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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⑦익산지역 마한∙백제∙후백제 역사 유적

△견훤은 왜 익산에 주목했는가 조선 18세기 중반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견훤이 까치재 고개에 진을 치고 있을 적에 … 갑자기 기(旗)가 쓰러져 넘어졌다. 이를 보고 견훤은 자신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알고 좌우에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 ." <여지도서>. 현재 견훤왕릉은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산 17번지에 있다. 견훤의 희망에 따라 그의 릉은 남쪽으로 미륵산이 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만경강을 넘어서면 모악산도 보인다. 미륵산은 백제 금마저(金馬渚)의 중심산으로 미륵산, 용화산 등으로 불리었고 정상에는 전라북도의 최대 규모의 기준성 또는 미륵산성으로 알려진 산성이 자리한다. 견훤은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익산은 견훤 백제의 시작이자 종착역이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인 전주를 순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 견훤이 인심을 얻을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 연간 당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니 이때는 당 광화 3년(900)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 ." <삼국사기> 견훤전. 백제의 개국왕인 온조를 모를 리 없는 견훤이다. 그럼에도 백제를 금마와 연결하는 견훤의 의향은 무엇인가. 견훤은 삼국의 시초를 마한으로 이를 계승한 백제는 금마산에 후백제는 완산에 세우고자 하였다. 삼국 통일에 외세를 빌린 신라도 비판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마한-백제-후백제를, 지역으로 익산(금마산)-완산을 계승한다는 관념을 보여준 선언이다. 더하여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의지도 강하게 나타낸다. △준왕이 자리잡은 곳, 금마의 마한 견훤이 주목한 후백제의 원류인 마한은 한반도 서남쪽에 자리잡았던 고대의 연맹체 국가이다. 중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진서(晉書)> 동이열전에 54개국 또는 56개국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익산의 금마는 <제왕운기>와 <고려사>에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의 난을 피해 남천하여 마한을 세운 곳으로 나타난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준왕은 …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준왕이 금마군으로 옮겨가 정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군인이 되었다." <제왕운기>. 마한의 고지는 준왕이 남천하기 이전 한지(韓地)로 소개되고 있다. 그 물질문화는 세형동검과 점토대토기문화로 대변된다. 토광묘가 등장하고 유력한 수장들은 적석목관묘를 사용하는데 대략 기원전 3세기 경이다. 금강 유역의 대전 괴정동을 비롯하여 전남의 화순 대곡리, 전북의 익산 다송리, 군산 선제리, 전주 여의동·원만성·효자4, 김제 대동리유적 등에서 이 적석목관묘를 살펴볼 수 있다. 또 하나 고대국가의 성립에 중요한 한 축은 치수(治水)와 관련된 행위이다. 세계의 고대문명 대부분은 범람하는 강의 물을 조절함으로서 안정적인 국가 체계와 도시 구조, 잉여 생산물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호남평야의 익산 황등제(黃登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정읍 눌제(訥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김제 벽골제호를 경계로 전라도를 호남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나라의 가장 큰 제언으로 호남 3호를 언급한다. 17세기 실학자였던 반계 유형원도 <반계수록(磻溪隧錄)>에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황등제를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이자 가장 중요한 조세의 근원으로 밝혔다. 황등제는 2019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3세기에 축조되었다. 벽골제는 330년 축조 기사가 전한다. 눌제도 <정읍군사(井邑郡史)>에 마한~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일부 발굴조사에서 황등제나 벽골제와 비슷한 공법이 확인되었다. 위의 고대 수리시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서 고조선 준왕은 위만의 세력에 밀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으로 향하였다. 남쪽에는 일찍부터 풍요로운 땅과 바다와 산이 있는 호남평야를 바탕으로 중국 전국이나 전한, 고조선과 교류하는 세력이 있었다. 한 나라를 옮기거나 세우는데 기반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준왕의 남천에는 불모지 익산이 아니라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이미 고도화된 정치체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마한과 백제·후백제의 땅, 만경강 익산과 완주, 전주는 공간적으로 만경강 중상류를 점유하고 있다. 마한 소국의 정확한 위치와 지명 비정은 사료의 음가에 의하고 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이러한 작업에 신중을 기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고고학 자료의 집중도가 소국의 위치를 어느 정도 말해주고, 그렇다면 완주 상운리·봉동 수계리, 전주 여의동·만성동, 익산 사덕유적 등 이 일대가 하나의 소국을 형성할 만큼 동일한 문화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완주 상운리 분구묘를 중심으로 마한시기부터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고도의 철기제작 기술을 소유한 유력집단이 그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백제 한성말기~사비기에 조영된 완주 배매산성·삼례토성·구억리산성 등의 군사시설로 보아 익산 백제 이전에 만경강을 중심으로 고대문화의 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도 익산 백제와 견훤 백제 무왕은 600년에 즉위하여 금마에 새로운 수도를 기획하였다. 금마에는 백제의 지방군 치소인 금마저(金馬渚)가 있었으며 무왕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금마를 중심으로 궁성인 왕궁성과 오금산성, 미륵산성, 금마저토성, 낭산산성, 용화산성 등의 성곽 유적, 미륵사지, 제석사지, 사자사, 왕궁사, 석불사, 오금사, 태봉사 등의 사찰 유적, 그리고 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쌍릉과 무왕의 탄생 설화가 있는 용샘이 존재한다. 이 유적들은 고도 익산 백제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며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00년이 되었다’는 견훤의 시각은 마한을 이어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분명한 뜻이었다. 특히 미륵사는 무왕이 어려운 세상을 극복하고 정토인 미륵의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 이곳에도 견훤의 행적이 담겨있다. "6년(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옮겼다." <삼국사기> 견훤전. "3년이 지나 금산사 의정(義靜) 율사의 계단에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다. … 용덕 2년(922) 여름 특별히 미륵사(彌勒寺) 개탑(開塔)의 은혜를 입어, 이에 선운산의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단에 올라 설법했을 때 천상의 꽃이 이리저리 날렸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 명예가 더욱 빛났다." <갈양사혜거국사비문>. 견훤은 무왕의 노력에도 성공하지 못한 합천의 대야성을 920년에 함락하고 김해의 진례성까지 진격하였다. 이어 922년에는 이곳 미륵사에서 개탑의식을 갖고 고창 선운사에서 승려를 뽑는 과거인 선불장을 열었다. 미륵사 개탑은 백제의 신라 공략에 대한 오랜 한을 풀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이며 선불장은 신라 쇠락의 가장 핵심 요소인 골품제의 폐단을 극복하고 승과를 통해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통치이념을 나타낸 것이다. 개탑의 행위는 실제 탑의 중수로도 볼 수 있으나 국가의 큰 행사를 맞이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대중에 공개하는 영불골(迎佛骨) 의식과 같은 정치적 행사로도 볼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석탑에서도 후백제와 유사한 시기인 10세기 초 경의 금동불상과 함께 유리병, 금제사리함, 금강경 등의 사리장엄구가 일괄 출토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금강경의 문구와 경판의 사용흔을 바탕으로 백제 제작설이 제기되는데 이 또한 기존의 왕궁탑을 다시 세우는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도 유추해본다. 금마저에 위치한 많은 유적에서는 토기, 자기, 기와, 금속공예품 등 수 만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유물보다는 통일신라 이후의 것들이 더 많다. 시기별, 제작 주체별 연구 또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550여 편의 중국자기를 2023년에 새롭게 정리하고 있다. 중국자기에는 견훤과 밀접한 오월의 월주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후백제 문화상을 밝히는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최흥선 국립익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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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3 15:56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⑥후백제의 군사력과 고려와의 전쟁

