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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금요수필]용돈의 먹이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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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수필가

막내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벨이다. 웬 돈을 놓고 갔느냐는 것이다. 딸집에서 나올 때, 손자 성현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건드리지 못하고, 지갑에서 배춧잎 두 장을 옆에 놓고 온 걸 뒤늦게 발견한 모양이다.

네 자식을 키우면서 용돈을 줄 때가 흔치 않았다. 어쩔 때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면, 손을 내밀던 어머니 손이 떠오른다. 필요한 것은 사드리면 되는데 굳이 용돈이 필요할까 생각하며 외면했다. 어머니의 마음도 읽지 못한 우매하고 불효한 자식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는 내 손자에게 용돈을 주면서부터 알게 되었으니 IQ는 70도 못되지 싶다.

자식의 학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순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40여리 길을 마다 않고 쌀 서 말을 머리에 이고 솜리까지 걸어와 지금의 인화동에 위치한 구시장 부근의 주택을 전전 했던 어머니. 동네 쌀가게에 내면 편하련만, 기어이 자식이 중학교에 다니는 솜리까지 이고 와서 먹을 집에 낸 어머니다. 친척집에 주는 넉넉하지 못한 하숙비가 맘에 걸렸을까? 통 크게 멸치 한 포와 오징어 한 축을 들여 놓고, 내 주머니에는 슬쩍 지폐 한 장을 우겨넣어 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먼 길을 걸어 오셨음을 알기에 가실 때는 버스를 타고 가시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당할 수가 없었다. 꺾을 수 없던 고집은, 어머니의 진국이 묻어나는 사랑이었다.

불혹의 중반에 늦게 얻은 자식 하나가 바람 앞에 등불이었을 어머니. 가난한 살림살이가, 늙어가는 나이가 걸림돌이었을 게다. 그런 환경에서도 하숙에 수학여행까지 보내주셨던 과분한 사랑. 지천명이 넘은 당신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이웃집 일을 거들어주고 받은 품삯을 궤짝 농 깊숙이 차곡차곡 숨을 죽였다. 애지중지 숨죽였던 천만금은 자식에게만은 머뭇거리지 않고 선뜻 내주셨던, 손끝이 쩍쩍 갈라진 손이 흐릿해지는 눈에서 또 아른거린다. 간혹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며 오늘도 죄스럽다.  

농사일이 많은 여름이면 구멍이 숭숭 뚫린 삼베 적삼이 땀에 흠뻑 젖어 허기진 얼굴로 집에 들어오시는 어머니. 새까만 꽁보리밥 속에 숨겨진 하얀 쌀밥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물에 만 꽁보리밥을 숟가락으로 뜨시면서 고개를 들어 보이며 재촉하시는 어머니에겐 아버지도 보이지 않으셨다. 끼니마다 께지럭거리기 일쑤였던 철부지 아들. 애타던 어머니는 쌀 몇 됫박 싸들고 동산촌 친척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집 밥상에만 앉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맛있는 반찬도 아니었고, 하얀 쌀밥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때의 추억을 더듬으려 가끔 큰형 집에 들려 놀다온다. 아직도 형들의 사랑은 내 차지니까.

다행히도 네 자식을 두었고, 박봉이지만 공무원 신분이었기에 꽁보리밥은 아니었다. 다만 자식교육만은 소홀하지 않으려고 짠돌이 별명을 들으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오로지 내 직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지천명이 넘을 때까지 캠퍼스 생활을 견뎌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간직하고 지켜가기 위해 자신을 다그쳐야 했다. 

지난 두 주말에 걸쳐 자식들이 다녀갔다. 고희를 넘긴 제 어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말이다. 지들이 준비해온 음식과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봉투까지. 날마다 이런 날이었으면 하며 속없는 욕심을 부려보며, 손자들 하나하나에게 용돈을 챙긴다. 용돈을 넣다보니 내 지갑이 훌쭉해진다. 어머니께서 원하셨던 용돈은 그런 깊은 뜻이었던 것을….  

이종희 수필가는 김제 난산초등학교장으로 퇴임했다. 전북문협 기획정책위원장과 영호남수필전북지회, 전주문협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하얀 90분'외 3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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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 #이종희 #먹이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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