사이 15.56마일의 협궤 증기철도로, 전주평야를 대략 남북으로 종단하며 전주 방면으로부터 덕진동산삼례대장 및 구이리(동이리) 5개 역을 연결했으며 선로의 위치도 지금과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어, 이를 보면 이미 경편철도 시절에도 덕진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덕진터미널이 그렇듯 당시에도 전북대 통학생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60~70년대엔 또 단오 무렵이면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창포가 많이 자라는 덕진연못의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 머릿결이 고와지고 피부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널리 돌던 때였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폐역 전해인 1980년의 덕진역 이용객 수는 88만 1973명이었다. 그해 전라선 역 가운데선 이리, 전주, 순천, 남원, 여수에 이어 여섯 번째다. 마지막 해인 1981년의 통계를 보면 위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981년 5월 폐역 직전까지 덕진역 이용객 수는 39만 1341명이었고, 덕진역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5월 25일 문을 연 송천역의 연말까지의 이용객 수는 5만 1608명이었다. 기간은 송천역이 두 달여가 긴데도 이용객 수는 8대 1 수준, 덕진역의 완승이다. 그랬던 덕진역이 1981년 폐쇄되고, 이 자리가 1987년 교통광장으로 지정된 뒤 90년대부터는 시외버스가 이곳에 멈춘다. 또 일부는 주차장이 된다. 이후 시민광장 조성 사업을 거쳐 2010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뀐다. 덕진을 지난 철길은 금암동 전북일보사 뒤쪽 골목을 지나 금암광장으로 향했다. 물론 전북일보사 건물은 1984년에 지어졌으니, 철길과 이 건물이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암광장 즈음부터는 기린대로를 따라가면 된다. 정확히 그 자리가 철길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산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낯을 볼 수 없는 모래내(건산천)를, 철도는 다리로 건너 그대로 직진한다. 진북동을 가로질러, 철길은 노송동으로 들어선다. 대로와 광장과 전주역 전주시청 건물은 볼 때마다 새롭다. 풍남문의 모양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쓴 현대 건축물 구조 가운데에 한옥 기와지붕이 얹혀 있다. 좋게 말하면 신-구가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라 하겠고, 좀 나쁘게 말하면 어색하게 뒤섞인 모양이라 하겠다. 그만큼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일단 전문가들 눈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지난 2013년 동아일보와 월간 Space가 공동으로 건축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주시청사는 최악의 현대건축 19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강박관념으로 이어져 빚어진 변종이라고 혹평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현대 도시로서 쌓아 올린 구조 위에서 제 나름대로 전통을 해석해 공존하는 길을 걷고 있는, 전주의 그 근현대사를 몸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전주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시청사 앞 노송광장은 전주시청사가 들어서기 전부터 광장이었던 곳으로, 큰일이 있을 때 전북도민이 이곳에 모여 목소리를 내곤 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 15일 오후 2시, 이 광장에는 1만여 명이 모여 연행 학생 석방과 계엄령 철폐 등을 외쳤다. 광장 한쪽에는 지난 2014년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가 세운 1980 민주화 운동 집결지라는 글귀가 적힌 비석이 이 장면을 기리며 서 있다.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이 자리. 1980년 당시만 해도 광장 뒤에 서 있던 건물은 전주시청사가 아니라 전주역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10월 1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를 매수해 국철화한다. 이때부터 이 철도의 이름은 경전북부선이 된다. 762mm 협궤를 그대로 쓰던 경전북부선은 1929년에는 1435mm 표준궤로 개축되고 일부 구간이 이설되는데, 상생정(현 태평동)에 있던 전주역사는 이때 노송정(노송동)으로 옮겨졌다. 새 역사는 주민 요구에 따라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으로 지어졌다. 경전북부선은 여기서 남쪽으로 연장된다. 1931년에는 남원, 1933년에는 곡성, 1936년에는 순천까지 이어졌고, 이미 개통돼 있던 순천~여수 구간이 연결되며 드디어 완전체가 된다. 전라선이 된 것도 이때다. 다시 동남쪽으로 발을 뗀다. 지금은 호텔 르윈(옛 리베라 호텔)과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등이 들어서 있는 옛 전주여중전주여고 옆을 스쳐 지나가, 오목대 구름다리 밑을 지난다. 언덕배기라 그런지, 열차가 이곳에만 오면 속도가 느려져서 달리는 열차에서 그냥 뛰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벽루 옆 터널을 지나, 철길은 전주천을 따라 흘러갔다. 숨길 또는 전주 한옥마을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길이다. 그렇게 승암사와 치명자산 성지, 대성동과 색장동을 거쳐 전주를 빠져나간다. 이즈음에서 흔적은 지난 2011년 복선전철로 새로워진 전라선 철길과 재회한다. 만경강을 건널 때만 해도 주변에 펼쳐져 있던 평야는 보이지 않고, 이제는 산이 좌우에 늘어선다. 권혁일 기자 태평동에 겹친 세월 입구에 들어서자, 널따란 비빔밥 상징원에 금방 살아 숨 쉴 것 같은 소 동상이 취재진을 반겼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서니 좌우로 굴뚝 모양 조형물이 늘어서 있는 게 눈에 띈다. 일직선으로 놓인 전주역 터 상징물까지, 모두 태평문화공원의 풍경이다. 전주역 터 상징물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몇 미터쯤 되는 철길의 끝자락에는 작동하지 않는 완목신호기와 수동 전철기(선로전환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시절을 추억하듯 꿋꿋하게 서 있다. 짤막한 이 레일에는 쓸쓸함마저 감돈다. <전주부사>의 통계에 따르면 국철화 직후이자 노송동 이전 직전인 1928년, 전주역의 승차 인원은 18만 9022명, 하차 인원은 20만 6912명이었다. 이때까지는 협궤 철도였기 때문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전북지역의 교통 운수에 공헌했으며 영업성적 또한 매우 우수해 경영 측면에서도 적잖은 이윤을 올렸다고 한다. 공원의 담 너머에는 바로 고층 아파트단지가 조성돼있다. 어린아이들이 바닥분수에서 솟아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를 만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뻔했다. 1921년 7월 조선연초전매령이 공포되고 고사동 일대에 전주전매지국이 문을 열었다. 이후 태평동 이 자리에 연초 공장이 자리잡는다. 연초의 경작, 제조, 판매 등 사무를 관장하던 이곳은 독립 이후 전주지방 전매지국 , 전주지방 전매청, 전매청 전주연초제조창으로 개편된다. 창설 이후 80년이 넘도록 움직이던 연초제조창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기계화 시설이 도입되면서 노동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고, 2002년에는 문을 닫는다. 이후 2008년 이 부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와 문화공원 등이 조성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태평문화공원은 그러던 2008년 12월, 안득수 전북대 조경학과 교수가 설계한 공간이다. 공원 설계개념비에 따르면 최초의 전주역과 공북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했던, 그리고 연초제조창이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로서의 태평동의 역사가 이 공간에 담겨 있다. 여기에 공원 뒤쪽에 들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까지, 이 넓지 않은 공간에 전주의 근현대사가 그렇게 쌓여 있는 셈이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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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9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⑤ 송천역·전주역·아중역] 철도, 이제는 도시 외곽을 감싸고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한참 평야를 가로지르던 철길은 도심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시선을 맞이하는 것은 건물의 숲.수탈을 위한 농업철도였던 모습은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전주 팔복동을 지나 송천동에 이르면, 철길은 지상의 차량과 사람들을 피해 그 아래로 내려간다.도시는 그 위로 꿈틀꿈틀 그 몸집을 불려간다.흔적도 없는 <송천역>부활은 올까콘크리트로 된 성채가 보였다. 