△후백제 군대가 강성한 이유 진훤 왕은 지금의 순천만 일원에서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거병했다. 필자가 1998년에 출간한 <진훤이라 불러다오>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장성하면서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고, 뜻과 기상이 빼어나서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 특출난 자질의 소유자였다. 진훤 왕은 “서남해로 부임하여 수자리를 지켰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가 항상 사졸의 으뜸이 되도록 일하였기에 비장이 되었다”고 했다. 비장은 조선 후기 희극소설 <배비장전>에 등장하는 아전 류와는 다르다. 진훤 왕은 북원경(강원도 원주)을 거점으로 예하에 국원경(충주)과 서원경(청주)까지 장악한 대호족 양길에게 비장 직을 수여했다. 비장은 고위직임을 알 수 있다. 거병 당시 진훤 왕은 해적 소탕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을 거느렸다. 그는 한 달만에 5000에 달하는 병력을 결집시켰다. 이들이 후백제 군단의 주축이 되었다. 진훤 왕이 파죽지세로 서남부 지역을 장악한 데는 잘 훈련된 관군 장악과 무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후백제 강성 요인이었다. △후백제와 고려의 격돌 조물성 전투 후백제와 고려는 918년~924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한 왕건은 시급한 내정 문제에 급급했다. 그렇기에 화호(和好)를 요청하며 궁예 때와는 달리 전쟁이 없는 시대를 열었다. 왕건은 웅진(공주)과 운주(홍성) 등 10여 주현(州縣)을 후백제에 넘겨 주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외적 상황이 안정되어야 했었다. 이후 양국은 격돌이 없었다. 대신 진훤 왕은 신라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924년 7월 진훤 왕은 왕자 수미강을 시켜 조물성(경북 의성 금성산성)을 공격하였다.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장군 애선을 보냈지만 후백제군에 살해되었다. 이듬해 925년 10월 진훤 왕이 3천 기병으로 내려오자 왕건 역시 정예 병력을 이끌고 몸소 내려와서 대적했다. 국왕으로서 두 사람 간의 첫 대결이었다. 이때의 전황을 “그때 진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임시로 강화를 해 그 군사를 지치게 하려고 편지를 보내 강화를 빌었다(<삼국사기>진훤전)”고 했다. 이와는 달리 “유검필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합치자 진훤이 겁을 먹고 강화를 빌었다(<고려사>태조 8년 10월)”고 하였다. 강화를 요청한 주체를 서로 다르게 기록했고, 인질을 교환하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로 보면 무승부처럼 비치지만 실마리가 잡힌다.<고려사>박수경전에는 고려의 상군과 중군은 패했고, 하군만 승리했다고 한다. 왕건이 속한 중군을 포함해 고려군 3분의 2가 패하였다. 왕건은 이때 진훤 왕을 존칭인 상보(尙父)로 일컬었다. 열세인 왕건이 자신의 장기인 립서비스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강화를 요청한 주체가 왕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의 패배였고, 이후 양국은 격렬하게 격돌하였다. △공산 전투 927년 가을 진훤 왕은 신라 경애왕이 왕건과 내통해 사직을 넘기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경주를 급습했다. 진훤 왕이 왕건에게 보낸 격서(檄書)에서도 신라의 종묘사직이 고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주에 왔음을 밝혔다. 경애왕의 비극을 듣고 왕건은 5천 기병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는 후백제군의 귀환로인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군은 오히려 후백제군에게 역포위되고 말았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한결 같이 “심급(甚急)”이라고 했다. 왕건은 몹시 위급한 상황에 놓였고,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몸으로써 막다가 모두 전몰하였다. 공산 전투와 관련해 생겨난 지명인 ‘파군치(破軍峙)’는 동화사와 파계사(把溪寺)로 갈라지는 길목의 재 이름이다.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한데서 연유했다. 그리고 양군이 격전을 치를 때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는 ‘살내[箭灘]’가 있다. 그리고 왕건이 밤에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때 한밤 중에 새벽달이 떠 있기에 ‘반야월(半夜月)’로 불렀다고 한다. 도망치던 왕건이 얼굴이 밝아졌다는 ‘해안’, 왕건이 도망치다가 안심했다고 하는 ‘안심’ 등의 지명이 보인다. 그 밖에 대구광역시 앞산 공원 일대 여러 사찰에는 왕건이 숨었거나 쉬어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때의 전장은 대구 팔공산 뿐 아니라 영천 및 칠곡과 성주 일원까지 미쳤다. 공산 대첩 이후 진훤 왕의 정치적 위상은 한껏 고양되었다. 그가 왕건에게 보낸 격서에서 “···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패는 알만함이니, 기약하는 바는 평양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도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훤 왕의 위세는 “전주왕 진훤이 수십주(數十州)를 쳐서 병합하고 대왕을 칭했다”고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공산 대첩 이후 나주를 비롯한 숱한 세력들이 고려에서 이탈해 후백제에 붙었다. 공산 대첩은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았다는 진훤 왕의 넷째 아들 금강 왕자의 작품으로 보인다. △강주 점령 진훤 왕은 지금의 경남 진주에 치소를 둔 강주를 점령하려고 군사력을 쏟았다.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928년 1월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고려군이 패하였다. 후백제군이 강주를 포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진훤 왕은 그해 5월 강주에서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양곡을 옮기려 떠난 틈을 타서 기습했다. 고려군은 급히 회군했지만 패했고, 강주장군 유문은 항복하였다. 이후 진훤 왕의 둘째 아들 양검 왕자가 강주도독이 되었다. 진주 촉석루 의암 부근에서 출토된 오월국 연호 ‘보정寶正’(926~931) 명문 기와는 후백제 통치의 산물이었다. △영남 북부 지역에서의 전투 928년 10월 진훤 왕은 부곡성(군위)을 함락했다. 그리고 진훤 왕은 11월 고려의 오어곡성(예천군 하리면)을 함락시켜 1천 명을 전사시키고 고려 장수 6명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왕건은 전군을 집결시켜 6인의 처자를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리고 기시(棄市)했을 정도로 격분했다. 이어 진훤 왕은 5천의 중무장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의성부(경북 의성)를 공격해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비보를 접한 왕건은 “내가 양쪽 손을 잃었다”고 말하면서 통곡했다. 왕건의 충격이 컸음을 뜻한다. 진훤 왕은 여세를 몰아 안동과 예천의 중간에 소재한 순주(안동시 풍산면)를 공격하였다. 장군 원봉은 성을 버리고, 그것도 야반도주했다. 진훤 왕은 순주의 주민들을 붙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분노하여 후백제 영토가 된 순주의 이름을 하지현(下枝縣)으로 격하시켰다. 왕건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음을 뜻한다. 929년 12월 진훤 왕은, 고창군(안동)에서 고려군 3천 명을 포위했다. 그러자 왕건이 직접 구하러 왔다.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섰다. 이후 안동과 청송을 비롯한 30여 군현과 동해변 110여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 신라 지역 호족들이 고려로 대거 넘어갔다. △새로 찾아낸 쾌거, 발성(勃城) 전투 932년 9월 후백제군 선단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접한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후백제 수군은 3일간 예성강에 머물면서 염주(황해도 연안)와 배주(황해도 배천)·정주(개성 풍덕), 이 세 고을의 선박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황해도 연안)의 목마 300필을 빼앗아 개선했다. 후백제군의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10월 진훤 왕은 해군 장수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했다. 후백제 수군은 압록강 하구까지 강타하였다. 고려군은 패하여 쫒겨갔다. 후백제군은 왕건이 출동시킨 사촌 동생 만세의 군대마저 밀어냈다. 후백제군은 고려의 해군력을 궤멸시키다시피 했다. 근심했다고 할 정도로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진훤 왕은 통쾌하게 보복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발성의 싸움에서 태조가 포위당하자, 박수경이 온힘을 다해 싸운 덕에 힘입어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려사>박수경전)”는 전역(戰役)을 주시해 본다. 고려 왕궁을 이루는 성벽 발어참성의 '어참(禦塹)'은 '방어하기 위한 참호' 즉 해자가 있는 성을 뜻한다. 발어참성은 곧 '발성'을 가리킨다. 그러한 고려 수도에서는 한 시대를 진동시킨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932년 9월 예성강을 거슬러 온 후백제 선단이 개성에 상륙해 고려 왕궁을 덮쳤다. 왕건 생애에 다시금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는 부하 장수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탈출하였다. 그랬기에 귄위를 실추시킬 수 있는 발성 패전은 공식 편년 기록에서는 지웠다. 부하의 충성심 현양과 관련한 자료를 통해 우연히 드러난 것이다. 박수경의 딸이 왕건의 제28비(妃)가 되었다. 발성 위기에 대한 보은이었다. 후백제군은 고려 심장부를 강타해 왕건을 전율하게 했다. 이때의 전장은 개성 만월대 일원뿐 아니라 예성강유역 풍덕, 황해도 연안과 저산도 및 배천까지 포괄했다. △마지막까지 웅강한 국가 후백제 후백제는 933년 제2차 경주 진공 작전을 펼쳐 신라를 다시금 공포에 몰아넣었다. 934년 9월 진훤 왕은, 중무장한 병력 5천을 이끌고 운주(홍성)에서 왕건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여파로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후백제 성들이 고려에 항복했다. 