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은 물고기는 조개가 잠시 입을 벌리는 때를 기다리다가 순식간에 조개의 입 속에 산란을 한다. 며칠 후 알이 부화하면 조개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새끼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나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일생을 살아간다.
식물의 세계에서도 그와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큰나무에 더부살이 식물들이 줄기를 뻗쳐 높이 타고 올라와도 그냥 공생하면 그뿐이다.
우리는 간혹 쉬운 단어를 오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틀리다(誤)’‘다르다(異)’가 대표적 이라고 할 만하다. 우선 상대되는 몇가지 어휘부터 살피면 이러하다. ‘틀리다(誤)’는 ‘맞다(正)’와 상대되는 말이다. ‘다르다(異)’는 ‘같다(同)’와 상대되는 어휘이다. ‘옳다(是)’는 ‘그르다(非)’와 상대되는 단어이다.
“그 점에 있어서 내 동생은 나와 생각이 틀리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동하여 잘못 사용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사회언어학적 측면에서 볼 때, 사회인의 의식 속에 배타적인 흑백 논리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남자와 여자는 성별의 차이요, 전라도와 경상도는 오직 지역의 차이에 불과하다. 의약 분업에 대한 의사측과 약사측의 상이(相異)한 주장은 이해득실과 관련한 입장의 차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이면 옳다고 순응하고 다른 생각일 때는 서로 반목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심상(心相)에는 배타적인 흑백 논리가 침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배타적 흑백 논리는 오랜 역사의 산물일지는 모른다. 조선시대의 사색당쟁,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과 반일의 갈등, 해방 이후에 좌우익의 정치적 대립, 남북 분단과 6·25동족 전쟁, 3공화국 이후의 독재와 민주의 대결, 5공화국 이후의 정권 창출을 위한 지역 대결구도,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배타적 흑백 논리에 익숙하게 만든 역사적 기반이었다고 할 것이다.
나와 생각, 견해, 느낌,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틀린 것도 더더욱 아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틀리다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 생각, 견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의 발언이요,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의 그것을 인정하려는 성향의 언명이다.
새로운 한 세기를 시작하는 오늘날 직업적·지역적·사상적·종교적·민족적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와 ‘다르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다.
스승 사(師)자가 들어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않다. 스승은 자기 희생으로 다른 이를 구제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이다. 어진 마음이 없는 스승은 이미 스승일 수 없다. 요컨대 병들고 죽어 가는 국민을 치유하는 의사와 약사는 스승으로서 ‘돈 잘 버는 분이 아닌 존경받는 분’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젊었을 때, 무엇을 위해서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에 입학했는가를 다시 생각하고 초심으로 돌아갈 일이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숭고하고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세속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불인(不仁)한 의사는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불인한 목사는 인간의 영혼을 죽인다. 모름지기 백성의 건강과 생명을 맡고 있는 의사와 약사는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국민도 살리고 자신들도 살릴 수 있는 상생(相生)의 장에 들어서야 한다. 지금의 살생은 앞으로의 상생을 위한 시련쯤으로 보고 싶다. 지금 이 시대는 배타적인 흑백 논리를 벗어나서 서로를 인정하는 상생의 논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 유종국(정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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