아직 유리창도, 페인트 옷도 없이 콘크리트 살갗 그대로를 보이고 있는 그 건물들은 그러나 위용만큼은 대단했다.옛 육군 제35사단이 있던 자리에 조성되는 전주의 신도시 에코시티가 슬슬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에코시티를 포함한 전주 북부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것은 전라선 철길. 1981년 도심에서 쫓겨나 당시 전주 시가지 최외곽을 빙 두르는 경로로 다시 놓인 이래 36년, 이제는 다시 도심 안으로 들어올 예정인 그 철길이다.전주시 송천동에는 송천역 사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는 송천역 삼거리였던 이 지명이 증명하는 것은 송천역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그러나 송천역과 관련한 어떤 흔적도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취재팀이 찾은 지난 4월 28일, 송천역이 있던 자리에는 전라선 철길을 넘어가는 과선교와 송천변전소 공사장이 있을 뿐이었다.1981년 5월 25일 전라선이 전주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송천역도 문을 열었다.덕진 시외버스 간이터미널 자리에 원래 있던 덕진역이 선로 이설로 폐지되면서 그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데, 통근열차 수요는 나쁘지 않아서 지난 2007년 철도통계연보를 보면 그해 송천역에서 1만4480명이 열차를 타고 6826명이 내려 총 2만1306명이 이 역을 이용했다.이것은 1만8801명을 기록한 군산선 대야역보다 높은 실적이고,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정차역 가운데서는 익산, 전주, 군산, 삼례 다음이다. 사실상 전북의 간이역 가운데서는 가장 붐볐다고 볼 수 있겠다.그러나 통근열차가 폐지된 2008년부터는 그저 전주 북부의 자리만 차지하는 건물 정도의 처지가 돼 버렸고, 결국 전라선 복선전철화와 에코시티 개발과 맞물려 2010년께 철거됐다. 정식으로 폐지되며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것은 2011년의 일이다.하지만 또 앞일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전북도가 제안한 전북권 광역전철망이 현실화하면 송천역이 에코시티를 등에 업고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오늘을 사는 역<전주역>전주역 앞 첫 마중길 조성사업이 막바지였다. 전주역을 등지고 다소 어수선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치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신호가 청색으로 바뀌고 버스와 자가용들이 앞을 다퉈 바삐 제 갈 길을 가는 통에 이리저리 흙먼지가 휘날린다.지난 4월 28일 낮 1시, 머리 위로 내리쬐는 다소 강렬한 봄볕을 피해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대기실에서는 남녀노소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대선 관련 뉴스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 막 기차에서 내린 듯 한옥마을부터 가자며 잔뜩 들떠 이야기를 주고받는 20대 여행객들은 결국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택시 승강장 쪽으로 사이좋게 발걸음을 옮겼다.어디를 가든 줄이 길게 늘어서는 여자 화장실, 전주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KTX 열차가 두 편 연달아 서는 시간대였다. 길게 늘어선 줄,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도 전해진다.지하통로를 걷자 시원한 바람이, 기차를 타려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살랑거렸다.남원에서 전주로 치과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한 승객은 아들이 완주 봉동에 사는데, 역으로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빙그레 웃었다.의자에 앉아 서류가방을 책받침 삼아 독서를 하고 있던 변호사 김도형 씨(55)는 오늘 오전에 전주에서 재판이 있어서 출장차 들렀다가 다시 순천으로 간다며 편하고 안전한 데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어 기차를 애용한다고 말했다.전주역을 통해 출장길에 오른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박식 씨(48)는 용산으로 가는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교통체증 없이 시간 맞춰서 갈 수 있어서 열차를 자주 이용한다면서 KTX 운행 횟수가 부족하다는 점이나 SRT가 안 들어온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교복 차림인 이도 보였다. 중학생인 황현우 씨는 주말을 맞아 광주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전주에서 광주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철도 노선이 없으니 익산으로 가서 갈아타야 한다고.그럼에도 굳이 철도를 이용하는 이유는 터미널이 집에서 멀기 때문이란다.한편 음료자판기 쪽에서는 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간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여수로 여행 가요. 기차여행은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네요.1914년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종착지로 처음 문을 연 전주역은 원래는 이곳 우아동에 있지 않았다.상생정, 지금의 태평동에서 출발한 전주역은 1929년에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로 옮겨졌는데, 이때 전주지역 주민들의 건의에 따라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모습은 지금의 전주역 건물과 모양이 상당히 비슷한데, 콘크리트로 지어진 지금의 전주역보다는 한옥 느낌이 훨씬 강하다.물론 전라선 연선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전주의 중심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이용객이 몰렸다. 전주역사(史)에 따르면 1980년 전주역 승차 인원은 180만여 명, 하차 인원은 173만여 명. 합이 350만(철도통계연보 기준으로는 승하차 합계 421만 6841명)이 넘는 엄청난 수요였다.그러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은 도시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었고, 그래서 1981년, 전라선은 전주 외곽으로 쫓겨난다. 지금 우아동에 서 있는 전주역은 그때 세워진 것이다.노송동 시절보다 역사는 커졌지만, 이설 개통 다음 해인 1982년 기록을 보면 전주역 승차 인원은 76만여 명, 하차 인원은 77만여 명 수준으로 폭락했다.세월이 지나고 백제대로가 깔리고 6지구도 개발되고 전라선에 KTX도 들어오면서, 그리고 전주가 내일로 성지 중 한 곳이 되면서 전주역은 옛 위상을 되찾는다.지난 2015년, 전주역을 이용한 인원은 모두 255만8479명이었다. KTX 이용객 90만8817명이 포함된 숫자다.지난 3월, 전북도는 2017년을 전북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전주역은 외지 관광객들이 전주라는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관문이자, 이곳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통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페달을 밟아라!<아중역>전주 동부대로를 타고 전주역에서 남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왼쪽에 이제 슬슬 산 비슷한 것이 발을 뻗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엔 누런 타일이 붙어 있는 건물이 서 있다.볼록할 철(凸)자 모양으로 된, 전형적인 1980년대 역사. 1981년 5월 25일 전라선이 이설 개통될 때 지어진 건물이다. 역사만 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던 역이 새로 태어난 것이다.아중역은 언덕 위에 서서 삼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의 정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역 광장이라 할 만한 것이 정면에 있지 않고, 또 취재팀이 찾아간 4월 28일에는 시티 가든 조성 사업이 한창이어서 역사 정면이 접근 불가 상태였기 때문.2008년 여객 취급이 중지된 뒤 2011년 5월 9일 복선전철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송천역과 함께 폐역된 아중역은, 그러나 복작복작하니 활기가 넘쳤다. 접근 불가의 정면이 아니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뒷면의 모습이었다.한 시간에 세 번, 이곳에서는 열차가 출발한다. 기관차는 따로 없이, 사람이 발로 페달을 밟아 굴리는 차량이다. 지난 2016년 운행이 시작된 전주한옥레일바이크다.레일바이크 차량이 줄지어 서 있는, 옛날에는 사람들이 진짜 열차를 기다렸을 플랫폼 자리 너머로는 전라선 철도가 지난다.방음벽 같은 것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대가 조금 높을 뿐이라 마치 아직도 아중역이 그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열차는 물론 그대로 쌩- 하고 지나가 버릴 뿐이지만.매표소의 기능은 여전하다. 단지 파는 표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이다. 건물 모습도 옛 모습 그대로고, 다만 건물의 북쪽 날개 부분에 카페가 하나 생긴 정도다.