후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전투는 936년 9월 일리천(선산‧구미)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진훤 왕은 고려군 진영에 있었다. 그랬기에 대통합이 이루어졌다. 후삼국 역사의 시작과 끝은 진훤 왕이었다. 후백제 왕국은 시종 웅강함을 잃지 않았다. 진훤 왕의 사위 박영규 장군이 자신의 아내에게 “대왕께서 근로한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가서 의탁하였소”라고 했다. 멸망 시점까지도 여전히 후백제는 강성했었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뜻한다. 현전하는 후백제 관련 기록의 왜곡을 반증한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백제와 후백제 군사력의 바탕, 최강 국력 군사력은 자고로 인구와 경제력,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와 숙련도로 판정난다. 이와 관련해 후백제는 사비성 도읍기 백제 영역이나 주민 상황과 겹친다. 동일한 시기 백제 인구는 고구려 말기 인구 69만 7천 호를 상회하는 76만 호였다. 게다가 경제력은 백제가 고구려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조선시대인들의 백제 국력에 대한 평가와도 다르지 않았다. 예조참판에도 올랐던 이승소(李承召)는 1478년에 “옛적에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강한(强悍)하였고, 전투를 좋아했다(<三灘集>)”고 했다. ‘강한’은 용맹하고 사납다는 뜻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는 정경세(鄭經世)와의 경연(經筵)에서 “삼한시절에 백제가 가장 강했다(<經筵日記>)”고 단언하였다. 저명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였다(<與猶堂全書>)”고 했다. 삼한 즉 삼국 가운데 고구려를 제끼고 백제가 ‘가장 강했다(最强)’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삼국 중에 가장 군사력이 강대한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백제 진훤 왕은 말년에 자신의 군사가 북군 곧 고려 군대보다 갑절이나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조참판을 역임한 유계(俞棨. 1607~1664)도 “삼한을 침탈하기 40여 년 동안, 그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날렸다”고 평가했다. <오하기문>에서도 “호남 한 도(道)는 우리나라의 남쪽 울타리로 자연 경관도 빼어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생산물 또한 풍부하다. 국가는 이용후생에 필요한 전체 재원의 절반을 호남에 의존하고 있다. 호남 지역에는 재주가 있고 민첩하며 여러 가지 일에 능숙한 인물이 많아 옛날부터 지략과 지모를 갖춘 걸출한 선비가 종종 배출되었다. 그래서 백제가 그들을 기용해 신라‧고구려와 병립하는 구도를 만들어냈고, 진훤도 그들을 발탁하여 왕건에게 지지 않고 맞설 수 있었다”고 설파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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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6 17:58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⑤견훤의 광주 도읍 실패와 후백제 전주 정도

후백제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10 견훤전에 “무진주를 습격한 후에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오히려 감히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왕을 칭할 따름이었다(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는 내용이다. 자왕(自王)과 칭왕(稱王)의 관계다. 자왕은 견훤이 한 달만에 5000명의 무리들을 모아서 892년 무진주를 습격하여 자기 스스로 왕이라 하였는데, 왕으로서 즉위식은 커녕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고 왕으로 행세하지 못하고 자칭 왕으로 그쳤다는 이야기다. 견훤이 광주를 습격하여 ‘내가 왕이로소이다’선언하였는데, 광주 전남지역의 지방세력들은 왜 동조는 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일까. 자왕과 칭왕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신라하대 광주 전남지역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라하대에 진골귀족들이 왕권경쟁으로 골육상쟁을 벌일 때, 중앙정부의 권력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지방권력들은 성장하였다. 신라는 고대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 지역의 소국의 지배층에게 촌주(村主)라는 관직을 부여하였고, 촌주의 재지권(在地權)을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국가통합을 성취하였다. 촌주세력들은 중앙권력의 지방통제가 약화되는 상황을 틈타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촌주들은 국가의 말단 행정 관리였지만, 실제 각 지방의 재지유력자들이었다. 신라하대 촌주들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으로 성장하고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을 장악한 성주(城主)와 장군(將軍)으로 등장하였다. 각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토착지배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종교사상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하대에 당나라 유학승들은 남종선(南宗禪)을 들여왔는데, 신라중대 왕권, 귀족 중심의 화엄종보다는 지방호족들과 결탁하여 선종을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불교계의 활동 무대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중심이동이 이뤄지고, 불사(佛事)의 주체도 왕실과 귀족에서 지방의 촌주, 호족들이 주도하였다. 교종이 선종을 배척한 이유가 있었지만, 선종이 지방독립적인 토착세력들의 정치적 성향과 서로 부합하였다. 선종승려들은 왕실과 거리를 두고 지방호족들과 사상적으로 유착하였지만, 산문에 따라서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고 요청에 따르며 중앙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신라하대에 9산선문이 개창되면서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이 전라도 지역에 들어섰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는 도의선사다. 도의(道義)는 784년에 입당하였다가 40여년 뒤 821년에 귀국하였다. 도의가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산문을 열었다. 가지산문은 도의-염거-체징-형미로 법통이 이어졌다. 실상산문의 개산조는 홍척선사이다. 남원 운봉은 남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기에 신라지배층의 성향이 강하였다. 홍척(洪陟)은 신라왕실과 자주 왕래 소통하면서 실상사가 왕실사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실상산문은 홍척-수철-편운으로 법통이 이어졌다. 동리산문은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혜철선사가 개창하였다. 혜철(慧徹)은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혜철의 법통은 도선-윤다-경보로 이어졌다. 이처럼 신라하대 선종산문과 왕실과 지방세력은 상호호혜적 유착관계를 보여줬다. 신라말 고려초에 서남해안에는 다음과 같은 선종사찰이 산문을 열었다. 동리산문, 가지산문, 사자산문 문도들은 개산조 입적 이후에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선종사찰은 대안사(태안사:곡성), 연곡사(구례), 쌍봉사(화순), 무위갑사(강진), 송계선원(광주), 보림사(장흥), 옥룡사(광양)가 분포하고 있었다. 의상(義湘:영암 도솔암, 화순 규봉사), 도윤(道允)·체징(體澄:능성 쌍봉사, 장흥 보림사), 영통(靈通:장흥 천관사), 도선(道詵:영암 도갑사, 강진 무위사, 화순 규봉사), 의조(義照:영암 달마산 서굴), 지눌(知訥:화순 규봉사), 진각(眞覺:강진 월남사), 원묘(圓妙:강진 백련사), 혜일(慧日:완도 법화암)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선사들의 활동 무대는 영암, 화순, 능성, 장흥, 강진, 완도 등지였다. 이처럼 신라 진성여왕 때까지 한반도 서남해안의 친신라계 선종 사찰과 승려들은 신라 왕실과 지방호족 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서남해안에서 거병하였다. 신라하대 서남해안 선종도량과 왕실의 유착관계는 분명하나, 선종을 후원하였던 지방호족의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신라하대 선종산문의 후원자들이 밝혀진 바가 없고, 문헌과 금석문에도 밝혀진 사례가 없다. 9산선문의 후원자들은 각 지방의 토착호족, 즉 토호(土豪)들은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신라하대에 촌주세력이 불사(佛事)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신라하대 호족들은 토착호족(토호)과 낙향호족이 있었다. 토착호족은 촌주들이 재지기반으로 성장한 호족이라면, 낙향호족은 왕권쟁탈전에서 패퇴하여 지방에 은거하는 호족들이다. 토호가운데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가진 성주·장군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과 전투 과정에서 투항자 명단이 밝혀졌다. 각 지역의 토호들은 유력한 토성(土姓) 집단을 대표하는 호족이었다. 나말여초 토성집단의 대표 호족이 성주·장군이었다. 나말여초 서남해안 각 지역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왜 견훤이 광주에서 칭왕(稱王)으로 끝나고 말았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군현별 성씨 자료와 전남종가회에서 밝힌 전남지역 성씨 자료를 분석해보면, 나말여초 당시 전남지역 토호집단의 정치적 성향이 엿보인다. 전라남도 장흥, 해남, 강진, 완도, 구례, 곡성, 영암, 화순, 능성 등의 토성집단을 살펴보면, 신라 사로6촌 및 신라왕실의 인물을 시조(始祖)로 두고 있는게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성씨는 경주이씨(나주), 무안박씨(무안), 김해김씨(화순,영암), 함양박씨(영암), 청주김씨(장흥), 밀양박씨(장성,나주), 진주정씨(보성), 양산김씨(강진), 낭주최씨(영암), 동래정씨(영광), 장흥위씨(영암), 경주정씨(순천), 반남박씨(영암), 창녕조씨(영암), 나주김씨(무안) 등이다. 이 성씨들이 나말여초 당시 토호세력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전남 서남해안 토성가문들은 친신라계 성향을 가졌으며, 궁예-왕건 정권과 유착은 예상되는 일이다. 