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란 이름은 하와이 언어로 산 위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단다.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 같다. 그리고 내 아는 선장의 아들 이름은 순풍,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그러나 삶이 소망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때로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동네 빵집은 베이커리로, 헬스클럽은 벽을 터 통유리로 안을 보여준 다음 휘트니스로 간판을 바꾼다.
얼마 전 내 사는 동네의 영화관도 이름이 극장에서 시네마로 바뀌었다. 의자는 푹해졌지만 내 보기엔 화면이나 사운드는 옛날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주나 광주에 손님을 뺏기는 입장에서 재화의 질적 향상이나 고객의 욕구 측면보다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라도 팔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학교 교실 만한 복합관 2층에서 전주 다운타운에서 놓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같은 아까운 영화를 '단 둘'이 본 적도 있다. 내겐 행운이었지만 극장 아니 이 시네마에서는 영업전략을 잘못 세운 탓이리라. 나는 카드할인도 안 되는 이 시네마에서 사장님과 흥행을 걱정하면서 스틸 컷 사진을 얻어오기도 하고 포스터 풀비 아저씨의 게시판 전쟁 무용담을 듣기도 한다.
세상은 변한다. 까까머리 시절, 이소룡 영화들을 섭렵하던 이리극장은 나이트클럽이 된 지 오래고 삼남극장( 폭발사고 때 무명의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나온)도 결국은 땡처리 백화점이 되었다. 그래도 아가씨들과 손잡고 영화를 보던 전주의 극장들은 살아남아 CGV, 프리머스로 진화하면서 화면도 사운드도 제법 좋아졌다. 그러나 영화의 거리엔 아직 이름도 못 바꾼 몇 몇 극장들은 파리를 날리는데 새로 지은 백화점에 많은 스크린이 생겨났다. 가히 멀티플렉스의 전성시기다. 전매청이나 보건소 주차장을 이용했다가 뒤꼭지가 간질거렸던 기억에 주차비는 아끼겠다 싶어 이 것 저 것 신상정보 쓰고서 멤버십 카드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달팽이 속 같은 지하 몇 층에 차를 맡긴 후 한 층 한 층 에스컬레이터를 오른 후 결국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영화관 티켓을 끊었다. 몇 장의 카드를 동원해 영화비 몇 푼을 감하고 주차비를 아꼈지만 결국 그 백 배 정도의 카드를 긁었을 것이다. 괴물에 홀린 것이다. 영화는 패러디의 백화점인 것처럼 소란스러워 오직 고양이의 선한 눈 빼고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장면이 주는 미국 사람들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어서였을 것이고 새것이 주는 낯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빨갛고 노란 접시의 지하층의 회전초밥 코너부터 맨 위층의 영화관까지 익숙해 지다보면 이 괴물이 강요하는 소비양식도 결국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게 되고 말 것이다.
이젠 영화배우로 살아가는 시인 백학기의 "삼류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보며”는 멀티플렉스에서는 쓸 수 없는 시일 것이다. 나희덕은 "여린 것들을 보면 젖멍울이 핑 돈다”고 쓰고, 윤동주는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썼다. 옛날의 '극장'들이 사라져서 떠올린 싯구들이다. 은퇴한 후 퇴직금 털고 계돈 모으면 자그마한 극장을 운영하려고 귀여운 이름도 지어놓았는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내 발로 크고 번듯한 것을 찾고서 말이다.
/신귀백(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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