정작 바뀐 것은 철길이다. 분명 단선 철길이었는데, 레일바이크 전 구간이 틀림없는 복선이다. 레일바이크 운행을 위해 개량된 것이다.이 레일바이크에 별명이 하나 있어요. 고진감래라고. 처음에는 오르막이어서 조금 힘든데, 나중에는 내리막이어서 아주 편하게 탈 수 있죠.페달을 밟아보면 느낌이 생각보다 묵직하다. 그런데 또 한 번 가속도가 붙으면 훨씬 수월해진다. 신이 난다고 막 밟아대면 그건 그것대로 또 곤란하다. 제동거리를 감안해서 안전거리를 20m씩은 확보해야 한다. 선로가 상하행 한 줄씩이니, 앞차가 느려서 답답하다고 추월할 수도 없다. 이것까지 모두 철도의 특징 그대로다.그런데 실제로 타 보면 스피드 욕심이 들 겨를이 없다. 소박하면서도 가슴 탁 트이는 주변 풍경도 바라보고, 저 바로 옆 철길을 달리는 열차도 시선으로 따라가 보고, 셀카봉을 들어 인증샷도 찍고 하다 보면 그렇다.관문(?)을 지나 알록달록한 불빛이 맞이하는 터널 두 개를 통과한 뒤 턴테이블(전차대)로 방향을 바꿔 아중역으로 돌아오게 돼 있는 이 레일바이크 노선의 전체 길이는 3.4㎞.약 2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관계자의 말대로 고진감래다. 가는 길이 조금 힘들고, 돌아오는 길은 과장을 약간 섞으면 굳이 페달을 밟을 필요도 없을 정도다.위험하진 않겠죠?아유, 물론이죠.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만들어 놨습니다.인력 열차들은 반환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지만, 철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왼쪽 언덕 위 전라선 철길, 열차들은 쌩쌩 잘도 달리며 거침없이 전주를 빠져나간다.이제부터는 산지. 산악철도 전라선의 시작이다.: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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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2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④ 동산역~북전주역] 여전히 그곳에, 전주 산업의 핏줄 북전주선

그곳을 정의(定義)하는 것은 컨테이너들이 쌓여 만든 커다란 탑이었다.그 탑은 미세먼지와 부유먼지가 가득한 뿌연 공기 너머로도 뚜렷하게 보였다.3월 31일, 전주 동산역을 찾은 취재팀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직육면체들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사람 드나드는 길목을 보지 못하고 한 바퀴 빙 돌았다.어쩌면 사람 드나드는 것엔 딱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동산역의컨테이너 동산동산이라고 한글로 써놓으면 텔레토비 동산 같은, 야트막한 산을 말하는 것 같지만, 동산역에 쓰이는 동산은 좀 다르다. 한자로 東山, 그러니까 동쪽 산이다.원래 있던 이름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가 이곳에서 경영하던 동산농장, 그러니까 도잔 농장(Tozan noji, farm)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잔은 미쓰비시를 창업한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의 호라고 한다.도잔 또는 토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장은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도 있다. 캄피나스 인근에 있는 커피 농장은 미쓰비시가 1927년 포르투갈인 지주에게서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東山은 또 히가시야마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그래서 히가시야마 농장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다.1915년 1월 16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산역이 보통역으로 문을 연다. 춘포에 철도가 놓인 데 호소카와 가문의 영향이 컸듯, 이것 역시 삼릉재벌, 그러니까 미쓰비시 자이바쓰의 입김이었다.새로 지어진 다리를 밟고 만경강을 건너온 철길은 강 남단의 들판을 가로지르다 몇 가닥으로 갈라진다. 그 옆으로는 전차선 없는 철길이 또 여섯 가닥 있다.분명 이 앞에 볼록할 철(凸)자 모양으로 된 역사(驛舍)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다. 2011년에 새로 지어진 동산역사는 거기서 동쪽으로 약 300m쯤을 더 가야 나온다.반듯반듯 육면체들의 조합으로 된 역사는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화장실과 역무원실이 곧바로 나타날 뿐, 매표소도, 맞이방도, 로비도 없다. 플랫폼은 있지만, 동익산역과는 달리 플랫폼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없어 위험한 철길을 넘어다녀야 한다.여객 업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순도 100%의 화물취급전용역이다.힘들게 올라간 플랫폼에서 동산역 관계자가 말했다.저도 플랫폼은 순회 점검할 때나 나오고, 그 외에는 나올 일이 없죠. 여기선 여객열차 취급도 안 하니까요.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동산역사(史)에 기록된 1954년 승차 인원은 26만 9000명, 하차 인원은 21만 7000명이었다. 전주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던 전라선 철도가 외곽으로 이설되기 전해인 1980년까지도 합계 27만 3000명이 이 역을 이용했다.(단 1981년에 발행된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80년 실적은 21만 6071명으로, 동산역사의 통계와는 차이가 있다.)2007년 12월 31일까지는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멈췄고, 통근열차가 폐지된 뒤로도 2009년 6월까지는 무궁화호 열차가 가끔 멈췄다.그러다 2009년 7월부터 동산역은 더는 승객을 받을 수 없는 역이 됐고, 그나마 과거 여객열차를 취급했던 흔적조차도 전라선 복선전철화 이후 옛 역사가 허물어지면서 사라졌다.그렇다고 동산역의 존재감이 미미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동산역은 전북 권역 내 전라선 역 가운데서는 가장 큰 화물역이고, 여전히 전주권 철도 물류의 심장이다. 지금도 휴비스, 전주페이퍼, 롯데 글로벌로지스 등의 화물을 다루는데, 화차가 25량 연결되는 열차를 하루에 10차례 정도 취급한다고 한다. 열차를 열 차례 취급한다.옛 역사가 허물어진 바로 그 자리에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고,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나르는 작업이 이뤄진다.'그래도 아직은'북전주역전차선이 함께하는 철길은 동쪽으로 반듯하게 지나가고, 전차선 없는 철길은 동산역 구내에 머문다.복선전철화 이전부터 있던 이 철길들은 지금은 역 구내에서 화물을 처리하거나 화물열차를 전라선 본선으로 올려보낼 때 쓰인다.전차선 없는 철길 중 한 가닥은 굴다리를 하나 지나 동남쪽으로 뻗어 나간다.들판을 가로질러 건널목 두 개를 지나 약 1㎞, 철길은 다시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다. 한쪽으로는 춘포역이나 임피역에서 본 듯한 모양의 건물이 하나 서 있다.마침 량 수를 다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게 늘어진 화물열차가 느릿느릿 들어서고 있었다. 입환(철도 차량을 분리하거나 결합하거나 철도 차량의 선로를 바꾸는 등의 작업)에 주로 쓰이는 4400호대 중형 기관차가 화차들을 밀고 있었다.그렇게 화차들을 밀어놓은 뒤, 기관차는 다시 동산역 방향으로 굴러갔다.1968년 9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북전주역의 원래 이름은 감수역이었다고 한다. 물론 감수역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고, 영업 개시 직전에 북전주역으로 바뀐 뒤로 쭉 이 이름이 쓰였다.이 인근의 옛 지명이 감수리였는데, 지금도 시내버스 종점이나 주변 상호 등에서 여전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여객열차라고 해봐야 완행열차가 몇 편 서는 정도였지만, 북전주역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1980년 이 역에서 보낸 화물은 16만 1977톤, 받은 화물은 70만 3104톤. 합계 86만 5081톤이나 되는 화물이 이 역에서 처리됐다. 이는 당시 전라선의 그 어떤 역보다도 높은 실적이다.1981년에 전라선 철도가 전주의 동북부를 우회하는 경로로 이설되면서 동산-북전주 구간은 북전주선이 됐다. 원래는 전라선 본선이었던 구간이 화물 전용 지선으로 바뀐 것이다.그러거나 말거나. 팔복동 공단 안에 위치한 탓에 화물 수요는 엄청났고, 전라선 이설 다음 해인 1982년, 이 역의 발착화물은 90만 5252톤에 달했다.한동안은 이렇게 전주의 산업과 함께 호황을 누렸지만, 1990년대가 지나가고 공단이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또 도로를 이용한 물류 운송이 힘을 얻으면서 북전주선과 북전주역도 점차 한가해졌다. 그리고 2015년 7월엔 무배치간이역이 됐다.지난 3월 31일, 역사(驛舍)는 굳게 닫혀 있었다. BUG JEON JU라 적힌 역명판이 인상적이다.역사 반대편에 현대시멘트, 동남쪽에 한일시멘트라 적힌 사일로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한일시멘트 사일로에 약간 못 미친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철길 한 가닥이 남쪽으로 돌아 나간다.공식적으로는 북전주역에서 끝나는 북전주선은 휴비스전주페이퍼 등 공단 업체들의 필요에 따라 조금 더 몸을 뻗었다.전주페이퍼선, 또는 전용선이라고도 불리는 이 철길 양옆으로는 아직은 앙상한 이팝나무가 줄지어 섰고, 그 옆으로는 인공하천인 금학천이 흐른다.공단을 관통하는 철길 바로 옆엔 변신을 시도하는, 20m짜리 굴뚝이 인상적인 폐공장도 하나 있다.