전남 토성가문의 대표호족들은 반신라적 민중봉기를 일으킨 견훤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정서였을 것이다. 견훤과 전남지역 호족의 관계는 승주의 호족 박영규(朴英規:순천박씨 시조)와 김총(金摠:순천김씨 시조)을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광주의 호족 지훤(池萱)과 강주장군 유문(有文), 오어곡성장군 양지(楊志)·명식(明式) 등 6인, 순주장군 원봉(元奉) 등이 후백제 견훤에 귀부한 호족들이었다. 하지만 정권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견훤은 광주에서 8년동안 호족연합정권을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남지역이 가진 마한시대 전통의 지역적 토착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900년에 백제의 땅 전주로 향하였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후백제 견훤과 선종의 관계 나말여초기 왕권과 선종과 유착 관계는 견훤의 후백제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견훤은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과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과 호혜 관계를 맺었다. 도당유학승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가 921년 사수천 신창진으로 들어왔다. 사수천은 현 만경강의 옛 지명이다. 신창진(新倉津)은 만경강 하구 나루터다. 견훤은 친히 경보를 맞이하여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모셨다. 남복선원은 전주 남복산에 있었다. 남복산(南福山)은 현재 전주 완산칠봉이다. 경보는 동리산문(桐裏山門)에 속한 선종승려이며, 도선국사의 제자이다. 경보의 임피현 신창진 귀국은 견훤의 배려로 보인다. 경보는 일단 옥룡사로 갔다가 견훤정권의 국사로 남복선원에 돌아와 주석하였다. 924년 당의 유학승이었던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도 희안현 제안포로 귀국하였다. 희안현 제안포는 부안군 보안면 남포 일대다. 운봉 실상사 조계암지에는 홍척국사의 제자인 편운화상의 부도탑이 있다. 편운화상 부도탑(보물 제2208호)은 원통형 형태인데, 이 부도탑 탑신 상단에 “홍척의 제자로서 인봉사를 개창한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정개십년 경오년에 세웠다(創祖洪陟弟子 安峰創祖 片雲和尙浮圖 政開十年庚午歲建)”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십년 경오년은 견훤이 900년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 명문은 후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유일한 자료다. 나말여초 당시 중국 황제 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쓸 수 없었는데, 후백제 정개 연호는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정개(正開) 연호는 후백제가 중국과 신라에 예속된 나라가 아닌 독립국가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 편운화상 부도탑은 후백제 견훤정권과 실상산문의 지원과 지지의 호혜적 관계를 말해준다. 이러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선종 후원은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의 조성이 말해준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국내 철불의 효시이며, 운봉 일대의 철산지를 운용한 후백제 견훤정권의 상징적 유물이다.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편운화상 부도에 음각된 정개10년 연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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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9 15:4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④영산강과 영암만, 압해도 일대 후백제 이야기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10세기 초반의 한반도 지도를 보며 한 번쯤 의아하다는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후백제의 배후가 그들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후고구려 궁예, 송악의 대호족 왕건을 품다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백제의 부활을 선언한(900) 이듬해, 신라 북변의 거주민들을 향해 잡초로 우거진 평양을 환기하며 고구려의 복국을 외친 이가 있었다. 신라의 왕자 출신인 궁예였다. 어릴 적 신라 왕실에서 벌어진 구구절절한 사연은 차치하고, 894년 명주(강릉)에 입성한 뒤 자립하는데 성공한 궁예는 동해안을 크게 휘돌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자신을 거두어준 양길과의 대전 준비가 한창이던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 왕륭・왕건 부자가 궁예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오랜 시간 바다를 주 무대로 활동하며 여러 해상세력과 폭넓은 호혜 관계를 형성해왔던 그들의 선대였다. 왕건의 증조부인 작제건의 할아버지가 당 7대 황제 숙종이라는 ‘고려세계(高麗世系)’의 설명은, 물론 왕씨 가문의 유구함과 고려 왕실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분식이겠지만, 수용 여부와 별개로 그들 선대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암시한다. 송악 일대의 확보는 거들뿐, 궁예를 크게 고무시킨 것은 이들이 소유한 ‘해상력’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곧장 왕륭을 금성(金城, 김화) 태수로, 왕건을 발어참성(勃禦槧城) 축조의 책임자이자 성주로 임명하여 그들의 귀부에 부응하였다. 두 부자를 앞세운 후고구려의 수군은, 적극적인 해양 활동을 통해 웅비를 꿈꾸던 견훤의 후백제에 장차 큰 위협을 예비하고 있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나주에서 최초로 맞붙다 견훤은 무진주(광주)에서 나라를 열었다. 의견이 분분하나, 견훤이 비장에 임명되어 방수 임무를 수행한 ‘서남해’의 위치를 나주나 그 인근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후백제 건국의 기반이 되는 소중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9세기 후반의 나주는 느슨한 형태로나마 견훤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궁예에게 귀부한 공간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903년에 왕건을 보내 광주 경계의 금성(錦城)을 비롯한 10여 군・현을 빼앗고, 이곳을 나주로 고쳤다고 한다. 이보다 먼저 901년 8월에 대야성(합천) 공략에 실패한 견훤이 군사를 ‘금성 남쪽’으로 옮겨와 그 주변을 약탈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제 영토를 ‘노략질’하는 군주가 있을까? 아마도 나주를 비롯한 이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은 이 이전부터 후백제의 영향력 밖에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로를 통해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지배 영역을 관통하여 나주 일대까지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후고구려의 수군이 후백제의 뒷공간을 공략한 결과이다. 이렇듯 903년의 나주는 후삼국시대를 열어젖힌 두 신생 국가의 물리력이 충돌한 최초의 시・공간인 셈이다. 강진 무위사에 세워져 있는 선각대사 형미(迥微)의 탑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이 서남부 지방의 경략에 후고구려왕 궁예가 친히 거둥했다고 한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바다에서 외교로 맞붙다 탁월한 안목과 적절한 인식을 바탕으로 국제 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국익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한 나라의 원수가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완산주에서 백제 복국을 공식 발표한 견훤이 첫 번째로 선택한 정치적 행보는 중국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견훤은 정국 운영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했을 때마다 오월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후백제가 오월에 손을 뻗치던 즈음, 중국 역시 5대 10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였다. 중원의 패권 다툼에 여력이 없었을 오월로부터 후백제가 군사적인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책봉을 받아 국내・외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후고구려가 자취를 감춘 918년 그해에 견훤은 오월에 ‘말’을 진상하였다. 그는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기도 했다. 경제적・문화적 목적에서의 교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909년에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오월로 들여보내는 선단이 후고구려군에게 붙잡힌 일이 발생하였다. 신안, 무안, 영광 등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합의가 여의찮으나, 염해현은 후백제가 오월과의 공세적인 교섭을 위해 거점으로서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후백제의 해양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였다. 궁예는 나포의 주역인 왕건을 크게 포상하였다. 이 사건은 후고구려에게 서남해 일대의 장악을 위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압해도의 해상영웅 능창, 궁예에게 욕보이다 외교 선단의 피랍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신안 압해도 인근에서 능창(能昌)이 후고구려에 사로잡혔다. 압해도의 송공산성 일대를 드나들며 인근 해상세력을 규합한 능창은 ‘수달’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전에 능하였다. 