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前 전북여성농민연합 회장)
너른 밭 한가운데가 장마철 잦은 비에 물웅덩이가 되어버렸다. 심어놓은 그 자리의 참깨는 진작 죽어버리고 몇 가닥 잡초가 대신 엉겨 붙어있다. 아무리 넓은 밭이라도 적절히 고랑을 만들어 물 고일 법한 곳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것이 농사의 기본일 것이나 새로 개간한 터라, 갈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탓에 밭 한가운데가 그 지경이 된 것이다.
물 고인 땅, 그곳에선 고인 물이 썩는 것은 물론이요 질병의 근원지가 되어 온 밭을 병들게도 만든다. 또한 반 평도 못되는 곳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피를 빨며 못된 병균을 옮겨놓을 수천의 모기떼가 태어날 것이다. 살충제를 뿌린다 해도 계속 태어나는 모기떼는 막을 수 없고 급기야 가축과 사람이 그들의 포식성 앞에 팔다리를 내주어야 한다. 때문에 물꼬를 내지 못한다면 흙이라도 돋우어 물기를 없애야 한다. 농부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고 그것은 사람의 먹을거리가 자라는 밭에 대한 농부의 당연한 도리이며 예의이다.
태풍이 몰려온 아침, 세찬 빗줄기 속에 누런 황톳물을 게워내며 가라앉고 있는 그 웅덩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빗물 아닌 또 다른 물기가 고여 있을 세상의 웅덩이들을 떠올려본다. 가난, 질병, 차별, 소외, 폭력 등 고통 받는 이들이 놓여있을 우리주변의 수많은 웅덩이, 그리고 그곳에 고여 있을 눈물이라는 물기에 대하여.....그러한 물기 역시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그곳에 엉겨있는 아픔이나 슬픔은 분노라는 습기가 되어 어쩌면 물 고인 웅덩이의 모기떼처럼 우리사회 전체에 엄습할 지도 모른다.
우리사회 어느 곳에 물꼬를 내고 흙을 돋워야할지 그것은 나라의 복지정책의 내용과 폭에 해당되는 문제이겠으나 단지 정책을 다루는 정치권이나 일선의 사회복지사들만이 전담할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는 이 나라에서 이웃의 불행과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알고도 외면한다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와 도리를 모르는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오래도록 가슴에 메아리쳐온 전우익선생의 말씀을 되뇌어본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어느 쪽으로 물꼬를 내야 물이 빠져나갈지는 그 웅덩이에 직접 가보아야 알 수 있다. 비바람이 잦아지길 기다릴 수만은 없어 삽을 챙겨들고 나서는데 여기저기 논두렁마다 물꼬를 손보는 삽질이 광풍에 휘청거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각계각층의 심각한 우려와 반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협상이 그대로 타결될 경우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빈곤의 웅덩이들이 우리사회 곳곳에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 웅덩이의 가장 밑바닥으로 침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반복되는 악천후와 농산물개방의 어려움 속에서 부지런한 삽질 하나로 버티며 생명의 땅을 지켜온 농민들, 그 부지런한 삽질이 분노의 삽질로 변하기 전에 움푹 패인 이땅 농민들의 빚더미 삶터에도 누군가 시급히 물꼬를 내주어야한다. 아무리 논밭 물꼬내기에 이골난 농민들이라도 깊은 웅덩이 속에서 스스로 물꼬를 낼 방법은 없는 것이다.
<약력>약력>
1959년생, 이화여대 졸, 한일장신대 사회복지학과 재학 중, 1983년부터 순창에서 농사,1988년부터 여성농민회 활동, 2004-5 전북여성농민회연합 회장 역임, 96년 이후 여성, 농민 관련 작곡활동(음반, 흘러라 섬진강)
/박찬숙(前 전북여성농민연합 회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