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편집부장)
정세균과 '바지 역할'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명의만 빌려주고 실제는 운영자가 아닌 실권이 없는 명함상 사장을 '바지 사장'이라고 한다.
오페라에도 '바지'와 관련된 용어가 있다. '트라우저 롤'(Trouser roll). 우리말로 풀면 '바지 역할'이다. 트라우저 롤은 오페라 남자 가수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고음의 영역을 여자가 대신 불러주는 대목을 말한다.
최근 실용과 대안을 기치로 내건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 대한 당내 개혁·진보, 친노 세력의 반발이 거세다. 이들은 정 대표가 지난달 25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야성'(野性)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엊그제 모임을 꾸린 '민주연대'는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은 국민들로부터 대안을 제시하는 유능한 수권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정 대표 노선에 대한 직격탄이다.
여기에다 친노 진영은 '당 지도부가 호남에 치중함으로써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며 정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친노 진영의 공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호남의 단결로는 영원히 집권당이나 다수당이 될 수 없다”고 글을 올리면서 촉발된 측면이 크다.
또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지지율이 10%대에 머무르고 있는 현상을 정 대표 탓으로 돌리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이들의 주장과 지적이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주당내 개혁파들이 내건 '야성회복을 통한 투쟁'으로 대선과 총선에서 등을 돌렸던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예전만 해도 MB정부의 '고소영 내각', '미 쇠고기', '종부세 완화' 정도면 민심이 급격히 정부·여당을 이탈해 야당으로 쏠리는 게 우리 정치문화였다. 물론 이 과정을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것은 야당의 격렬한 투쟁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지지율을 보노라면 그같은 '공식'은 이미 깨진 듯 하다. 이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가 많이 변한 탓도 있지만 이제 상대당의 실수로 이득을 보는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민들이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에게 요구하는 것은 '극한 투쟁'이라는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수준 높은 정책 대안 제시로 보는 게 정확하다.
정 대표의 고민도 거기서 출발한다. 그는 "소금이 제 역할을 하려면 썩지 않아서만 되는 게 아니라 잘 영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민주당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야당을 하려면 '내공'이 깃든 '정책 대안'을 내놔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런 이유로 당내 여러 세력들이 출범 석달을 맞는 정 대표를 '야성과 투쟁'만을 요구하며 흔드는 듯한 모습은 당은 물론 국민들 보기에도 딱하다.
영수회담도 그렇다. 정 대표는 할 말을 다했고 공을 이미 정부·여당으로 넘긴 상태다. 그러므로 민주당은 영수회담 약속이 잘 지켜지는 지 감시하고 촉구하는 게 최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해야지 정 대표를 몰아부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다.
당 지지율 문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지지층을 이탈시켜 대선과 총선에서 죽을 쑤게 한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게 공당의 도리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더 많은 반성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개혁파든 친노파든 당장 정 대표를 공격해 '바지 사장'으로 몰아갈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스스로 오페라의 완성도를 높이는 '바지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정도 아닌가.
/김성중(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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