지금 송공산 앞에는 압해도 일대를 주름잡았던 능창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은 주유를 낳았지만, 제갈량도 함께 보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이번에도 왕건이었다. 능창은 철원으로 압송되었고, 궁예에게 갖은 모욕을 당한 뒤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 능창과 견훤이 무슨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궁예는 능창이 보유한 ‘해상 공격력’을 포기하였다. 왕건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능창을 욕보임으로써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메시지의 수신처는 후백제 왕도 전주였을 것이다. 훗날 고려 후기의 관료 조준은 우왕에게 “우리 신성(神聖, 태조)께서 신라와 백제를 평정하지 못하셨을 때, 먼저 수군을 조련하시어 친히 누선을 타고 금성의 항복을 받아 점령하시니,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그 재력에 힘입어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시었습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에게 나주 일대의 공략 성공은 고려의 후삼국 통합을 위한 정초(定礎)로 회자되었다. 반면, 뒷문 단속에 실패한 후백제는 후삼국 쟁탈전의 레이스 도중에 계속해서 뒤를 쳐다봐야만 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뒤까지 신경 써야 했던 후백제였다. 물론 후고구려나 고려 역시 빼앗은 거점을 지켜내기 위해 인적・물적 투입을 지속해야 했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다. 그러나 후백제에게 후방 제어 실패의 대가가 뼈아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자료’의 문제 궁예와 견훤은 후삼국 쟁패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고구려・백제 복국 운동의 ‘자초지종’에 대한 자기주도적 설명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작 그 권한은 이들을 패망의 길로 내몰았던 왕건의 고려가 움켜쥐게 되었다. 한 사람은 왕건이 전면에 나서 혁명을 일으켜야 할 빌미를 제공한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게 끝까지 칼을 겨누며 훼방을 놓은 이였다. 왕건에게 궁예는 ‘창업’, 견훤 은 ‘수성’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궁예의 신하였다. 자신이 섬기던 자를 내몰고 왕이 된 인물인 셈이다. 이신시군(以臣弑君), 즉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행위는 유교 국가에서 불인(不仁)의 상징이다. 고려 사람들이 ‘거의(擧義)’라 에둘러 표현한 이 ‘찬탈’에 대해 왕건 본인조차 훗날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고 내릴 것을 염려하였다. 이를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 궁예는 한 나라의 군주가 아닌 독부(獨夫)로 규정되었고, 견훤은 원악(元惡)으로 지목되어 비난의 포화를 감당해야 했다. 이들은 단지 태조의 창업을 위해 백성들을 잘 갈무리해 준 ‘구민자(歐民者)’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가 지속되는 한, 궁예・견훤과 그들의 복국 왕조를 향한 서술이나 평가가 균형 잡힐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는 이들의 사적을 철저하게 ‘고려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계가 명백한 고려시대의 저작물들을 토대로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은 마땅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위시한 자료들을 내버려 둔 채 우리가 후백제의 역사로 다가갈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를 받아들인 연후에, 그로부터 후백제 본위의 호흡과 시선을 가려내는 시도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관련 기록들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이른바 ‘후백제사(後百濟史)’와 같은 후백제 계통의 역사서가 존재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자료 환경에 대한 적실한 각성이야말로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홍창우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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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2 15:30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③견훤의 후백제, 해양국가의 지향성

△산골 출신 견훤, 해양에 입문하며 후백제를 건국하다 견훤은 원래 바다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 출신이다. 그가 바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889년(진성여왕 3)에 신라가 파견한 ‘서남해방수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국내외 해양의 핵심 거점에 해당하는 서남해지역을 방수(防戍)하는 것이 ‘서남해방수군’의 임무였다. 견훤은 그 일원으로서 진군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소부대를 지휘하는 ‘비장(裨將)의 지위에 올랐다. 비장 견훤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 당도할 즈음에 5,000여 명을 헤아리는 무리가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고서 신라에 대한 반심(叛心)을 품기 시작하였다. 강주, 즉 진주는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사천 및 남해도로 통하는 남해안 해양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으니, 산골 출신 견훤이 이곳에서 처음 바다를 대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어 순천을 접수하고 순천만과 광양만의 바다를 무대로 세력을 떨치던 박영규와 김총 등의 해양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견훤의 군대는 해륙(海陸)을 아우르는 대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순천에서 견훤은 잠시 숨고르기에 나섰다. 원래의 목적지인 서남해지역은 다도해를 기반으로 한 능창이나 영산강의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오다련과 같은 강력한 해양세력이 버티고 있었던 반면, 광주는 유력 호족인 지훤 등이 자진 투항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견훤은 광주를 먼저 접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뒤에 서남해지역을 진출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892년에 광주에 입성하였다. 경주에서 진군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8년여 동안이나 광주에 머물며 서남해지역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900년에 우선 전주로 옮겨가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건국을 선언한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후백제 견훤, ‘영산강대전’에서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패하다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서남해지역 공략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영산강유역 나주의 유력세력 오다련 등은 마침 궁예가 901년 후고구려(후에 태봉)를 건국하자 그와 전략적 연대를 모색했다. 연대의 실행은 궁예의 해군장군 왕건에게 맡겨졌다. 왕건은 903년 궁예의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유역에 당도하였고, 첫 출전에서 오다련 등의 협조를 받아 나주 인근 10여 군을 접수하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왕건은 그 여세를 몰아 909년에는 중국 오월에 파견한 견훤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2년에는 목포와 덕진포 사이의 영산강(‘몽탄강’)에서 견훤이 직접 인솔한 후백제의 수군과 결전(‘영산강대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다도해를 기반으로 비타협적 저항을 지속해오던 압해도의 수달장군 능창마저 생포하였다. 결국 918년 왕건은 서남해지역 장악의 성과를 배경으로 삼아 실정을 거듭하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후백제 견훤은 최고의 해양 거점인 서남해 나주지역을 선점한 고려의 왕건을 상대로 힘겨운 해양 쟁투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백제, 고려와의 대결에서 해양 주도권을 잡다 당시 영산강유역의 중심 도시 나주가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해양의 핵심 거점이었다고 한다면, 서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운주이고 남해안의 해양 중심 거점은 강주였다. 운주는 오늘날 충남 홍성을 중심으로, 서북으로 태안·서산·당진 등과, 동북으로 예산·아산 등과, 남으로 보령 등과 통하고, 안성천·삽교천·곡교천·무한천 등의 숫한 하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해 바다와 이어주고 있는 곳으로, 일찍부터 ‘내포(內浦)’지역이라 불리는 서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왕건이 서해안을 통해 영산강유역으로 진군할 때 해로의 중간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강주, 즉 오늘날의 진주는 동으로 김해와, 남으로 남해도와, 서로 순천과 통하는 남해안의 최고 해양 요충지로서, 일찍이 견훤이 해양과 첫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였다. 후백제 견훤은 나주와 운주와 강주를 중심으로 고려 왕건을 상대로 한 치열한 해양쟁패전에 나섰다. 나주를 선점한 왕건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실제로는 양자 간에 해양 거점을 둘러싼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먼저 왕건이 선점했던 운주의 경우 918년에 견훤이 빼앗았고 927년 3월에는 왕건이 탈환했으며, 928년 하반기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갔다. 또한 견훤이 선점했던 강주의 경우 920년 왕건에게 넘어갔다가 924년경에 견훤이 탈환했으며, 927년 4월경에 다시 왕건에게 돌아가더니 928년 5월에는 견훤에게 다시 넘어왔다. 