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안에 참 자유
예수님 믿는 것에 비판적인 세번 째 유형의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구속되는 일이 많아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의 초청을 하신다. 재앙 받을까 두려워 손없는 날을 택하여 그믐에만 이사 간다든가 불안, 공포, 고독의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고 방종에 몸을 맡기는 인간에게 참 자유를 선물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찬송을 부른다. “주님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네번 째 유형은 ‘시간적 손실을 많이 본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바쁜 세상에 어떻게 한가하게 교회 가서 앉아 있느냐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다 하겠다. 물을 떠다가 독약을 만들 수도 있고 갈증 난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수로 대접할 수도 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성현의 말을 빌려 본대도 예수님의 진리를 듣고 인생을 값지게 산다면 이보다 더 나은 시간 활용은 없을 것이다. 예배는 반성과 회개와 결단과 생의 방향 설정, 그리고 용기와 기쁨을 얻게 되는 재생산의 순간이자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다섯째, 제사 드리지 않는 ‘불효 종교’라는 것이다. 기독교 효도는 살아계신 부모에 대한 효도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법이다. 가가례(家家禮) 라고 집안에 따른 다른 예법을 동양성현도 말씀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기일에 드리는 추도식도 그 추모의 예법이라고 봐야 한다. 제사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고 하지만 중국 수입품이다. 4300여년 우리나라 역사에 제사 역사는 500년이다. 1000 년 전에 유교가 들어왔지만 나라에서 일반 시민에게 제사를 권장치는 않았다.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쓴 조선이 당시 들어온 성리학 혹은 주자학이라는 제사를 숭상하는 유교를 권장하면서 제사를 대중화 시킨 것이다. 교육적으로 덕을 기르도록 하고, 정략적 의도도 있었다. 지금 종교 중에서 가장 효도를 권장하는 종교는 기독교다. 왜냐하면 일반종교의 효도는 도덕에 속한 것이지만 기독교 효도는 계명, 즉 법으로 규정 되었다. 법은 강한 구속력을 가진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는 강력하게 효도를 강단에서 부르짖는다.
여섯째, 예수 믿으면 친구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반면 교회안의 많은 신실한 새 친구를 얻게 되는 보태기 계산도 해야 한다. 예수님 같은 분이 친구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교회 목사와 기도와 사랑으로 밀착된 신실한 신앙인이 새로운 많은 친구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다.
일곱 번째, 예수 믿어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행실도 낙제점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 교우들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진다. 채찍으로 받아들이는 점이다. 교회는 어떻게 보면 병원과 같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오라고 하셨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아무나 다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 냄새나는 뭇 인간 군중들의 모임이다. 일찍 변화 받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중환자는 회복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쉽게 변화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불량 학생 몇이 있다고 학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치라고 본다. 그러고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할 것이다. 모두 이 행복에 참례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