팔복예술공장과'기억의 재생'어릴 적, 시골 큰집에 가면 동네 아이들과 즐겨 찾던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사람들의 온기와 세간살이가 다 빠져나간 빈 집터, 온갖 쓰레기와 녹슬어 못쓰게 된 기계들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폐공장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에게는 처음 생긴 우리 공간이었다.지붕은 군데군데 이가 나가 빛이 새어들고, 창문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던 그 고장 난 공간은 그 특성 때문에 무엇을 해도 다 허용되는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한 공간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고, 버려지며, 재생된다. 전주 팔복예술공장의 삶도 마찬가지다.산업화의 황금시대가 지나가고, 팔복동에는 낙후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붙었다. 그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주시가 꺼내든 카드는 문화였다. 산업단지 안에 문화를 심자는 생각으로 이 폐 산업시설 현장에 기억의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얹은 것이다.전주 팔복동 제1산단 내 옛 쏘렉스 공장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삐뚤빼뚤 글자들이 한 데 모여 이곳을 팔복예술공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며 그 시절을 기록해 왔던 곳, 1992년 문을 닫은 뒤 20년 넘게 방치돼 있던 공간의 새 이름이다.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기억의 재생이예요. 이 건물이 단순한 콘크리트인 게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흔적, 역사가 있는 거잖아요.한민욱 전주문화재단 팔복예술공장 기획팀장은 지역 곳곳에 있는 유휴공간의 용도를 바꿔 써보자는 데서 팔복예술공장이 출발했다면서 이곳이 공장으로서는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 덕분에 문화시설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여러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공장 건물 이곳저곳, 벽이나 계단, 모서리 틈새마다 이곳이 예전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는, 그리고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공간이었다는 흔적이 널려 있었다.멈춘 컨베이어 벨트, 공정을 위해 꼭 필요했다는 구멍 뚫린 의자, 테이프가 늘어지지 않도록 실내 온도를 유지해 주던 장치, 400명 이상의 여성 노동자가 사용해야 했던 단 하나의 여자 화장실, 옥상의 몇 평 되지도 않는 탈의실.희미한 기억 속 추억의 물건이자 그 자체로 기록 매체였던 카세트테이프는 80년대의 추억이자 그 시절을 기록하고 추억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서 이 건물 곳곳에 존재한다. 늘어진 테이프를 나무로 된 육각 연필로 감던 기억이 되살아난다.팔복예술공장은 오는 5월에 공간 리모델링을 시작한다. 공장 앞에 늘어선 이팝나무들이 꽃을 피울 무렵이다.과거 1990년대 이팝꽃이 만개할 때면 쏘렉스 공장 앞 철길에서 웨딩 촬영을 하곤 했던 전주시민들의 기억도 재생될 수 있을까?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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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4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③ 삼례역] 호남 발길 모이던 관문, 이제는 문화 중심지로

지난 3일, 완주군 삼례읍.삼례 읍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옛 역사(驛舍)를 지나, 남쪽으로 200m쯤 움직였다.잘 숨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주위 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건물 크기가 작지는 않은데도 어쩐지 위화감이 없었다.붉은 외장이 인상적인 새 역사가, 철길을 옆구리에 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전기기관차 한 대가 그 특유의 시-미-라-레- 하는 소리를 내며 무궁화호 열차를 이끌고 북쪽으로 출발했다.호남 교통의 중심지삼례"삼례에 역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여기 보시는 것처럼 과거엔 지금의 익산역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삼롑니다."윤대열 삼례역장이 역사 로비 한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삼례역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옛 삼례역참에 관한 유물들이다.교통과 통신의 거점 역할을 하던 역참은 전국 주요 지점에 있었다. 삼례 역참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의 관문이었던 것이다.철도로 치자면 삼남대로는 호남선, 통영대로는 전라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익산역 역할을 과거 삼례역참이 했던 셈이다.이렇게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사람들이 모이기도 쉬웠을 것이다.1892년, 동학교도들이 삼례에 모여 삼례집회를 연다. 교조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외친 이 집회를 통해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떠올랐고, 또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지펴졌다고 평가된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삼례가 다시 등장한 것은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해 9월, 전봉준 등은 삼례에 집결해 재기포를 준비한다. 이것이 2차 봉기다.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삼례는 동학혁명 2차 봉기의 주 무대며, 이는 갑오개혁, 31운동 등 현대에 이르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모태가 됐다며 특히, 나뉘어 있던 남접과 북접이 삼례 2차 봉기를 계기로 화합하게 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삼례 곰멀마을에 있는 동부교회 부근이 삼례집회의 현장인 삼례역참터로 알려져 있다. 다만 지금은 이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동부교회 관계자는 삼례역참터가 이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이를 기념할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면서 지역 역사를 조사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오곤 하지만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한편 삼례 찰방다리 부근 도로변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운 삼례봉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완주군 보건소 인근에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조성돼 있다.비껴가는철마그렇게 호남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는 철도교통 시대로 접어들면서 호남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이리(익산)에 내주게 된다.1912년 3월 6일 호남선 강경~이리 구간이 개통되고 이리역(현 익산역)이 문을 열었다. 또 군산선 군산~이리 구간이 개통됐다. 호남선은 이리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달려 김제, 정읍을 거쳐 송정리, 나주를 지나 목포로 향했다.이것부터였을까? 21세기가 되어 익산역과 전주역에 고속열차가 정차할 때, 삼례역은 고속열차가 플랫폼을 지나 가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한때 호남고속선을 익산역이 아닌 삼례 인근을 지나도록 짓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과는 물론 익산역을 통과하는 것으로 확정됐다.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 개통을 앞두고 삼례역에도 전라선 KTX를 정차시켜 달라는 목소리 또한 나왔지만 이 역시 무산됐다.지난 2015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삼례역 승하차 인원은 모두 11만2963명.코레일 전북본부가 관할하는, 지금도 여객 취급이 이뤄지고 있는 12개 역 가운데서는 9번째다. 삼례역 뒤에 랭크된 세 역은 오수역과 임실역, 그리고 장항선 대야역이다.아홉 번째라. 도찰방이 있던,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의 옛 위상과 비교하면 개운하지 않다.다만, 그렇다고 해서 삼례가 아예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니다.삼례는 1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고, 호남고속도로와 익산포항고속도로가 이곳을 지난다. 자동차를 이용한 도로교통은 강세인 것이다.