결국 강주와 운주 지역의 전황을 종합해 보면 927년에는 주도권이 왕건에게 잠시 넘어가는가 싶더니 928년 후반부터는 견훤에게로 넘어가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929년경에는 나주마저 견훤이 장악하였으니, 이제 서해와 남해와 서남해의 해양 주도권은 견훤에게 넘어온 셈이 되었다. 후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해양 총공세를 펼쳤다. 929년 9월에 고려의 앞마당이라 할 예상강에까지 진출하여 고려의 배 100여 척을 불태우고 저산도(지금의 황해남도 소재 저도)에서 고려의 말 300필을 약취하였으며, 10월에는 대우도(지금의 충남 서산시 소재)를 공략하기도 하였다. 이제 해양 주도권의 대세는 후백제 견훤에게 완전히 돌아가는 추세였고, 고려 왕건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후백제 해양의 꿈, 아쉽게도 해양으로 지다 왕건은 935년 4월 어느 날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나주 탈환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결국 나주 탈환의 중차대한 과업은 유금필에게 맡겨졌고, 유금필은 왕건의 기대에 부응하여 나주 탈환에 성공하고 개선하였다. 왕건은 친히 예성강에 나아가 자신의 전용선까지 내주며 출전하는 유금필을 배웅하였고, 개선해 돌아온 유금필을 예성강에 행차하여 맞이하였으니, 나주 탈환에 걸었던 왕건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백제가 나주를 고려에게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1개월 전에 일어난 심각한 적전분열의 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935년 3월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고, 장남 신검이 난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던 것이다. 결국 4월에 결행된 유금필의 나주 탈환은 이러한 후백제의 내분에 편승한 면이 컸다. 견훤은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달아나 고려에 투항하였고, 유금필은 다시 군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불과 2개월 전에 자신이 탈환한 나주로 나아가 견훤을 정중히 모셨으니, 이로써 후백제의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928년 후반 이후 해양 주도권을 잡아 확실한 우위를 확보해가던 후백제가 결국 내분으로 인해 해양의 최고 거점인 나주를 고려에게 내주더니, 그 나주를 통해 역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심히 아쉽고도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추구한 후백제의 해양국가 지향성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자마자 중국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해양강국의 위세를 떨쳐가고 있던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해양개방정책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왕건이 909년 오월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무안 앞바다에서 나포하였고, 918년 고려 건국 직후에는 그 역시도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고려가 차후 후백제와 치열한 해양쟁패전을 벌일 것을 예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후백제는 고려에 대한 해양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국제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925년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해양강국으로 발전해가고 있던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를 본격화하였으니, 이는 이미 후당과의 교섭을 통해 성장해 가고 있던 강주(지금의 진주)의 해양세력 왕봉규 등을 포섭하는 것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 일본의 해양세력과의 교섭에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조정이 929년에 검비위사(檢非違使) 진자경(秦滋景) 등을 후백제에 파견한 적이 있었다. ‘검비위사’란 ‘비위(잘못)를 따지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검비위사’ 파견은 당시 일본 해역에서 독자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던 해양세력의 동향에 예의주시하고 우려하고 있던 일본 조정이 그 해양세력과 모종의 교섭을 시도하고 있던 후백제에게 엄중 경고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후백제가 928년 이후에 고려와의 해양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한 것은, 이렇듯 당시 해양개방정책을 견지하고 국제적 해양교류의 다각화를 시도해갔던 해양국가 후백제의 지향성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 만큼 후백제 실패의 역사는 아쉬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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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5 17:39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②문경·상주의 견훤 유적과 문화유산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4월 중순, 아침 일찍 설레는 가슴을 안고 문경으로 향했다. 경북 문경은 1100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풍운아 견훤(진훤)왕이 태어난 곳.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다양한 유적과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견훤왕은 이곳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 15세 무렵까지 활동하다 신라군에 입대해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일행은 9시30분 문경버스터미널에서 이도학 교수(한국전통문화대)를 만나 동행키로 했다. 이 교수는 문경 출신으로 우리나라 백제사의 최고 권위자다. 문경에서의 일정은 아채(아차)마을- 말바우(말바위)- 궁터마을- 가은역·아자개 장터 코스. 그리고 오후에는 상주에서 견훤산성- 견훤사당- 사벌국왕릉·병풍산성-상주박물관- 경천대를 답사키로 했다. △ 아채마을 금하굴과 숭위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채마을. 견훤왕 출생지 전설이 서려 있는 이곳은 마치 뭇오리가 호수에 내려앉은 형상(群鴨投湖形)이나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金釵落地形)이라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너른 ‘속개들’ 옆으로 옥녀봉이 솟아 있고 연접한 산봉우리들이 출렁거리며 펼쳐진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마을 초입에 놓인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금하굴이 나타난다. 그 뒤편 언덕에는 숭위전(崇威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금하굴은 <삼국유사>에서 광주북촌(光州北村) 지렁이(蚯蚓)설화의 현장이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거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아 실을 따라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바위 사이로 보이는 금하굴은 꽤 깊어 보였다. 여기서 광주 북촌을 이 교수는 글자 형태가 비슷한 상주(尙州)의 오기(誤記)로 보고 있다. 금하굴 뒤편 언덕에는 2002년 세워진 견훤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 안에는 ‘후백제시왕(後百濟始王)’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문경향교 주관으로 향사가 봉행되며 초헌관은 문경시장이, 종헌관은 견훤왕의 후손인 견씨종친회장이 맡는다고 한다. △ 용마 낚아챘다는 말바우 일행은 인근 청동기시대 유물인 4형제 바위와 순천김씨 고택을 둘러보고 농암면 연천리 개천가에 있는 말바우로 향했다. 말바우는 소년시절 견훤왕이 용마를 낚아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얘기는 이렇다. “이곳 큰 바위에 용마가 나타나자 견훤왕은 허수아비 뒤에 숨어있다 용마를 낚아챘다. 이 용마를 타고 용마가 화살보다 빠른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말에 탄 견훤왕은 화살을 쏨과 동시에 말을 몰았다. 하지만 용마는 가은산에 도달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용마가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한 견훤왕은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그때야 날아온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견훤왕은 ‘아차’하고 슬퍼했다. 이때부터 용마가 나타난 바위를 용(말)바우, 목을 벤 가은산을 아차산,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 견훤왕이 궁궐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궁기1리 궁터마을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은역 부근의 아자개장터에서 골뱅이(다슬기) 국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가은역은 전국의 폐역사(廢驛舍) 중 유일하게 카페로 모습을 바꾼 곳이다. △ 문경·상주·원주에 산재하는 견훤산성 오후에는 상주로 이동해 견훤산성을 찾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봄비가 슬쩍 비치며 길을 막았다.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봄비는 축복이긴 하나 답사에는 훼방꾼이었다. 고심 끝에 올라가지 못하고 드론을 띄워 사진만 찍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견훤(산)성이라 불리는 곳이 서너 군데 있다. 견훤왕이 태어나거나 격전지였던 곳이다. 그중 문경의 견훤산성은 농암면과 가은읍 경계에 있는 356m의 성재산에 소재한다. 지금은 무너진 돌무더기가 산 정상 둘레에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견훤왕이 누이와 성쌓기 내기를 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이웃 상주 견훤산성은 경상북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있다. 