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재(우석고 교사)
조그만 호숫가 산자락에 사는 친구가 있는데 금년 봄 그는 딱새와 함께 살았다. 현관의 장작더미 위에 버려둔 헌 밀짚모자 속에 딱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길렀던 것이다. 친구는 기뻐하면서도 앞으로 이놈들과 평생을 어떻게 조심스레 사냐고 걱정부터 했다.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새끼들이 성장하면 딱새는 두 번 다시 이 둥지를 찾지 않을 테니까. 딱새의 머리로는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새끼를 낳아 길렀을 뿐 새끼들이 날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산 속의 나무로 돌아갈 것이다.
많은 새들이 산에 살지만 새집은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새의 둥지는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은폐되지 않으면 그 가치가 없는 고로 새들의 둥지를 찾는 건 쉽지 않다. 인간의 처마 밑이 오히려 안전함을 깨달은 제비도 해마다 집은 새로 짓고 산다.
동물의 집은 이처럼 종족보존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 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집은 물론 단순한 공간으로서의 집(house)이라는 의미보다는 가정(home)이라는 정신적, 문화적 의미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의 집도 종족보존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집(house)은 후손들을 안전하게 기르는 곳이라는 이 기본적인 조건이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웬만한 아파트는 보통사람이 평생을 모아도 사기 힘든 가격이 되었다. 서울 강남에는 10억짜리 13평 아파트가 있고, 비밀번호로 무장한 자신들만의 전용 출구가 있는 수십억대의 집이 있다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집의 크기가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13평짜리 아파트가 어떻게 10억원의 가치를 갖는가. 가족의 생활공간인 집에 수십억 원을 투자를 하는 것과 가정의 행복은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가.
딱새 둥지의 안전은 포식자로부터의 은폐가 조건일 것이고 우리들 자녀의 안전은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 있을 것이다. 둥지에 불과한 집값을 수십억씩 올린 그 기발한 생각들을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방향으로 돌리지 못한 어리석음에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혹 수십억짜리 집을 물려주는 것이 자녀의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딱새와 인간의 생존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차이를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종 광고마다 환상적인 아파트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광고판 뒷면에는 둥지를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허공을 방황하는 새들이 날아간다. 주택정책을 개혁한다는 정치인들의 아름답고도 답답한 모습과 그들을 욕하는 딱새만도 못한 인간들의 얼굴도 숨겨져 있다.
딱새를 보며, 집은 허름하지만 묵묵히 자식들을 사랑으로 기르고 있는 이웃들에게 박수를 치고 싶다.
△약력 : 1953년 생. 문학박사. 199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과 <시문학> 우수작품상으로 등단. 현 우석고등학교 교사. 시집 <뻐꾸기를 사랑한 나무>뻐꾸기를> 시문학>
/이세재(우석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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