완주문화원 관계자는 아무래도 교통의 많은 부분이 익산에 편입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교통 환경을 보면 삼례는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삼례역과양곡 창고삼례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14년 11월 17일.전라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들어설 때 삼례역 또한 보통역 등급으로 함께 문을 연다.춘포역과 임피역이 서로 닮았다고 하지만, 옛 삼례역사도 원래는 그들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러다 1997년에 석재 외장을 가진 꽤 큰 역사가 지어졌다. 이 건물은 원래는 처마 끝 등의 형태만 살짝 한옥 지붕을 흉내 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 2013년 세계 막사발 미술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양의 지붕이 새로 얹어졌다.새로 지어진 지 불과 14년 만인 지난 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로 선로가 지나는 위치가 살짝 바뀌면서 삼례역도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지어졌고, 남은 역사는 미술관이 됐다.지난 2013년 8월 15일 문을 연 이 미술관에는 가마와 공방은 물론 작가들이 묵을 수 있는 레지던시도 마련돼 있다. 이제는 철도 차량 대신 흙으로 빚은 미술품들이, 승객 대신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이 자리에서 읍내 방향을 바라보면 좌우로 서 있던 것이 양곡 창고였다.1920년대부터 이곳에는 양곡 창고가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인근에서 생산된 곡식들이 이곳에 모여 삼례역을 거쳐 전라선과 군산선 철도를 통해 군산항으로 가곤 했다.물론 삼례가 단순히 물류 기지의 역할만 한 곳은 아니다.전북의 평야 지역 대부분이 그렇듯, 완주 지역에도 당시 지명으로 조촌면 반월리에 전북농장이, 삼례면 삼례리에 조선농장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특히 대지주 시라세이(白勢) 일가가 1926년에 세운 식민농업회사 이엽사는 삼례역 부근인 후정리 일대에서도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삼례역 인근의 이 창고들이 바로 그 이엽사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엽사는 옥구군 서수농장 또한 경영하고 있었고, 소작료를 무려 75%나 내놓으라고 농민들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옥구농민항일항쟁이다.삼례역 인근의 창고들은 광복 후에도 계속 사용돼 왔고, 나중에 한 동이 추가로 지어지기도 했다. 이들이 역할을 내려놓은 것은 2010년의 일이다.- 삼례 -이제 문화의 중심지로책의 중심지, 문화의 중심지.삼례가 그런 곳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벽에 녹색과 붉은색을 띤 판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출입문 위에 어린 왕자가 앉아 있는 건물, 북 하우스. 옛 양곡 창고를 단장한 건물로, 10만여 권을 보유한 고서점 호산방이 여기 있다.삼례는 책이다는 표어를 달고 있는, 이 삼례 책마을의 중추를 이루는 곳에서 만난 박대헌 책 박물관 관장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책, 그리고 그 책으로 만들어내는 문화만큼은 삼례가 중심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다.서울에도 없고 대형 서점에도 없는 책들을 놓고 전문가가 봐도 감탄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아주 제대로 된 서점을 만들자, 이런 겁니다.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박 관장이 운영하는 책 박물관은 책마을에서 삼례역로를 건너가면 나오는 삼례문화예술촌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양곡 창고가 하드웨어 역할을 맡고, 박 관장이 강원도 영월에서 운영했던 책 박물관이 그 하드웨어 안에 들어가 소프트웨어를 이뤘다.3일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그림책 거장 랜돌프 칼데콧에 관한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책마을 한국학 아카이브에서는 또 다른 빅토리아 시대 거장 케이트 그린어웨이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그림책 축제라 할 만하다.책에서 잠시 눈을 뗀다. 몇 발짝 물러서자 다른 건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비슷한, 그러나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여섯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꼭 어떤 마을 같다.완주군이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옛 창고 건물들을 매입해 문화와 예술을 채워 넣었다. 이것이 지난 2013년 문을 연 삼례문화예술촌이다.VM아트미술관, 문화카페 오스, 디자인박물관, 김상림목공소, 책 박물관, 책공방 북 아트센터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삼례성당 등 주변의 풍경과도 꽤 어울려서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가족과 함께 온 엄지민(30) 씨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보고 왔다고 말했다.아닌 게 아니라, 삼례문화예술촌의 풍경은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은,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침 3일도 날씨가 좋아 하늘이 파랗게 비치는 날이었다.삼례문화예술촌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여행 명소다. 한국관광공사가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으니, 이쯤이면 우습게 볼 수 없는 곳이 된 것은 분명하다.윤대열 삼례역장은 철도는 네트워크 산업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과거 교통의 중심지였던 삼례가 이제는 철도의 유산을 바탕으로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권혁일김태경 기자비비정에 앉아만경강 바라보기목에 방울을 달고 있는 삼색 고양이가 사람을 보자 발라당 드러눕는다. 다리가 짧은 흰 강아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듯 사람 앞에 선다.어느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고, 그 뒤 언덕 아래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전주 북부의 스카이라인이 서 있다. 두어 달 뒤면 U-20 월드컵이 치러질 전주 월드컵경기장도 함께한다.1920년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로 된 옛 삼례양수장 또한 이 풍경의 구성원이다.언덕 위 카페 비비낙안과 언덕 아래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은 완산 8경의 하나인 비비정을 중심으로 진행된 마을 문화공간 조성 사업의 결과물이다.만경강 북단 언덕 위에 있는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인 1573년 최영길이라는 이가 처음 지었고, 이어 영조 때인 1752년 전라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정자는 지난 1998년에 복원된 것이다.과거엔 저 멀리 날아다니는 기러기 떼와 만경강에 떠 있는 배들을 이곳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비비낙안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옛날엔 배와 기러기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은 철교와 열차를 볼 수 있다.지난 2013년 등록문화재 제579호로 지정된 옛 만경강 철교가 바로 옆에 있고, 전라선 복선전철화 이후 새로이 열차들이 밟고 지나는, 콘크리트로 된 구조가 인상적인 새 다리도 정자에서 멀지 않다.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저어기 열차 하나가 만경강을 건너간다.다리를 건너면 이제 전주다.권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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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7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② 춘포역] 넓은 들녘 보며 가을 기다리던 봄나루 역

