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전주영화제 10년, 전주 영화의 꽃 다시 피다
<광복절 특사> (2002), <실미도> (2003), <태극기 휘날리며> (2003), <웰컴 투 동막골> (2004), <왕의 남자> (2005), <타짜> (2006),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2007), <화려한 휴가> (2007) 등 300만 이상 관객들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이 영화들은 모두 전주에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우리> 타짜> 왕의> 웰컴> 태극기> 실미도> 광복절>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1950년대. 한국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그 시절에도 전주에서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 천연칼라 영화인 <선화공주> 가 이 땅에서 만들어졌으며, 1회로 끝나기는 했지만 1959년 제정된 '전북영화상'은 영화인들이 스스로 만든 최초의 영화상이었다. 또한 '우주영화사'라는 자체 영화사가 있었으며, 전주 출신 영화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영화들이 전국의 극장에 내걸렸다. 선화공주>
19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전주는 한국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산실로, 한국의 할리우드였으며 또 지금의 충무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 전주의 영화인들이 충무로로 옮겨갔고 영화 제작의 맥도 끊겼다. 그로부터 90년대까지 계속된 공백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2000년대 전주는 다시 영화로 깨어났다.
1999년 한 해 동안 전북일보는 기획특집 '전주, 21세기 한국영화의 푸른꿈'을 연재했다. 5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지였던 전주의 영화 역사를 조명한 이 기획은 자칫 잊혀진 기억이 될 뻔 했던 우리의 역사를 복원해 내는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0년 한국 영화의 탯자리였던 전주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탄생했다.
2009년 봄, '전주국제영화제'가 10회를 맞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10년이란 시간 동안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왔다. 물론 초창기 모든 것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갈등과 진통도 있었지만 이를 슬기롭게 극복, 지금은 한국 영화와 지역 안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는 4월 30일부터 5월 8일까지 열리는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앞두고 '전주국제영화제' 10년을 되짚어본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 그 곳에 한국영화의 푸른 꿈이 있다.
"거대한 도시가 아닌, 이런 작은 지역에서 한 나라 영화의 행로를 바꾼 작품들을 만든 경우는 세계 영화사에서도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다."
제1회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1999년 2월 전북대 건지아트홀에서 열린 '전주영화제 방향모색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전주영화제는 부산이나 부천에 비해 후발주자지만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주의 상징적 자본이자 문화적 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전주의 영화 역사와 그 가치를 인정했다.
전주는 50∼60년대 서울의 충무로와 함께 한국 영화의 한 중심을 이루었던 영화문화의 메카였다.
지방 도시에서 영화문화가 얼마나 자리잡았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지만, 전주는 분명 영화의 땅이었다. 전북 영화계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고 탁광 영화인협회 도지부장은 1999년 전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아리랑> 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뒤, 충무로에 나서면 '전주 촌놈들이 대박을 터뜨렸다'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만들었지만, 당시 풋내기배우부터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기배우들까지 전북 영화계 인사 눈에 들기위해 애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아리랑>
모든 것이 부족하고 척박했던 시대.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전주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한국영화의 자생력은 생각할 수도 없는 시기였다.
해방 이후 전북 최초의 영화는 1948년에 만들어진 이만흥의 <끊어진 항로> 였다. 이만흥 감독은 전북에 영화문화의 뿌리를 내린 주역이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군산신문사의 기자였던 그는 일본대학 연극영화과에서 공부를 했으며, 영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늘 시나리오를 썼다. 해방 이후 아무런 기술적, 재정적 뒷받침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수공업적 제작형태로나마 16mm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끊어진>
1950년 6·25 직전 군산과 익산에서 창설된 제3연대장 함준호가 주축이 돼 만든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 는 반공영화였지만, 35mm의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였다. 그러나 전북에서 영화가 만들어질 무렵, 6·25전쟁이 발발해 모든 것이 중단됐다. 성벽을>
9·28 수복이 되자 전주에서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몇가지 조건이 조성됐는데, 가장 큰 강점은 서울에서 피난온 연예인들이 집단적으로 전주에 몰려있었다는 점이다. 연예인들은 전주에 주둔했던 11사단 정훈대에 소속돼 있었는데, 전주극장 주변 다방에 자주 모여들었다. 장명수 전북대 명예교수는 「전주 근대생활조명 100년」 제2권에서 "변기종 김승호 이예춘 허장강 김진규 주선태 황해 박노식 전택이 노경희 도금봉 김희갑 현인 김정구 등이 군이나 경찰의 선무공작대에 종사하거나 유랑 악극단을 만들어 수복돼 통행이 가능한 곳에서 반공을 연극하고 노래했다"고 증언했다.
1951년 경찰 공보실에서 경찰영화 <애정산맥> 을 제작한 데 이어 1953년 <아리랑> , 1955년 <피아골> , 1956년 <선화공주> 등이 제작됐다. 선화공주> 피아골> 아리랑> 애정산맥>
<피아골> 을 정점으로 전주는 영화도시가 됐다. <피아골> 은 흥행에서도 성공했으며, '제1회 금룡상'에서 감독상, 연기상, 녹음상 등을 수상하며 화제작이 됐다. 또한 완벽함에 가까운 리얼리티로 용공혐의까지 받으며 문제작으로도 떠올랐다. 피아골> 피아골>
비록 16mm의 소형이었지만 한국영화 최초로 시도된 총천연색 영화였던 <선화공주> 는 우리 영화의 컬러시대를 연 첫 작품이다. 포스터도 전부 홍콩에서 인쇄해 왔으며 배우들은 영화 속 복장을 하고 서울 시내를 돌며 홍보전을 펼쳤으니, 전주 영화인들의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선화공주>
과거 아무도 전주에서 영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2000년 전주에서는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가 탄생한다. 전주영화제 개최는 영화의 역사와 산업이 서울 중심인 오늘에 전주의 영화사를 되살려내는 작업이자 이제는 지역이 중심이 돼 지역의 시선으로 한국 영화, 세계 영화 전체를 바라보기 위한 창을 내는 작업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배경과 명분은 탄탄했다.
그러나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등이 영화축제의 자리를 선점한 상황에서 전주영화제는 차별화를 위해 기존의 접근방식과는 다른, 대안적인 영화를 주목했다. 그리고 현재는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술로 가능성을 실험하는 단계였던 디지털 영화를 택했다.
반세기 전 전주의 영화인들이 <선화공주> 를 통해 실험과 도전을 했듯, 2000년대 전주영화제 역시 낯선 발견에 주저하지 않고 나선 것이다. 영화인들의 꿈이 무모한 도전으로 끝나지 않도록 축제의 자리를 마련한 전주영화제. 그런 점에서 전주영화제는 분명 '좋은 영화'들을 위한 '좋은 영화제'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셈이다. 선화공주>
2000년 4월 24일 전북대 문화관 시사회장에서 '지역영화사-전주'를 상영했던 변영주 감독은 "좋은 영화가 상영될 때 많이 봐주는 것이 영화팬들의 의무다. 그래야 다음번에도 계속 좋은 영화가 틀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알아봐주는 눈이 있을 때, 비로소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될 수 있다는 것. 이 한 마디는 전주영화제의 10년 역사,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 안에서 겪은 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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