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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특집] 안숙선 전 세계소리축제 위원장

푸근했던 고향마을 '생생'…귓전에선 풍물소리 '쟁쟁'

이번 추석에도 나는 무대를 준비한다.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내 고향 남원은 추석이 되면 어김없이 굿을 했다. 십대 때 내가 자란 곳은 남원에서도 천거리와 쌍교리, 동충리 일대였는데 공터마다 농악단들이 나와 풍물을 쳤다.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웠던 나도 명절 때가 되면 공연하러 다니기 바빴다. 추석 특집 방송을 제작하는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하기도 했고, 남원국악원에서 추석 공연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럴까. 열여덟, 열아홉 쯤 남원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고향을 떠올리면 귓전에서 풍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새 옷을 사달라고 조르던 내게 어머니는 "추석되면 해줄께"라는 약속을 하곤 하셨다. 그러고 추석이 되면 "이번 설에 꼭 해줄께"라고 미루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양단으로 된 참꽃색 빨간 치마다. 어느 해 추석,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던 어머니는 '수복(壽福)'이라는 글씨가 작게 써있는 치마에다 색동저고리, 버선까지 손수 지어주셨다. 총총 머리를 땋아 댕기머리를 하고 다 닳아빠진 고무신 대신 어머니가 큰 마음 먹고 사 주신 새 신을 신고 동네방네를 뛰어다녔다. 옷 맵시를 자랑하고 싶어 친구네 집 대문 앞에서 "놀∼자∼"를 길게 외쳤던 기억에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예쁘다는 어른들 칭찬에 명절 떡까지 얻어먹고 오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시절 내 꿈은 명창이 아닌 살림 잘 하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던 시절, 어머니는 여자는 살림을 잘 해야한다는 말씀을 해주곤 하셨다. 어떤 집 며느리는 바느질을 잘한다더라, 어떤 집 며느리는 집안 경사를 잘 치렀더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소근소근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지금 고향에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두 분 만이 살고 계신다. 남원 근처를 지날 때면 잠깐씩 들러 인사드리고 오는 정도지만, 그래도 고향이 그리운 것은 그 때만큼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절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잇속 챙길 일 없고, 책임질 일 없고, 고향 뒷동산을 뛰어다니며 열매를 따먹고 했던 기억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모든 것이 어렵지만, 내일이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살고 싶다. 가끔씩 고향에서의 푸근했던 기억을 꺼내보면서 말이다. 그래도 자꾸만 위축이 된다면, 이번 추석에는 전통음악과 함께라면 좋겠다. 한과 흥이 녹아든 전통음악이라면 고단한 세상살이,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 원로단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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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휘정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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