햇볕이 따뜻하던 지난 3일, 익산시 춘포면.111번 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멈췄다 가는 버스정류장을 끼고 돌아 빛바랜 아스팔트가 두툼한 이불처럼 깔린 길로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빛이 바랜 만국기가 공중에 걸려 있고, 저 멀리 소나무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역시 빛바랜 옥색 역사(驛舍)지붕이 보인다.그 저채도의 풍경 위로 채도 높은 녹색과 연두색의 방음벽을 두른 고가철도가 지난다. 언뜻 수도권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선하역사(線下驛舍)처럼도 보이지만, 역사와 철로 사이엔 이제 어떤 접점도 없다. 철로는 역사에 눈길 한 번 주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친다.춘포역은 그런 풍경 속에 서 있었다.한자로 봄 춘에 물가 포를 쓰는 춘포(春浦)는 우리말 이름 봄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데, 그래서 봄 나루 또는 봄개 나루라고도 한다.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20여 년 전까지는 대장촌(大場村)이라고도 불렸는데, 큰 대에 마당 장을 붙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춘포지역은 야트막한 구릉 하나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평야 지대다.산 비슷한 것이라고 해봐야 북동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봉개산이 전부고, 춘포면 중심지는 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훤히 내다볼 수 있다.춘포면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흐르는 만경강은 춘포 지역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애초 개, 나루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만경강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대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넓고 평탄한 들녘은 만경강 물이 쉬지 않고 흙을 날라 쌓아 만든 것이니 말이다.한편으로는 만경강이라는 이름 또한 논 100만 이랑에서 온 것이니, 만경강의 정체성 또한 춘포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원래는 모래 사(沙) 자를 써 사수, 사탄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만경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렇게 넓고 비옥한 땅이 일본인들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일본인들이 정착하며 이 지역에 붙인 이름이 대장촌이다. 대장촌은 우리식 독음이고, 그들은 오오바무라라고 불렀을 것이다.그리고 오늘날의 춘포 지역을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여 근방이 왜정 때 만들어진 거여. 사람들도 원래 여기 살던 게 아니고 다 객지에서 와서 정착한 거여. 지금이사 3세대까지 있지만. 저 뒤쪽 마을도 원래는 없었어.춘포역에 대해 질문하자, 마을 주민 양기만 씨(60)의 입에서는 그가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부터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까지, 옛날이야기가 술술 나왔다.1914년, 전라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개통하면서 춘포역도 문을 열었다. 개통 당시의 이름은 대장역.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96년이다.옥색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작은 역사(驛舍)와 화장실 건물, 역사 앞 소나무 한 그루와 공터 정도가 전부인 이 소박한 역은, 몇 되지 않는 전라선 원년멤버다.또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철도역사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춘포역사보다 오래된 철도역사는 없다.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됐는데, 같은 날 군산 임피역사도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됐다. 닮은꼴인 두 건물이 나란히 가장 오래된 역사와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다.역이 들어서고, 역이 들어서니 사람이 모인다. 대장촌은 그렇게 형성됐다.광복 이후에도 1960년대 만경강 모래찜이 유명하던 시절에는 하루 150~200명씩 춘포역을 이용했고, 익산 지역에서 섬유산업이 발달한 1970년대에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역을 통해 출퇴근하곤 했다.1978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77년 실적을 보면, 그해 춘포역(대장역) 승하차 인원은 무려 29만9022명.전라선 전북 구간 21개 역(익산역 제외) 가운데 전주남원동이리(동익산)덕진오수삼례역에 이어 7번째로 많은 인원이 이용한 것인데, 같은 해 19만2078명이 이용한 관촌역이나 18만4839명이 이용한 임실역보다도 10만 명 이상 많은 기록이다.그러나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춘포역의 수요는 점차 줄었다.열차가 서던 마지막 해인 2007년 한 해 이곳에서 열차를 탄 사람은 132명, 내린 사람은 159명. 그래서 이용객 합이 291명이었다.양 씨는 요즘은 교통이 좋으니까 개의치 않는다면서, 자가용 승용차나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했다. 하긴, 익산과 삼례를 잇는 111번 버스가 면소재지 중심을 10~20분 간격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구태여 기차를 고집할 이유도 없긴 하겠다.그렇게, 춘포역은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아니 열차가 서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역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며 철길은 콘크리트 구조물 위로 올라갔고, 춘포역 구내의 철길과 플랫폼은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철길이 베고 누워 있던 침목은 뽑혀 나뒹굴다가 역 광장 가장자리의 연석이 되었다.그래도 역사는 잘 보존돼 있다. 안에는 춘포 지역의 역사(歷史)에 관한 내용이 정리돼 있고, 역무원실이었던 공간은 일종의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다.건물 자체가 작으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소박한 맛이 있다.2007년까지 운행되고 이후 자취를 감춘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역은 이제 지역 문화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다. 익산문화재단이 진행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이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다.해당 사업을 맡고 있는 익산문화재단 예술지원팀의 김지은 씨는체험 행사를 하니까 주민들이 모이고, 주민들이 모이니까 춘포역이 어떻게 바뀌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죠. 역사 앞 주차장도 그 과정을 통해서 조성할 수 있었어요. 일단 주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역사(驛舍)가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는 익산문화재단의 인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물론 그냥 겉만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에 명예역장익산문화재단춘포면사무소 연락처가 붙어 있으니 문이 잠겨 있다면 이 연락처로 문의해보자.김지은 씨는 올해 목표가 상시 개방이라며, 상시 개방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춘포역에서 나와 사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쭉 걷다 보면 높은 둑이 저 앞에 보인다.그 둑을 한 100m쯤 남겨놓고 붉은 벽돌과 푸른 기와가 인상적인 농어촌공사 춘포지소 건물(일제 강점기 당시 우정국 건물)을 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걷는다.마치 작은 성(城)처럼도 보이는 일본풍 건물, 이른바 에토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둘러져 있는 높은 울타리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봐도 개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일제 강점기에 이 지역은 대지주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농장이었는데, 194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농장에 소속된 에토(江藤)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춘포역과 같은 날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주민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산 히로쓰 가옥처럼 마음대로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지만, 행사가 있거나 할 때 가끔씩 개방되기도 한다고.그런데 호소카와? 어쩐지 이름이 익다. 바로 일본의 자민당 독주 체제를 끝내고 총리가 되었고 총리 시절 과거 침략 행위와 식민 지배에 깊이 반성하며 사과한다고 말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 농장 창업주의 손자다.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지난 2014년, 탈 원전을 내걸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지지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춘포 지역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김성철 가옥이라는 옛 건물도 남아 있다.농어촌공사 건물 사거리에서 에토 가옥의 반대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집인데, 마당의 일본식 정원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반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서 볼 수는 없다.