상주 시내에서 속리산국립공원 문장대로 가는 길목인 화북면 장암리 산봉우리(해발 545m)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650m, 높이 7∼15m 협축식으로 치성 4개소에 바른층쌓기를 했다. 성 안에 건물지와 우물 1개소, 저수시설 2개소가 자리한다. 5세기말∼6세기초에 쌓은 견고한 성으로 인근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 견훤산성으로 가는 길은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꽤나 추웠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미 져버린 벚꽃 군락이 만개해 눈을 즐겁게 했다. 또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와 동관리에 위치한 성산산성도 견훤성으로 불리고 있다. 둘레가 3340m에 이르는 토석혼축성으로 견훤왕과 관련된 대궐터 지명이 전해진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포진리에도 견훤성터가 있다. 이곳은 견훤왕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출한 곳이다.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과 일전이 벌어져 크게 패했다. 견훤성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왕건 군대가 주둔했다는 건등산(建登山)이 있다. △ 상주 견훤사당과 병풍산성 다음으로 찾은 곳은 상주시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 있는 견훤사당. 산벚꽃과 목련, 진달래가 꽃대궐을 이루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왼편으로 꺾어들면 호젓이 서 있는 견훤사당과 마주할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견훤사당은 앞면 1칸, 옆면 2칸의 조촐한 건물로 앞에 판자로 짠 두 짝의 출입문이 있다. 실내는 마룻바닥이며 뒷면 중간에 설치된 선반에는 흐릿하게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장 상량문에 청나라 연호인 도광(道光) 23년이라 쓰여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수호신인 견훤왕께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난세의 영웅 사당 치고는 초라한데다 표지판 하나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당을 뒤로하고 일행은 사벌국왕릉에서 병풍산성을 바라보았다. 이 왕릉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들인 박언창의 묘소다. 이곳에서 병풍산성이 가까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발 365m의 병풍산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병풍산성은 둘레가 1864m로 수륙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정상에서 보면 낙동강 수계와 경작지, 산세가 한눈에 보여 적의 동태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견훤왕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했던 곳이다. 끝으로 일행은 상주박물관에 들러 이 지역의 역사와 유물유적을 훑어보고 경천대로 향했다. 경천대는 낙동강 상류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이다. 어두워지는 낙동강을 보며 견훤왕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조상진 논설고문 견훤왕의 가계(家系)와 성씨 견훤왕의 출생과 가계(家系), 성씨는 어떻게 될까. 먼저 <삼국사기>를 보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李)였는데 후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지으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다가 이후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포대기에 있을 때 부(父)가 들에서 농사를 짓자 모(母)가 남편에게 음식을 보내려고 아이를 수풀 밑에 두자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여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듣고는 기이해하였다.”(<삼국사기> 권50, 견훤전) 견훤왕은 867년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이다. 이와 관련해 광주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광주는 출생지가 아니라 그의 초기 근거지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농사짓는 농민이었다. 여기서 <삼국사기>는 견훤왕의 성씨가 본래 이씨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믿어도 좋다’는 주장과 당시 견훤가는 성이 없었고 아버지 아자개가 장군이 된 후 붙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아자개는 신라 헌강왕 11년(885)∼진성여왕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경북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호칭하는 호족으로 성장했다. 아자개는 부인 2명과 5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첫째인 상원부인에게서 난 큰아들이 견훤이며 아자개는 둘째부인 자식들을 총애했다. 견훤왕도 여러 명의 부인과 10명 이상의 자식을 두었다.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서 자식을 십여 명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했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그것을 알고 근심하였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그러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왕의 성씨에 대해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 이도학 교수는 ‘견훤’이 아닌 ‘진훤’으로 읽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견훤의 ‘견(甄)’에 대한 음가는 ‘견’과 ‘진’ 2가지가 있고 현재 교과서 등에서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증보문헌비고> <완산견씨세보> 등에도 모두 진훤으로 음가를 달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상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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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23.04.18 17:5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 - 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①견훤의 후백제 역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1100년 전 전주에서 일어난 후백제는 역동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왜곡·폄하되었다. 전북일보는 후백제특별법 통과를 계기로 후백제학회와 공동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역사읽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는 소설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은 보편적인 진실에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는 인간의 기록이기에 진실과 거짓, 주관성과 객관성이 공존한다.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은 사실(史實)과 허구(虛構)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다. <삼국사기>견훤전은 후백제 후대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역사소설같다. 역사는 실재의 기록이라면, 소설은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구분하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게 역사학자의 몫이다. 역사학자는 사료(史料)를 맹신하는 고정관념으로 역사해석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 진실에 입각하여 사료의 취사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견훤전을 객관적으로 올바른 역사읽기를 하려고 한다. △견훤의 시대정신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에 “이 때 신라 진성왕 재위 6년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 정권을 농락하고 탈취하였으며 국가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게다가 흉년기근이 덮치어 백성들은 유민(流民)으로 떠돌아다니고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 무리지어 벌떼처럼 일어났다(是 新羅 眞聖王 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고 밝혔다. 이 사료는 신라하대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견훤이 신라 서남해방수군의 비장으로 순천만에서 거병하게 된 배경을 밝혀놓았다. 첫째, 왕실 측근세력이 정권농락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둘째, 지배층의 부패타락으로 국가기강이 문란 해이해지고, 셋째,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기근(굶주림)이 심화되고, 넷째, 농토잃고 굶주린 백성들이 흩어져 돌아다니고, 다섯째, 굶주린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말세적인 생활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견훤이 농민봉기를 일으킨 군도들을 이끌고 무진주(광주)를 습격한 것이다. △삼한정통론을 세우고 전주에 도읍을 정하다. 견훤은 892년 무진고성에서 8년간 노력하였지만 건국의 꿈은 좌절되었다. 광주 전남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견훤에 동조를 하지 않았다. 광주 전남의 친신라 호족들은 나주 영암 영산강 등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은 지방호족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하고 고심 끝에 새로운 전략을 구상한다. 