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 접고 지금은 한지에 먹으로 작업…山 다니며 터득한 교훈 내년 개인전 계획
"나는 뭐하는지도 몰라요, 지금."
늘 수줍은 듯 웃는 화가는 또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작은 노트에서 발견한 메모에서는 작가로서의 강단이 느껴진다.
'나의 작업 정리'. 사실적이되 환상적일 것, 단순하되 매혹적일 것, 지역적이나 보편적일 것. 현실적이되 탈세속적이며, 인간적이되 범우주적일 것. 부드러운 듯 강하고, 조용한 듯 당당할 것. 마지막에는 '비난 받을 각오가 돼있을 것'이라고 적혀있다.
화가 조병철(46).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는 2004년 부터 한지에 먹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캔버스에 유화, 그 다음은 닥종이에 유화, 지금은 한지에 먹으로 그려요. 나이가 들면서 어떤 순간을 옮기는 서양화의 방식이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업요? 당연히 예전이 더 좋죠."
그는 "뒤로는 한국화는 기량이 딸린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하지만 작가로서 극복해야 한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한국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다는 화가. 그는 서양화가, 한국화가가 아닌, 화가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김제 죽산 마포마을. 2006년 10월 그는 부모님이 살고있는 고향집 창고를 작업실로 고쳤다. 그동안 작업한 캔버스들도 키 순서대로, 붓이나 물감도 다 저마다의 순서를 가지고 있다. 흐트러짐이 없는 공간. 느낌이란 추상적이고 소모적인 것. 그는 "좋은 작업을 하려면 꼼꼼해야 한다"면서도 "사실 큰 작업을 하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작업실 벽에는 1000호 크기 갱지가 걸려있다. 촌스러운 무대, 알이 까만 선글라스가 어쩐지 낯익은 스케치. 고창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풍경이라고 했다.
"'전국노래자랑'을 그려보겠다니까, 제가 안그리면 자기가 하겠다는 사람이 몇 있더라고요. 시작부터 끝까지 '전국노래자랑'만 수십, 수백장을 찍었어요. 한 순간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부분부분을 모아서 한 화면 안에 진행 과정 전부를 담아내는 거죠."
전주 남부시장 '현대옥' 콩나물국밥집도 그리고 싶어 6mm 카메라로 찍어놓았다. 아직 주인아주머니가 흔쾌하게 허락을 하지 않아 시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내년 봄에는 전주에서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1994년 지금은 문닫은 정갤러리 전시 이후 전주에서는 통 개인전을 하지 않았다. 2004년부터 그려온 산이 주제. 모악산만 40∼50번, 지리산만 30번은 족히 다녀왔을 것이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빨치산의 아픔을 읽어내듯, 그 안에 얽혀있는 역사와 삶을 그리고 싶다.
"일본 화가 중 호쿠사이라는 작가가 있어요. 그 사람은 자기 입으로 평생 많은 작업을 했지만 일흔살 이전에 그린 그림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늦지 않았구나 싶었지요."
"이런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 서울이 맞겠냐"며 90년대 초반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빠르면 내년 가을, 늦으면 내후년에는 일본이나 중국으로 옮겨 공부할 생각이다.
"이제 내 나이도 중반을 넘어섰죠. 모험을 하지 않으면 그렇고 그런 작가가 되겠구나, 스스로 나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산에 다니면서 어떤 조건에서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나도 지역에서 편히 살 게 아니라 한번 부딪쳐봐야겠다 마음 먹었죠."
성공해야겠다는 욕심도 없고, 돈 많이 벌겠다는 욕심도 없다는 조씨. 일흔 이전에 '좋은 그림'만 그려내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가 말하는 '좋은 그림'이란 지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그림. 재주로 그린다면야 얼마든지 잘 팔리는 그림도 그릴 수 있지만, 그는 삶이 그림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흐 그림이 특별한 것은 우리가 그의 삶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도 삶을 잘 살 때 좋은 그림이 나오고 또 가치가 있는 거죠."
삶을 완성하면 그림은 저절로 된다. 그는 산이 가르쳐준 교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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