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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 "유학생활에서 자신감 얻었다"

'송북'과 모텟 음반 이어 내년 6집 출시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가수 겸 작곡가 윤상(40)을 "존경하는 선배"라고 부른다.

 

1987년 김현식 음반으로 작곡가 데뷔를 한 그는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등 1990년대 히트곡부터 동방신기, 보아의 노래까지 세대를 아우른 작곡가다. 1991년에는 가수로도 데뷔해 '이별의 그늘', '가려진 시간 사이로', '한걸음 더' 등을 히트시켰다.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탤런트 심혜진과 2002년 결혼한 그는 5집을 내고 2003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보스턴 버클리음대에 뮤직 신서시스를 전공했고 이어 미국 뉴욕대학교(NYU)대학원 뮤직 테크놀로지 2학기를 마친 상태.

 

현재 그는 아내, 5살 아들 찬영이와 미국 뉴저지에 산다. 이번 귀국은 이달 국내에서 두장의 음반을 내고 내년 1월10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열릴 단독 공연, KBS 다큐멘터리 '누들 로드' 음악 작업을 위해서다.

 

지난해 잠시 귀국한 뒤 1년여 만에 다시 만난 윤상은 더 여위어 있었다.

 

"살이 빠졌다고 하면 관리를 잘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면서도 "어제 안트리오 공연에 게스트로 나갔는데, '윤상은 꽃 중년일 줄 알았는데 그도 아저씨'라는 인터넷 댓글이 있더라"며 넉넉한 표정으로 웃었다.

 

◇상업성, 모텟과 6집

 

동료들이 그의 노래를 재편곡해 부른 스페셜 음반 '송 북(Song Book)'이 5일 나왔고, 그가 주축인 3인조 일렉트로니카 프로젝트 그룹 '모텟(mo:tet)'의 첫 음반이 20일 나온다.

 

20년 넘게 그와 작업한 박창학 씨가 프로듀서를 맡은 '송 북'은 지난해 잠시 귀국했을 때 유희열의 제의로 시작됐다.

 

"6년째 음반을 안 냈는데 어린 세대들이 제 노래를 알 수 없죠. 유희열, 윤건, 마이앤트메리, 소녀시대 등 모두 현재 감성의 뮤지션들이니 지금 젊은층에게 신곡처럼 들려주는 것도 곡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제게는 엄청난 감동이죠."

 

아들 찬영이의 옹알이가 담긴 버클리음대 졸업작품 '플레이 위드 미(Play with me)'의 원곡 소스를 뽑아 다시 만든 곡이 첫 트랙이다.

 

유학의 결실을 마음껏 펼칠 곳은 모텟. 모텟은 대중성, 상업성과는 무관한 음악을 선보인다.

 

"독일에 사는 슈퍼드라이브, 영국에 있던 카입과 서로 떨어져 작업하니 막판 의견 일치가 어려워 예정보다 늦어졌죠.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저변이 두터운 유럽 레이블을 뚫으려다 한국에서 먼저 1천장이라도 찍어보기로 했어요."

 

1990년대 '윤상 표' 발라드가 그리운 이들에게는 내년 5월 발매될 정규 6집이 있다. 유학생활을 담은 포토에세이도 그즈음 출간한다.

 

"더 깊고 다른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전작의 서정적인 부분을 편안하게 담아낼 마음가짐이 됐어요. 사람들에게 쉽게 멜로디가 공감되고 반주도 힘을 뺄겁니다. 대중적인 코드를 억지로 지우지 말자 생각했죠. 음악성 운운해도 저는 '보랏빛 향기'의 작곡가이고 대중음악 작곡가가 대중적인 곡을 못 만들면 끝이니까요."

 

◇배움, 자신감의 토대

 

한창 활동하던 때 유학을 택한 건 음대 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 탓이었다. 많은 후배들이 존경한다는데,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그는 음악 이론이 갖춰지지 않은데 부담을 느꼈다.

 

"모텟의 카입 같은 훌륭한 후배들이 절 무시할까봐요. 하하. 국내 음악계의 슬픈 현실이지만 돈과 무관하게 초인적인 힘으로 음악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 친구들이 대중음악 시장을 바라볼 때 '똥 덩어리'라 생각할 수 있어요. 저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배움을 통해 "음악 세계가 변했다기보다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제가 전공한 뮤직 신서시스, 뮤직 테크놀로지 모두 사운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공부예요. 현실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음악에 이용하는가죠. 배움이 길어질수록 '한국에서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이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야 한다는 책임감도 드네요."

 

◇돈, 그리고 음악

 

"어떻게 음악에 눈을 떴냐"고 묻자 그는 "유복한 가정 출신이 아니어서 음악을 시작한 건 돈 때문이었다"는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가 재미없었고 밴드를 하고 싶었다. 고교시절 밴드를 구성했고, 대학에서는 학비를 벌기 위해 고교시절 쓴 곡들을 팔았다. 수입이 생겼고 당시의 가요를 들으며 할 만하다는 가능성과 믿음이 생기니 음악에 시간을 할애해도 죄의식이 안 생겼다.

 

1991년 음반제작자 김광수 씨는 윤상이 만들고 직접 가이드 녹음을 한 곡을 듣고 음반을 내자고 제의했다.

 

"애국가도 제대로 안 불러봤고, 그룹 사운드 때는 보컬이 따로 있었죠. 무대 울렁증도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제가 정말 사고 싶은 신시사이저가 800만원이었어요. 음반 한장 계약에 3천만원을 제시하길래 결심했고 그 돈으로 몽땅 악기와 미디(MIDI:Music Instrument Digital Interface)장비를 구입해 홈스튜디오를 만들었죠."

 

이때 구입한 미디 장비와 악기로 1집을 만들었고 그는 국내 미디음악 1세대로 통한다.

 

"대충 1집이 90만장, 2집이 100만장을 넘겼어요. 이때도 사운드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고, 여느 인기있는 '오빠'들처럼 미성으로 노래하는 게 안 맞았어요. 제 고집대로 2집 'Part Ⅱ'에서는 수록곡의 반만 노래했는데 30만장이 팔려 망했죠. 3집 이후 음반으로 돈을 벌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음악 활동을 한 20년을 돌아보니 결국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음악을 하고 싶어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 같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유학 생활 동안 묵묵히 내조해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속으로 '남편이 저렇게만 살지 않겠지'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 하하. 공부에 지쳐가니 석사까지만 계획이 있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에 돌아와 열심히 활동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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