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는 쉼표가 있어도 쉬지 못하고 숨차게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곰삭은 시어들이 온 몸을 헤집고 다녀 쑤시고 저린다. 긴 호흡이 쉬어지는 것은 나도 모르게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다. 그런 시들이 가득 담긴 시집이 나왔다.
1995년 '민족예술'을 통해 문단에 나온 박규리 시인(45)의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펴냄).
"이곳에서 비우는 방법을 알았어요.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 한 편씩 쓰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 스님을 통해서 시를 쓰지 않는 법과 책을 안 보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내 안에 물을 가둔 지 사년째/책 한줄 안 보고 잘 놀았다'('내 안의 물꼬'부분)는 시처럼 시인은 지난 8년동안 고창 석정온천에서 바라보이는 산 위의 작은 절 '미소사'에서 공양주로 지내왔다. 고향은 서울. "잠시 쉬러 왔다가 절에 일 할 사람 없어서 조금씩 돕다 보니” 세월이 갔다. 시집에 담긴 50여편의 시도 대부분 그곳의 일상이 그려졌다. 그러나 별반 다른 것은 없다. 그는 인간의 숨소리가 배어있는 노랫가락을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저, 아찔한 잇꽃 좀 보소' '사과꽃 한송이 떨어졌던가' '그런 일이 어딨노 경(經)' '푸르디푸른 새벽 아욱 한줌 꺾어 들고'등 제목부터 맛나고 찰지다.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 집을 진동하여/차마 잠 못 들고 뒤척이다가/어젯밤 산행 온 젊은 여자 둘/(중략)/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이 환.장.할. 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피차 마음 다 흘린 걸'('천리향 사태'부분)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를 가리켜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 그 양면을 함께 지녔다”고 말한다.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다 보고 있다는 건 시인에겐 '최고의 찬사'다.
"무리해서 시를 쓰고 싶진 않아요. 비우고 비워도 결국 비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때 또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절에서 키우는 개, 반달이가 눈보라 혹한에서 '제가 기른 고양이 네 마리 다 들여놓고/저는 겨우 머리만 처박고 떨며 잔다'며 안쓰러워하다가 '오체투지 한껏 웅크린 꼬리 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소복하다'('성자의 집'부분)며 한 마리 개의 마음에 깃든 불성이 또다른 절집 한 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시를 쓰고 싶은 이미지가 눈가에 맴돌아도 꾹 참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이미지가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때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사물에서 아름다운 불성을 찾아낼 줄 아는 눈을 가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젊고 풋풋하다. 시인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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