마한의 땅 광주 전남 대신에 백제의 땅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에는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 명분은 백제의 역사와 정신을 잇겠다는 것이다. 견훤은 두 가지의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는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는 것과 내가 어찌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지 않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어준다고 할 수 있겠는가(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는 두 가지였다. 전자는 견훤의 역사관이다. 견훤은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는 익산백제론을 주창하였다. 견훤은 왜 익산백제론을 구상하였을까. 전남 광주에서 건국 실패가 구상의 동기였을 것이다. 견훤은 나주 영암 마한계 호족세력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한 후 마한의 발상지(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가 익산 금마라는 역사인식을 갖게 된 듯하다. 금마는 고조선의 준왕이 남래하여 마한을 태동시킨 곳이다. 견훤은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견훤의 광주 구상은 삼한정통론의 정립이었다.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은 고조선→기자조선→한→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이다. 백제의 땅 익산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잇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기 위하여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국왕가운데 삼한정통론을 정립한 국왕은 견훤왕이 유일하다. 삼한정통론과 전주입도론(全州立都論)은 견훤의 투철한 민족자존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견훤왕의 광주선언에서 전주입도론을 밝힌 만큼 후백제천도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후백제 견훤왕 삼국통합을 꿈꾸다. 삼한정통론은 삼국통합의 꿈으로 이어졌다. 견훤왕은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황산벌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에 분개하였었다. 후백제의 건국이념은 민족자존을 지향하는데, 외세의존형 국가통합은 모순이라는 점이다. 견훤의 후백제 미래전략은 삼한정통론에 근거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진정한 통합이다. 견훤왕은 900년에서 918년까지 후백제의 영토를 굳건하게 지켰다. 내륙으로 대야성을 공격하고, 서남해 영산강유역 지키기에 힘을 쏟았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916년에 건국한 거란과 국경 갈등으로 후백제의 견제력이 약해졌다. 견훤왕은 920년경부터 국가운영에 자신감을 갖고 삼국통합을 구상한다. 삼국통합의 의지는 반왕건․친궁예적 성향이 강한 중원(청주 철원)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중원지역을 장악한 예천,문경 등 경북 서북부 지역을 공략하면서 합천,창원,김해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신라 수도 경주를 향하였다. 견훤왕은 925년 2차 조물성 전투에서 성주까지 진격하여 경주 공략에 한발 더 다가갔다. 마침내 927년 견훤왕은 신라 왕도 경주를 공격하고 경애왕을 단죄한다. 한발 늦게 신라 구원군으로 내려온 고려군은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전멸당하였다. 기세등등하던 후백제 군대은 930년 정월 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참패당하였지만, 곧 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고려 왕도 개성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932년 9월 고려 왕궁 송악궁을 향하여 예성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 염주, 백주, 정주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펼쳤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에 상륙하여 군선, 병선 1백여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도 빼앗아 돌아갔다(萱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후백제 수군이 3일간 머물렀다는 뜻은 왕궁을 포위하여 송악궁을 함락시켰다는 것과 다름없다. 왕건은 신하의 도움으로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권력욕이 강한 왕건의 체면은 구겨졌고 대단히 모욕적 사건이었다. △후백제 왕건의 음모로 견훤의 후백제 무너져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과 국경분쟁에 국력을 소모하면서 후백제의 견제를 방심한 것이 송악궁 함락의 요인이었다. 후백제군은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고, 왕건은 견훤왕에게 군사력으로 대결에 자신이 없어졌다. 932년 9월 송악궁이 함락당한 직후에, 왕건은 후백제멸망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5년(청태2년) 이전에 이찬 능환에게 지시하여 견훤의 아들인 양검, 용검과 후백제 멸망 음모를 꾸미도록 하였다. 음모의 시나리오는 935년(청태2) 3월에 완성되었다. 왕건은 파진찬 신덕과 영순을 견훤왕의 장남 신검에게 보내어 반역의 음모를 권하여 후백제 왕실을 교란시켰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왕건의 음모 사실을 은폐하였다. 오늘날 역사학자들마저 승자의 역사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후백제사학자 이도학 교수가 <삼국사기> 후삼국사(견훤전,궁예전) 기록은 “영화 대본같은 잘 짜여진 각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연극, 소설은 역사성을 띨 뿐이지 역사는 아니다.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 불편한 <삼국사기> 견훤전 읽기 김부식의 견훤과 후백제 왜곡은 <삼국사기>열전 견훤전 편재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조사를 편성하는 방식인데 후백제의 견훤왕을 인물 열전에 편재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러한 편재는 견훤왕을 국왕으로, 후백제를 왕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편협성을 드러냈다. 김부식이 견훤의 후백제를 열전에 편재하므로서 한국사 서술에서 후백제가 푸대접당하고, 견훤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삼국사기> 편찬 책임을 맡은 김부식은 과연 사관(史官)이 맞는가. 사관은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사실(史實) 그대로 기록하는 관리를 말한다. 사관의 책무는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여 문서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관은 실재의 사건을 편견없이 정확히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는 정확한 기록과 객관적인 기술이 생명이다. <삼국사기>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엉켜있다. 사실은 역사이지만, 허구는 소설이다. 진정한 역사는 소설이 될 수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말미에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進三國史表)’에서 스스로 신하(臣下) 임을 밝혔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사고에 보관할 내용이 못되지만 휴지로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가 관찬서(官撰書)가 아닌 사찬서(私撰書)라는 고백이다. <삼국사기>는 삼국 역사기록이지만 1145년에 편찬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당대의 역사기록이어야 마땅하나 삼국의 역사는 후대 기록이다. 견훤의 후백제는 900년에서 936년까지의 왕조사인데, 200여년 후의 <삼국사기>열전에 실려있다. 당대가 아닌 후대 기록이 어찌 정확할수 있겠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승자의 기록일지라도 편견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사료적 가치가 있다. 후삼국사를 후대에 기록하면서 왜곡하였다면 사서(史書)로서 가치가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견훤전에 견훤을 극악한자(其劇者)라고 혹평하였는데, 논왈(論曰)에서 “궁예 견훤같은 흉악한 자가 어찌 감히 우리 태조를 상대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다만 태조에게 백성을 몰아다 준 자에 불과할 뿐이다(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라고 붙였다. 이처럼 편견의 역사관을 가진 김부식이 쓴 견훤전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자문교수단(기고 및 동행 취재) 강봉룡(목포대 교수), 강원종(전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곽장근(군산대 교수·가야문화연구소장), 김재홍(국민대 교수), 노기환(문화재청 백제왕도추진단 학예연구관), 박해현(초당대 교수), 백승호(중국 절강대 교수),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 유철(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전상학(전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부장), 정상기(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조명일(군산대 초빙교수), 조범환(서강대 교수), 조법종(우석대 교수), 진정환(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최인선(순천대 교수), 최흥선(국립익산박물관장), 홍창우(전남대 강사) △ 기획취재팀 조상진(논설고문), 김영호(문화교육부), 김태경(사회부), 오세림·조현욱(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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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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