이 집을 그나마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만경강 둑 위에 올라가서 보는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잘 보이지는 않는다.김성철은 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농장의 직원이었고 광복 이후 60년대에는 익산을 지역구로 삼아 국회의원(제6대7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지난 2004년 별세했다.호소카와 농장의 유산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김성철 가옥 주변의 골목길로 들어가면 허름한 공장 같은 건물을 찾을 수 있다.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도정공장이었던 대장 정미소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에 한 차례 도정 작업을 거쳐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1914년에 지어졌는데, 그러니까 춘포역과 동갑이다.농장에서 나온 곡식은 이 정미소에서 도정을 거쳐 춘포역에서 전라선, 군산선 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가 일본으로 날라졌을 것이다.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풍경들이, 결국은 전부 한 덩어리다.익산문화재단은 춘포역을 기점으로 농어촌공사 건물과 에토 가옥, 만경강 둑방길, 대장 정미소 등을 한 바퀴 도는 트래킹 행사를 이따금씩 연다. 그 밀도가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와 비견할 만하다.다만 느낌은 조금 다르다. 군산이 근대 도시 느낌이라면, 춘포는 같은 근대라고 해도 도시적인 느낌은 덜하고, 묘하게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든다.익산시 관계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군산은 아무래도 수탈된 양곡을 반출하는 항구였고, 그래서 여러 건물이나 세관 같은 것이 남아있죠. 반면에 여기는 수탈이 이뤄지던 곳이고 농장이었으니까 조금 다르죠.제방 위 그 자리에서 뒤로 돌면 만경강이 흐르고 있고, 그 건너편은 전주시 덕진구와 김제시 백구면이다. 또 행정구역상으로 춘포면에 속하는 구담마을도 강 건너편이다. 직강화 공사 이전, 옛 만경강 물길의 흔적이다.조류 인플루엔자(AI) 방역을 위해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현수막 뒤로 넓은 둔치가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키가 꽤 커 보이는 억새들도 몸을 흔들고 있다.그 옛날 전국 각지에서 모래찜질을 하러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만경강 변은 고요했다. 다만 멀리 새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그리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쭉 이어나가니 뿌연 공기 가운데서 높은 건물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완주군 삼례읍이다.저 멀리 보이는 전라선 철길로 열차 한 편성이 삼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권혁일 기자춘포 모래찜질은 신경통에 도움을 주고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소문이 나서 유명해졌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이곳은 하얀 백모래가 깔려있고 조수물과 민물이 드나들면서 모래에 짠물 염기가 있어서 몸 전체에 바르고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익산문화재단 춘포 백년, 사람 이야기 中)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갈 무렵, 1960년대 춘포역은 만경강 모래찜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발길이 이어져 문전성시를 이뤘다.만경강 변 모래로 찜질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전라도충청도 일대에서 인파가 몰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돈을 받고 모래밭에 구덩이를 대신 파주는 아르바이트도 유행했다고 한다.그 당시 모래찜 인파를 상대로 3원, 5원씩 받고 물장수를 했다는 한 주민은 지금은 논밭뿐이지만 50~60년 전에는 모래찜질하려고 여기를 참 많이들 찾아와 역 앞이 사람들로 빼곡했다며 그땐 전주 3공단 없을 때라 물도 맑았다고 설명했다.지금은 만경강 하류에 놓인 농업용 보의 영향으로 이 일대에서 하얀 자태를 뽐내며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남아 있는 흑백 자료사진을 보며 당시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다.익산문화재단 문화예술사무국 예술지원팀 김지은 씨는 춘포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준 덕분에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기회가 되면 춘포 모래찜과 같이 춘포역과 관련된 이야기와 사진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전시하고 싶다고 밝혔다.간혹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가로운 날이면 가족연인과 주고받던 모래 장난에 웃음꽃 피던 때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다. 그렇게 춘포역이 간직한 작은 추억 하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보따리 속에 자리 잡았다.김태경 기자

  • 기획
  • 전북일보
  • 2017.02.17 23:02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① 익산역·동익산역] 강철의 수레, 동남쪽 사백육십 리 첫발 떼는 곳

반질반질 빛나는 두 줄 평행선. 1814년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발명으로 시작된 철길은 근대를 열어젖혔고, 현대를 쌓아 올렸다. 정확히 100년 뒤, 이리(익산)와 전주 사이에도 철길이 놓였다. 전북도민의 사연을 침목 밑에 고이 쌓아 올린 전라선 철길의 시작이었다.전북일보는 지난해 인터넷판으로 연재한 군산선 철도 기행에 이어 새해에는 전라선 철길 답사기를 연재한다.지난 10일, 익산역.플랫폼에 서자 귀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KTX의 끼이이익 하는 제동 소리, SRT의 슈우우웅 하는 모터 소리, 군산과 대야를 거쳐 막 도착한 특대형 디젤기관차의 우렁찬 엔진 소리, 8200호대 전기기관차의 시-미-라-레- 하는 모터 소리, 에스컬레이터의 걷거나 뛰거나 장난치지 마시라는 안내 음성,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스피커에서 연신 나오는 몇 시 몇 분에 용산으로 가는, 몇 시 몇 분에 여수로 가는 하며 열차가 도착한다고 안내하는 소리.1912년 3월 6일에 이리역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익산역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남에서 가장 바쁜 역, 호남 철도 교통의 메카다.삼례, 전주, 임실, 오수, 남원을 거쳐 섬진강 줄기를 따라 곡성, 구례구를 지난 뒤 저 남쪽 순천, 여수에 이르는 180.4㎞, 사백육십 리 전라선 철길은 여기서 시작한다.익산역은 참 바쁘다.이 역에서 만나는 철도 노선만 4개(호남선호남고속선전라선장항선). 일반 여객열차, 화물열차는 물론 KTX에 최근 영업을 시작한 SRT까지 취급한다.시종착 열차의 기관차를 돌려 붙이는 등의 작업도, 호남선-전라선 복합열차의 병결 및 분리 작업도 여기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15년 한 해 익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인원은 모두 447만7499명. 광주송정역(399만7775명)이나 전주역(255만8479명)보다 많은, 호남에서는 단연 으뜸인 이용량이다.교통로는, 특히 철도는 사람과 돈을 부른다. 역 주변에는 상권이 형성된다. 근현대 도시 발달사에서 예외 없이 적용된 원칙이다. 그러니 이렇게나 바쁜 호남 철도의 메카가 우리가 아는 현대 도시 익산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까지도 익산의 중심지는 옛 마한과 백제의 중심지였던 금마였다. 그러나 호남선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11년에 군청이 남일면으로 옮겨졌고, 1914년에는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해 익산면이라 부르게 된다.한촌에 불과했던 이 지역은 익산역 개통 15년 뒤인 1927년, 일본인 3322명을 포함해 8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현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이후 이리읍, 이리부, 이리시 시절을 거쳐 1995년 익산군과 통합되며 현재에 이르게 된다.그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리역은 이상하게도 폭발과 안 좋은 인연도 몇 번 맺었다. 1950년에는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수백 명이 희생됐고, 1977년에는 바로 그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1년 만에 재건된 이리역은 1995년 익산군-이리시 통합 때 익산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2015년에는 호남고속선 개통에 발맞춰 새 외피를 갖게 됐다. 역 광장에 서 있던 보석탑은 사라졌지만, 새로 지어진 역사(驛舍) 양쪽 날개 부분에 옛 역사의 모습이 남아 있다.호남 철도의 메카라는 정체성은 익산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익산대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골목골목 담벼락마다 그려진 철도 관련 벽화도 그 가운데 하나랄 수 있겠다.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어?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어느 양복점에서 웃는 얼굴과 손이 밖으로 나왔다. 기어이 그 손은 기자를 자기 가게로 데려가 종이컵에 커피 한 잔을 타 내놓고야 만다.과거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이라는 말도 있었던 번화가였던 익산 영정통 거리. 윤태중 씨는 1972년부터 45년 동안이나 이 거리에서 양복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익산대로에서 동쪽으로 살짝 들어가면 나오는 골목은 과거 번화했던 익산역 상권이 남긴 모습이다. 번성했던 익산 영정통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전형적인 원도심 거리의 외양을 하고 있다.시간의 흐름에 더해, 열차 운용이 정교해지고 익산역 환승 시스템이 잘 갖춰지면서 열차 갈아타는 시간에 이 거리까지 나오는 경우가 드물게 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하지만 그저 그렇게 쇠락하게 내버려 두기엔 쌓인 시간과 기억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터. 오래된 건물(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고 한다)을 꾸며 만든 문화복덕방에서, 이 거리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되살리는 작업을 맡은 코디네이터를 만날 수 있었다.여기도 근대 건축물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어요. 일제 강점기 건물 중에도 원형이 남아 있는 게 있고. 아직 이 거리의 테마는 구상 단계지만, 근대유산에 관한 색채는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원형이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건물의 대표 격인 것이 바로 익산문화재단 건물이다.문화예술의 거리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이 3층짜리 건물은 1930년에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 용도로 지어졌다.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곡창이라 불린 농도 전북은 역시 이 때문에 일제의 수탈 표적이 되곤 했다. 서쪽의 옥구 지역 못잖게 익산 지역도 수탈의 대상이 됐는데, 오오하시(大橋대교) 농장이니 대장촌(大場村)이니 하는 이름들이 나오는 시기가 이 무렵이다.익옥수리조합은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이 일본인 지주는 대아댐을 짓고 그 물을 돌려 농업용수로 쓰고자 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익옥수리조합은 당대 전국 최대 규모의 수리조합이었다.물론 일본인 지주가 한 일이 다 그렇듯 목적은 원활한 수탈에 있었고, 이렇게 생산량이 늘어난 곡식을 군산 등의 항구로 날라 수탈을 도운 것은 철도였다.결국 이 건물 또한 철도와 수탈의 유산인 것이다.시간이 흘러 광복과 산업화가 지나가고, 그토록 번성했던 상권도 점차 쇠락하고 중앙동 거리는 활기가 꺼져 갔다. 그런데 또 어느 틈에 예술가, 공예가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이 거리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과거 어느 순간에 박제라도 된 것처럼 남아 있던 건물과 간판들은 이제는 오히려 볼거리가 됐다.지난해에는 치맥축제나 7080축제 같은 프로그램들이 진행됐고, 올해는 등록문화재 제180호 삼산의원이 이 거리에 이전 복원되고,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에 거점 역할을 할 공간도 지어질 예정이란다.뭔 사진을 찍을라고? 이케 좀 하까?상추밭에 물을 뿌리고 있던 장하영 씨는 카메라를 양어깨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기자를 보고 외쳤다. 파란 하늘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상추 이파리에 닿아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이 퍽 평화로웠다.어릴 적 이리동중에 다녔던 그는, 바로 그가 서 있는 곳 뒤를 지나던 전라선 철길과 동이리역(동익산역)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대장촌역(춘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로 통학을 했는데, 집에 갈 때 이리역에서 기차를 좀 태워달라고 하면 역무원에 따라서 아이고, 학생인디 그냥 뭐 하면서 태워주기도 하고 좀 깐깐하기도 하고 그러거든. 그럼 동이리역까지 뛰어와서는 거기서 타는 거여. 여긴 아무래도 좀 허술하니까.1914년 11월 17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개통과 함께 문을 열 당시에는 이름이 동익산역이 아니었고, 위치도 좀 더 안쪽이었다.이리역(익산역)이 익산 시가지의 중심이 되기 전의 중앙부였던 인화동 지역(당시 주소도 본정 2정목이었다)에 구이리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는데, 호남선 분기역인 이리역(익산역)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구이리 지역은 동이리 지역으로 바뀌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랄까. 결국 1938년에는 동이리역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동익산역으로서는 이 인화동 시기가 이른바 리즈시절이다. 동익산역사(史)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하루 평균 승하차 인원이 1500여 명에 달했고, 연탄이 매일 45톤씩, 경유밀가루양회 등이 160톤씩 이 역에서 내려지곤 했다.기록을 보면 1984년에는 이 역에서 열차를 탄 인원이 96만9000명, 여기서 내린 인원이 70만1000명이었다. 합하면 무려 167만 명이나 된다.그러나 1987년에는 전라선의 호남선 접속 구간이 개량되면서 동이리역도 동산동(LH 행복주택이 지어지고 있는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수송 실적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당시 기록에는 신도시로서의 현저한 발전이 예상된다고 적혀 있는데, 물론 역사 자리에서 고작 300m 떨어진 사거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는 등 신도시로서의 현저한 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만 그것이 동익산역의 영업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운행 마지막 해였던 2007년에 이 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린 인원은 모두 1만871명. 2008년 통근열차가 끊긴 뒤로는 그나마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2009년에는 여객 취급이 중지된다.1995년 익산군-이리시 통합으로 동익산역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된 이 역은 2011년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더 남쪽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새 동익산역은 남쪽으로 멀리, 옥야초등학교를 넘어가면 나오는 허허벌판 위에 서 있다. 주변이 황량하기가, 누가 여기를 굳이 찾아오기나 할까 싶을 정도다.역에 플랫폼이 세 개가 있는데,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는 행선지를 표시하는 표지도 달려 있지 않다. 여객열차가 선 적도, 누가 여기서 여객열차를 타거나 거기서 내린 적도 없으니 굳이 안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장항선과 연결될 예정이기 때문에 플랫폼이 세 개예요. 익산역을 안 거치고 올 수 있는 일종의 삼각선인데, 지금은 군산 쪽에서 화물을 싣고 오려면 익산역에서 기관차 방향을 돌려야 되거든요. 선로가 이어지면 좀 수월해지겠죠.널찍한 컨테이너 야드에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역 관계자는 이 역에서 실어 보내는 것이 이 컨테이너 기준으로 하루 평균 20개, 이 역으로 도착하는 것이 10개 정도라고 설명했다.익산 국도화학이나 군산 OCI 공장에서 나오는, 도로로 운반하기엔 위험한 화학물질들이 주요 고객이다.사실 동익산역의 존재 이유는요, 익산으로 가는 화물열차들을 대기시키거나 하는 역할 때문이에요. 여기가 병목 구간이니까, 만약에 익산역 선로 용량이 여유가 없다, 그러면 여기서 대기시켰다가 하나씩 보내고 하는 거죠.한 마디로 익산역의 관문 역할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그것도 화물열차에 해당하는 말이다. 시각표가 정해져 있는 여객열차는 여기서 멈출 일이 없다. 여객열차에게는 결국 통로에 불과한 셈이다.철길은 동남쪽으로 곧게 뻗었다. 논두렁을 달리던 옛 철길과는 달리, 이제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밟으며 씽씽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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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혁일
  • 2017.01.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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